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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3]특이한 《최씨렬사비》에 담긴 눈물겨운 사연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월3일 10시00분    조회: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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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5주년 맞이 특별기획보도- 《81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항일녀렬사의 충혼》제2편

특이한 《최씨렬사비》

박영철선생은 손수 그린 수채화 한장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모아산과 산아래 아기자기한 줄집동네가 이어지게 그린 그림이였다. 그림속 모아산에는 오각별이 새겨진 렬사비가 유표하게 보였다. 선생은 《이 렬사비》는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최씨렬사 5명의 영명과 사적이 새겨진 《최씨렬사비》라 했고 줄집을 짚으면서 가문 렬사들의 유가족이 광복후 인민정부로부터 배려받은 집이이였다고 소개한다. 선생은 《외할머니를 비롯한 선렬들이 굽어보시는 이 집에서 우리 산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지요. 마음속으로 언제나 이 위에 계시는 선렬들을 그리워하고 우러르며…》라고 한다. 

 
1963년 대학시절 연길시혁명렬사원(현재 연변렬사릉원) 기념비에서 외할머니를 비롯한 최씨렬사들의 영명을 찾아 기리는
최계옥렬사의 외손자 박영철./(자료)

박선생은  연변대학을 다니고있을 때인 1963년도 셋째외할머니한테서 이름만 다른, 똑같은 5장의 렬사증을 보았다는데  바로 《최씨렬사비》에 새겨진 외할머니 등 5명 최씨렬사의 렬사증이였다고 한다.

박선생은 셋째외할머니와 어머니한테서 들은대로라면 두 최씨가문에서만도 항일전쟁시기때부터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이 끝날 때까지 혁명에 투신해 희생한 렬사가 12명이였지만 그중 상기 5명만 렬사증을 발급받고있었다고 한다.

《기가 찬 일이지, 최씨네 남자들은 다 항일에, 해방전쟁에 목숨 바치고 이렇게 렬사증을 받아왔구나…》 하며 락루하던 셋째외할머니손에서 외할머니의 렬사증을 받아든 때의 일이 박선생은 잊어지지 않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계옥렬사의 렬사증은 그렇게 박영철선생이 셋째외할머니한테서 받아서 어머니한테 전달해드렸다가 40년만에 다시 형님손에 이어 넘겨받았다.

 최씨렬사들의 사적이 새겨진 《

최씨렬사비》의 3개 면 /박영철

최계옥렬사를 비롯한 최씨네 5명 렬사의 혁명사적을 기재한 문자를 찾아볼수 있는 곳은 이른바 《최씨렬사비》이다. 이야말로 《마을마다 렬사비》인 연변의 장엄한 풍경가운데서 특수한 의미가 담긴 기념비라고 말하고싶다.

기자가 처음로 박선생과 함께 《최씨렬사비》를 찾아간것이 2010년말이다. 비석을 세운 시간은 1958년 7월 20일로 적혀있고 비문에는 5명렬사의 혁명사적이 짤막짤막하게 적혀있다.

철사를 보호란으로 두른 소위의 《명신촌 렬사릉원》입구에 연길시교육국에서 세운 《연길시청소년교외교육기지. (2010년 3월)》 패말이 보였다.

거기에 있는 기타 6부의 기념비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 《최씨렬사비》는 높이, 너비, 두께 할것 없이 크기가 눈에 띄이게 컸다. 또 유독 백암석자재로 되였고 세운 력사가 가장 일찍하며 특히 5명렬사의 사적으로 3개면에 비문이 꽉 채워 새겨져있는것이 남달랐다.

비문석에 5명 최씨렬사의 사적이 짤막짤막하게 새겨져있다.   

《최계옥,1876년 7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마유동 생, 1930년 혁명지하공작에 참가, 1931년 유격대에 참가, 1932년 10월 24일 연길현 차조구 동흥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최희경, 1893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귀락동 생, 1928년 혁명지하공작에 참가, 1930년 유격대에 참가, 1931년 유격대분대장, 32년 10월 24일 연길현 차조구동흥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최태훈, 1908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귀락동 생, 1927년 3월 2일 혁명지하공작에 참가 1928년 청년회장, 빈농회장, 1929년 식구선전부장, 1930년 연길현 중공조직부장, 33년 신창동전투중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

최우, 1923년 연길현차조구 동흥툰 분수동 생, 1946년 길동군정대학 졸업, 조선간부학교근무, 1948년 조선인민군1사단 3련대 정찰참모, 작전참모장, 1950년 10사사단 29련대장, 락동강전투, 강원도등지 해방후 국기훈장 1,2,3급 받음, 1951년 3월 19일 오대산로인봉전투에서 전사.

