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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파편들을 주어모아온 나날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1월24일 11시13분    조회:6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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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우광훈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주임 우광훈의 이야기


      최근년에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행사들에서 사회를 거의 전담하고있는 소설가 우광훈씨 1970년대말에 소설 《외로운 무덤》으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후 여러부의 인기소설로 굵직한 상들을 거머쥐면서 전도유망한 청춘파소설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주임직을 맡고 행정사무에 쫓기는 분주한 일상임에도 새로운 작품창작을 위해 신들메를 조이고있다.

회색의 동년


      1954년 10월, 연길시의 지식인가정에서 4녀2남 6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우광훈은 연변인민출판사 번역실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우파로 몰려 훈춘(현) 삼가자향(공사)으로 로동개조를 내려가는통에 다섯살 어린 나이에 여덟식구가 다섯곳에 흩어져사는  서러움을 지녀야 했다. 아버지의 로임이 96원에서 48원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대학생인 큰누나, 고중생인 둘째누나, 초중생인 셋째누나, 소학교에 다니는 형님과 넷째누나에 젖먹이 광훈이까지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힘들어진 어머니는 광훈이와 셋째누나는 심양에 있는 외가집으로, 넷째누나는 서란에 있는 작은이모집으로 보냈던것이다.
      3년후, 연길에 돌아와 하남소학교(지금의 건공소학교)에 붙었지만 어린 나이에 우파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쓰고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잔혹했다. 그래서인지 광훈이의  동년은 많이 외로왔다. 불행중 다행인것은 그로 해서 동네애들이 노는 시간에 독서를 할수 있게 된것이였다. 아버지가 출판사에서 근무했기에 책을 쉽게 구할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외로움을 달래는데 책은 참으로 좋은 친구였다. 그시기 광훈이는 《따린과 쑈린》, 《헝겁동이이야기》와 같은 소설도 읽었지만  과학서적을 더 좋아했는데 누나들과 형이 읽던 《취미의 물리학》, 《취미의 수학》, 《미츄린이야기》는 물론 그때 금방 중국에서 출판되여 우리 말로 번역된 《무엇때문에》를 아버지가 가져오기 바쁘게 읽어버렸다. 때때로 동네애들과 책속의 과학상식을 이야기하면 애들이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소학교를 다니는 동안 “거꾸로박사”라는 별명을 달고다녔다.

사춘기의 실의감


      동년시절의 취미로 선택이 되였다면 물리학자가 아니면 어느 중학교에서 물리학이나 가르치는 교원이 되였을지도 모르는 우광훈이 소설에 취미를 붙이게 된것은 중학교에 올라간후인 1968년부터였다.
      문화대혁명초기의 무장싸움이 지난간후 얼떠름하게 중학생이 되여 학교에 나가보니 별로 배워주는것도 없이 《모주석어록》에 곡을 붙인 노래나 그당시 류행되던 노래에 맞추어 “충성춤”을 추고 《모주석어록》을 누군가가 읽으면 그것을 들어주면 그만이였다. 
그리고 반마다 “모택동사상선전대”가 조직되였는데 문화대혁명전에 연길시소년궁전 연극소조에 다닌적 있고 하남소학교 합창대원경력도 있은 광훈이는 자연스럽게 선전대의 일원으로 선거되였다. 그런데 로동자선전대의 성원이 광훈이를 부르더니 우파의 아들은 모택동사상을 선전할 자격이 없다면서 선전대에서 나가라고 할줄이야?! 우파모자를 벗었어도 소용없다는것이였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등교하기조차 싫어진 광훈이는 학교를 간답시고 집을 나와서는 나무우에 올라가 옛날 형이나 누나들의 교과서를 들여다보거나 당시 철남에 있던 묘포장에 가 토끼풀을 캐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반도체라지오를 조립하는데 흥취를 가지고 몇날 며칠씩 이극관이고 삼극관이며를 가지고 씨름해서 외국방송을 청취하기도 했다.
      그후 아버지가 “9가지 부류”사람에 속하여 갇혀들어가면서 어른들의 멸시와 천대의 눈총까지 받아야 했던 광훈이는 주눅이 들어 집구석에 붙박혀있다가 성인문학작품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집 책장에는 맑스, 레닌, 쓰딸린과 모택동의 저작외에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조야와 수라》, 《참된 사람의 이야기》와 같은 소설책이 그대로 꽂혀있었다. 광훈이는 바로 오스뜨롭스끼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를 통해 난생 처음 열혈청년들의 련애장면을 읽으면서 남녀의 사랑에 대해 아리숭하게나마 동경을 가지게 되였다. 