최동만, 1926년 연길현 차조구 중평리 생, 1946년 6월 길동군정대학 졸업, 1947년 중공장춘전투에서 영웅훈장, 1948년 야전군작전참모, 1949년 호남성해방전투에서 영웅칭호, 1950년 6월 조선인민군 라남련대 참모장으로, 그해 10월 전사.》

연길시혁명렬사릉원(현재 연변혁명렬사릉원)의 영명록에 상기 최씨5명렬사의 이름이 새겨진것도 그무렵이였다고 한다. 5명 렬사 관계를 다시보면 최계옥과 최희경은 자식을 나누어가진 사돈간이고 최희경, 최태훈, 최우는 조손 3대이다. 또 최계옥쪽으로 보면 최태훈은 최계옥의 사위이고 최우는 최계옥의 외손자이며 최동만은 최계옥의 시조카(시동생의 아들)이다.

 
박영철선생이 60년대에 찍어둔 《최씨렬사비》원터 원모양 사진/자료
 
기자는 박선생의 형님 박증수옹(83세)과 최동만렬사의 동생인 최금자(73세)할머니를 비롯한 최씨렬사유가족분을 만나 《최씨렬사비》에 깃든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최씨렬사비》는 바로 박선생의 셋째외할머니 즉 최금자로인의 어머니께서 가문의 렬사등록을 마친후 민정국의 비준을 받고 기타 유가족들과 토론하여 국가에서 배당받은 무휼금으로 《당시로는 최상수준》으로 설계하여 세운 개인렬사비였다고 한다. 그 비석아래에는 1립방메터 더되는 기석이 고여졌댔는데 그 기석은 모아산아래 있었던 일제놈들의 부대시설에서 남겨진 돌이였다고 한다. 비석을 만든 석장이 최씨렬사들의 사연을 듣고 그 돌을 《최씨렬사비》의 기석으로 고이자고 건의한것을 가족들이 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중한 기념비가 세월의 풍상고초에 시달릴줄이야 …

 
《최씨렬사비》(오른쪽 첫번째)가  원터인 현재 연변호텔정원자리로부터 명신촌렬사릉원에 옮겨진 모습./김파기자

《최씨렬사비》의 조우

그런데 가족도 모르게(공고를 냈다고 하지만) 명신촌렬사릉원으로는 비석만 옮겨졌고 그 특이한 기석은 찾을길 없어졌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기념비를 《뼈 한줌 찾을길 없는 친인을 그리며 반세기나마 2대, 3대의 후손들이 우러러 모셔온 선조님들이고 선렬들이다.》고 기자에게 말한다.

《개발》이라는 리유로 《최씨렬사비》가 근처에 세워진 다른 집 렬사비들과 함께 명신골로 옮겨지면서 《명신촌렬사릉원》도 그때 그렇게 생긴것이라고 한다. 《최씨렬사비》는 그런식으로 워낙 《개인관리》로 된 렬사비였던데로부터 가족도 모르는 사이에 《명신촌렬사릉원》에 들어가 촌급관리 기념시설로 된셈이다.

《분산된 렬사기념시설 건설관리보호사업을 강화할데 대한 통지》 등 법규의 《기본원칙》에는 《분산된 렬사기념시설 천이, 정합시 렬사가속의 념원을 충분히 존중하고 리해하며 지방풍속을 존중, 인문적인 배려를 중시하고 매 하나의 세절을 잘 장악하라》는 요구가 명시되여있는가 하면 《렬사가족이 관리하던 기념시설은 렬사릉원으로 집중해 천이하든가 혹은 계속 렬사가족에서 관리하는가를 협의하는 토대에서 실행한다》고 명시했다.

2013년 추석때 기념비 천이소문을 듣고 기자는 두번째로 박선생과 함께 《최씨렬사비》를 찾아갔다.

개발공지가 릉원의 북쪽으로 10메터 정도 사이두고 다가와있었다.

기념비주위에 나뒹굴고있는 종이 한장을 주어들어보니《공고》지였다.

《…요구에 따라 ...이곳 기념비는 연길시 소영진 혁명렬사기념비로 정합하게 되며 정합되여가는 위치는 소영진 소영촌임, 성묘 오는 렬사가족은 소영촌렬사기념비 혹은 공원뒤 연변혁명렬사릉원으로 가십시오 》라는 내용으로 된《공고》였다.

 
《최씨렬사비》주변에서 《공고》지를 주어든 박선생.
 