문학의 꿈이 싹트기까지


      1969년 겨울, 도시의 정부직원들과 지식인들이 “농촌에 가 혁명을 계속한다”는 명목으로 대량 농촌에 쫓겨가게 되였는데 “모자를 벗은 우파”였던 우광훈의 아버지도 그 명단에 올랐다. 이렇게 우씨일가는 한족동네인 지금의 돈화시 마호향 쟈피거우촌으로 추방이 되였다.
      돈화에는 조선족들이 많지 않았지만 쟈피거우와 10여리 떨어진 곳에 대안툰이라는 조선족마을이 있었고 공사에도 홍기대대라는 조선족대대가 있었다. 그리고 30여리 떨어진 현유공사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있고 연길의 조선족학교에서 내려간 하향지식청년들도 푸술했다. 광훈이는 그런 지식청년들과 친구로 사귀고 시도 때도 없이 집체호에 드나들면서 그들이 보는 책들을 빌려보군 했다. 도시에서는 “독초”라고 불태워진 책들을 집체호에서는 공공연히 볼수 있었고 “혁명”의 강도도 도시처럼 삼엄하지 않았다. 덕분에 광훈이는 쉑스피어의 《햄리트》를 읽었고 뿌쉬낀전집의 1권과 5권을 읽을수 있었다.
       처음 《햄리트》를 읽으며 광훈이는 문학의 매력에 심취되였고 많은 장절들은 아예 외워버렸는데 책장의 아무 페지나 번져서 첫구절을 읽으면 다음 구절을 외우는 내기에서 이기기도 했다. 그뒤로 뿌쉬낀의 《예브게니 오네긴》, 뚜르게네브의 《전야》, 파금의 《집》, 리기영의 《두만강》 등과 같은 “독초”들을 수십권 읽으면서 점차 문학이 가져다주는 희미한 열망에 매료되여갔다.

“일기”쓰기로 시작한 습작훈련


      우광훈의 습작훈련은 어찌보면 “일기”쓰기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다.
      당년에 쟈피거우에서 물을 긷다가 우연하게 동갑내기 한족녀자애를 만나서 첫눈에 반해버린 광훈이는 그녀와 비밀련애를 하다가 발각되여 청년활동이 있을 때마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질책의 상대가 되였다. 사회적으로 오는 압력이 커질수록 무엇인가를 적고싶어진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밤이면 등잔불밑에서 책을 읽고 생각나는 그대로 무엇이든 글로 만들었다. 지금의 표준으로 본다면 수필도, 소설도, 일기도 아닌 잡동사니였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코밑이 새까매지도록 거의 매일 밤마다 종이에 긁적거렸다. 그러면서 서서히 문학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흥분에 들떠있기도 했다.
      그동안 불같은 성미를 가진 아버지의 매를 수없이 맞으면서 용케도 버텨내던 한족녀자애는 2년제 고중을 졸업한지 얼마 안되여 림산작업소의 로동자와 강제약혼을 했다. 련속극과 같은 탈가와 자살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이듬해 음력설전야에 그녀는 결혼을 했다. 결혼마차에 오르지 않겠다고 악을 쓰는 그녀를 친척들이 모여들어 팔다리를 들어 마차에 올려놓았고 그렇게 그녀는 결혼등록도 하지 않은채 시집을 갔다.
      그때에야 광훈이는 비로소 자기는 사회의 최하층에서도 처참한 밑바닥인생이라는것을 인식했고 이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개인의 노력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빼앗긴 사랑을 글로 남기고싶고 소설처럼 된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인가에게 알려주고싶었다. 이렇게 그는 문학청년으로 되였고 문학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였다.