 
박선생은 《전국 분산된 렬사기념시설건설관리보호사업에 대한 요구를 관철락실한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공고》소행, 그리고  《명신혁명렬사릉원》주변의 상황을 받아들일수 없고 렬사들의 충혼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고 한다.

추석휴일이 끝나는대로 《공고》에 밝혀진 연길시 소영진 사회사무판공실전화에로 박선생이 련계했는데 《상급의 지시대로 할뿐입니다. 할말이 있으면 시민정국을 찾아가시오.》 하는 대답이였다. 박선생은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가라앉히면서 10월 18일 연길시민정국을 찾아갔다. 기자도 동행했다.

박선생과 기자는 《공고》에 질의와 불가접수성을 제기한 동시 그 기념비의 특수한 의의를 강조해 보류할것을 제출했다.

 
《명신렬사릉원》턱밑까지 밀어온 개발공지의 모래산,모래산너머에 《명신렬사릉원》이 있다./김영자기자

우리를 접대한 민정국 무휼과의 과원은 우리를 설득하려다 종당엔 《가족의 생각을 령도에 회보하겠다. 가족의 동의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것이다. 돌아가 련계를 기다려라》며 우리를 돌려보낸다.  그 때 민정국에 기자의 전화번호도 남겼었다.

3일후, 소영진 사회사무과에서 기자에게 그 비석을 그냥 그자리에 둘수 없다는 전화가 왔는데 공교롭게도 박선생은 예약된 병치료일정에 맞추어 한국에 가고 연길에 없었다. 

그러던 11월 4일, 기자는 명신촌렬사릉원자리가 평지로 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게 되였다. 경악스러웠다.

사정상 최동만렬사의 동생인 최금자로인과 기자가 11월 14일에야 연길시민정국 해당부서 책임자를 만날수 있었다.

그 책임자에 따르면 《그 비석을 이미 기타 비석과 함께 7메터 땅속에 묻었다. 대신 5명 최씨렬사들을 위해 연변렬사릉원에 단독 묘비를 해드렸다》고 한다.

최금자로인은 억이 막혀 울분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 선렬들이 묻힌 자리까지 이렇게 밀어도 된다고 누가 비준했는가?…》

그 책임자는 명신촌렬사릉원 토지가 렬사기념시설용 토지로 등록되여있지 않은 리유, 그리고 유가족들과 련계하는것은 소영진과 명신촌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유가족측은 소영진 사회사무과, 민정국 무휼과와 그동안 련계가 있었던 상태이고 특별히 찾아가서 생각과 요구를 제출까지 했는데 소통없이 이렇게 처리하는것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 책임자는 유가족의 동의없이 비석을 처리한것은 잘못임을 시인하며 사과한다면서 《더 잘해드리지 않았는가? 〈정책대로〉라면 그 렬사들은 렬사묘지에 단독 묘비를 앉히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최금자로인은 거듭 그 렬사비에 얽힌 사연과 유가족의 감정을 말하면서 비석을 파낼것을 강경히 요구하자 그 책임자는 최종 《기념비를 파내겠다》는 대답은 했다.

그 뒤로 연길은 기온이 급히 떨어지고 큰눈이 이어지기까지 했다.

귀국한 박선생은 해남성에서 렬사비때문에 침식불안해했고 최금자로인도 더는 치떨게 할수 없었다. 11월 28일, 기자는 《 최씨네 렬사사적 정리자》의 신분으로 그 책임자를 찾아가 이 렬사비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할것을 요구했다. 11월 30일 소영진 사회사무과 유관인원과 명신촌의 책임자까지 민정국에서 대면, 최종 그날로 기념비를 파내기로 했다. 가족이 제출한 요구대신 《최씨렬사비》의 600여자(중문자)되는 비문을 렬사별로 각기 단독묘비에 새겨넣기로 했으며 그 《최씨렬사비》는 파낸후 연변혁명렬사릉원에 당분간 보관해두기로 했다.

그날 그 책임자는 최씨렬사들의 묘비는 한자리에 나란히 배치되지 못했고 글씨가 틀린 점도 발견했다는 등 미비한 점을 교대해주면서, 래년 청명을 맞으며 조절하겠다고 했다.

 
 묻혔다가 파낸 《최씨렬사비》,연변혁명렬사릉원 사무구역마당에 그대로 방치돼있는 상태./김영자기자

《최씨렬사비》를 되 파내여 연변혁명렬사릉원에 실어다놓았다는것을 전화로 확인한후 기자가 12월 17일 두번째로 가서 확인할 때까지 렬사비는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연변혁명렬사릉원 사무구역 마당 한쪽의 눈밭에 놓여있었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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