소설농사의 첫발자국


      문학청년 우광훈이 본격적으로 소설창작에 몸을 담은것은 석탄지질탐사대에서 탐사로동자로 일하던 시기부터였다.
      1974년, 아버지가 공직을 회복하고 화룡 복동탄광 남양갱 총무로 근무하게 되면서 화룡현 동성공사 흥성대대 집체호에 내려가 3년간 지식청년생활을 한 우광훈은 1976년 12월에 로동자모집을 거쳐 석탄지질탐사대에 취직하였다.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산속에서 지내야 하는 탐사로동자의 생활은 퍼그나 렵기적이여서 많은 글감을 루적할수 있었다. 이런 글감들을 문학작품으로 만들고싶어진 광훈이는 자기의 사회적인 각색이 무엇인가를 망각할 정도로 글쓰기에 집착했고 1978년에는 마침내 처녀작인 《탐사대원》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그는 지질대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륙속 써내는 한편 빼앗긴 사랑을 주제로 하는 소설 《외로운 무덤》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쟈피거우에서 경험한적이 있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소설로 승화시킨것이다. 다시말하면 작품의 주인공도 작자와 마찬가지로 우파의 아들, 농촌에 쫓겨갔다가 거기서 한족녀자애와 사랑을 속삭이지만 주위의 압력때문에 끝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생활에서 한족녀자애가 핍박에 못이겨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갔다면 소설에서는 녀자애가 한을 품고 고혼이 된것이다.
      1979년 6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연변문단의 첫 상처문학작품으로 각광을 받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국경30돐맞이 응모활동”에서 소설 2등상(1등상 공백)을 따내는 영예를 안아왔다. 이를 계기로 우광훈은 작가의 호칭을 듣게 되고…

성숙에로 가는 길


      자습으로 작가대오에 가담한 우광훈씨가 보다 성숙되고 깐진 작품을 발표하면서 전도유망한 소설가로 자리매김하게 된것은 1983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 문학반에 들어가 문학창작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부터였다.
      단순한 열정에 의거해 고군분투해오던 우광훈씨는 유치원생 아들을 둔 아빠의 신분으로 대학공부를 하면서 진정 문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되였고 농촌생활경험을 바탕으로 9만여자 편폭의 중편소설 《시골의 여운》을 졸업작품으로 내놓았다.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 문화대혁명기간에 사춘기소년이 시골로 쫓겨갔다가 거기에서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년상의 소녀와 친하게 지낸다. 페결핵으로 앓고있는 소녀가 안스러운 소년은 페병에 좋다는 약이면 꿀벌들이 처녀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속에서 빚어놓은 꿀까지 얻어들일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하지만 병세가 점점 악화되여가는통에 소녀는 끝내 일어나지 못한다. 림종을 앞두고 “너는 왜 크지 않느냐?”라고 속심을 터놓는 소녀, 그제야 그녀가 년하의 자기를 사랑하고있었다는것을 알게 된 소년…
      사랑의 아픔을 문학화한 이 작품은 비극이면서도 담담하게 씌여지고 표면화된 농촌생활을 일반백성들의 일상으로 부각한것으로 하여 문학인들의 긍정을 받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회중단편소설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우광훈씨의 소설작품에서 비교적 인기를 많이 끈 작품을 꼽는다면 단편소설 《메리의 죽음》을 빼놓을수 없다. “메리”라고 부르는 사냥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은 존재의 대우에 대한 부조리를 첨예하게 조명하고 생명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것을 제시한것으로 소문을 놓았다.
      가장 용감하면서도 우수한 사냥개이지만 첫 주인을 잃은후 두번째 주인을 잘못 만나는통에 결국에는 목숨을 잃게 되는 메리, 용속한 인간한테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해 죽어가는 메리의 모습을 통해 당시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참모습을 보여준 이 작품은 반항적인 심리를 여실하게 반영한것이 특징적이다. 연변문단의 첫 동물소설로서 구상자체가 아주 렵기적이고 각이 선 이미지를 갖고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은 후에 연변작가협회 문학상과 길림성《장백산》문학상을 따내였다.

비결은 어디에?


      지금까지 소설집 《메리의 죽음》, 《가람 건느지 마소》와 장편소설 《흔적》…외에도 수필, 실화(다큐멘터리)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선보이고 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을 비롯해서 많은 영예를 따낸 우광훈씨는 창작비결에 대해 말할라치면 지금까지의 생활실천을 첫손에 꼽으면서 위대한 작가 하밍웨이의 명언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를 되뇌이군 한다.
      우광훈씨의 인생궤적을 살펴보면 그는 지금까지 생활체험을 너무 많이 했다. 한창 부모님들의 그늘에서 어리광을 부릴 다섯살 어린 나이에 3년이나 외가집에 가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품을 그리였고 집에 돌아와서는 배고픈 고생을 많이 했으며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우파의 자식으로 몰리우면서 소외당하는 서러움을, 온 가족이 농촌에 내려간후에는 사랑을 빼앗기는 아픔을 맛보았다.
      농촌하방호의 자녀로 5년, 집체호생활 3년, 지질탐사대생활 6년 이렇게 도합 14년을 농촌에서 지낸 그는 또 금방 태여난 새끼노루 두마리를 주어다 염소젖을 얻어먹이며 키워서 산에 놓아주고 꿀벌들이 처녀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속에 들어가 빚은 꿀을 채집하는 등 별의별 일들을 다 직접 체험해보았다.
      이런 무수한 경험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작가협회 전직작가로 된 우광훈씨의 창작생활에서 뼈와 살과 피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에 소설가 우광훈은 청소년시기에 인생수업을 많이 했기에 허구를 별로 하지 않고 경험적인 글감들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킬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실생활속의 모습


      실생활속의 우광훈씨는 년로한 어머님을 91세까지 모신 효성스러운 아들이고 안해를  지극히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미더운  남편이요, 하나뿐인 아들을 중국의 청화대학과 맞먹는 한국포항공대에서 핵물리를 연구하는 박사연구생으로 키운 훌륭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당년에 우광훈씨는 지질대에서 근무하며 농촌처녀와 사랑을 속삭이고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정식직업이 없는 안해는 연길에 들어온후 지식청년인쇄공장에도 출근해보고 장사도 하면서 살겠다고 버둥거렸다. 이러는 안해가 안스러워서 그는 대학공부를 하는 기간에도 아들애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전담하였고 안해가 한국에 나간후에는 로모를 모시고 아들애의 뒤바라지를 하는 중임을 떠메며 안해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6남매가운데서 막내인 우광훈씨는 손우 누님, 형님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데 동조를 했다.
      인간 우광훈씨의 인생좌우명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것이라고 한다. “내가 그대들의 곁을 떠나게 될 때 사람들이여 기억해다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했었다는것을!”타고르의 이 명언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하고있는 우광훈씨는 길림성정협 제9기, 10기 위원 등 사회직무와 본직사업인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주임직을 행사하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하기에 최선을 다한다.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으로서의 우광훈씨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최근년에 행정사무에 매워있다보니 지난 2005년에 장편소설 《흔적》을 내놓은후로 소설창작에 별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것이다. 따라서 소설가 우광훈씨에게서 가장 절박한 일은 “인생에서 총화가 될만한 소설을 만들어보는”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한 가족의 이민사 다시말하면 한 가족이 중국에 이주해와서 중국조선족이 되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을 창작하기로 결심하고 구상중에 있다고 한다. 우광훈씨가 내놓게 될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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