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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카마호: 천대와 모멸은 끝내 선상반란 비극으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월21일 02시42분    조회: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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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와 모멸은 끝내 선상반란 비극으로


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조선족 선원들이 주도한 한국 해운 사상 최악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으로 한국인 7명, 인도네시아인 3명, 조선족 1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6년 9월2일의 페스카마 선상 살인 현장검증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
⑭ ‘조선족’의 유입

언젠가 새로 온 사장님이 직원들 인적 사항을 작성해 보고하라고 한 적이 있다. 이름 옆에 출신 지역을 기재하는 칸이 있었는데 얼핏 내 항목을 보니 한자로 함북(咸北)이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함경북도라니. 관리팀 직원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을 때 “사장님이 원적지를 원하셔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원적? 그제야 까마득한 옛날,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이 되던 그즈음 입사 원서에 원적을 적는 칸이 존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원적은 함경북도 학성군이다.

 

원적이란 아버지 고향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그렇게 본다면 내 원적은 함경북도도 아니라 중국 만주 길림성이 돼야 한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두만강을 건너가 살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자식 가운데 하나였고, 만주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에야 할아버지를 따라 다시 두만강 넘어 고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남쪽을 향한 건 오직 할아버지네 가족뿐이었고 어떤 이는 북한에, 어떤 이는 만주에 흩어져 그 후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았다.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연변을 찾다

 

내가 고2 무렵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편지가 배달됐다. 편지 겉봉에는 달필의 한자가 쓰여 있었다. “조선남반부(朝鮮南半部) 부산시(釜山市) 양정동(陽亭洞)”. 중국에서 온 편지였다. 이산가족 찾기 이후 ‘중국에서 찾습니다’라고 해서 중국 조선족들의 소식도 국내에 전달됐는데 그중의 한 경우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내 작은할아버지, 즉 할아버지의 동생이셨다. 몇번의 편지가 오간 끝에 아버지는 중국과의 수교는커녕 ‘광둥 시내 호텔에 영어 한마디 하는 직원이 없던’ 시절, 홍콩을 통해 중국에 들어가 중국 대륙을 관통하여 베이징 거쳐 연길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으로 작은할아버지와 상봉하는 뜨거운 혈육의 정을 보여주셨다. 돌아오신 뒤에는 유독 여행담이 길었다.

 

“사람들도 얼마나 순수하고 정겨운지 몰라. 남조선에서 손님 왔다고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는지…. 옛날 우리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학교에서도 우리말 가르치고 우리글 배운다. 중국은 중국인데 중국이 아니야. 완전히 우리 땅이야. 조선족 땅이야.”

 

조선족. 나는 이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다. 중국에 거주하는 56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해방 뒤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정착한 옛 조선인들과 그 후예를 일컫는 말 ‘조선족’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중국과 우리 관계가 개선되면서 그 단어는 더욱 가까워진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이미 ‘중공’ 선수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호를 획득하고 잠실벌을 행진했고 이내 ‘중국’이라 하면 ‘자유중국’이 아닌 대륙의 거대한 나라를 일컫는 대명사로 전환됐으며 쌍방 간의 교류도 날로 그 폭이 넓어졌다.

 

1988년 6월26일 <한겨레>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6·25를 통해 총칼로 맞섰던 한중국 관계가 학문 교류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한국을 알고 배우려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는 가운데 이미 학위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 국적의 유학생도 있다. 국내의 유학생은 대부분 중국 국적의 한국인 3세로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입국해 체류기간을 연장, 실질적인 유학의 형식을 밟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유학생’은 3~4명이었다. 그로부터 26년 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중국 유학생 수를 셈해 보면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으나 그 빈약한 유학생들은 거의 조선족이었던 만큼 중국과 한국의 교류 초창기에 이 조선족이 단단히 한몫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국 찾아 물밀듯 몰려온 그들
신기함과 반가움은 얼마 안 돼
안타까움과 원망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 피라미드
맨 아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1명 죽은 페스카마호 선상 반란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 잔인함에
치를 떨며 편견의 벽을 쌓았고
조선족들은 한국 사회의 차별이
참극 낳았다며 어금니를 물었다

 

 

10억 인구의 중국에서 자치주를 꾸리고 살아가며 우리 언어와 문화를 지켜가는 ‘중국 속의 한민족’ 조선족 역시 대단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 이미지에는 호기심뿐 아니라 조금은 과잉된 민족의식, 분단과 해방 이전에 대한 향수와 ‘옛 고구려의 후예’ 같은 신비감까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방송사들 역시 앞다투어 연변을 찾았다. 그 가운데 <한국방송>(KBS)에서 내보낸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영상 속에서 방송 취재진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기차로 이동하는데,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조선족 여성 몇이 기차를 따라오며 작별 인사를 하는 장면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또 만납시다.” 눈시울들이 붉어져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얼굴 속에서도 보였고 그들의 손짓에서 전해지는 정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그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시던 아버지도 감회에 서려 한 말씀 하셨다. “저게 우리 모습이지. 조선족은 정말 대우를 해줘야 된다. 독립운동가들 후손 아니냐.”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변모하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1990년에 이르면 연변은 한국 유행가가 꽝꽝 울리는 가운데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돈다발 들고 벌이는 온갖 추태가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이때 일부 조선족은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남한에서 찾게 된다. 초기 고국 방문자들이 ‘중국 본산’ 한약재를 들여와 톡톡히 재미를 본 뒤 그야말로 ‘한약재 러시’가 형성된 가운데 수많은 조선족이 한약재를 싸 들고 한국으로 달려왔다. 1990년대 초 덕수궁 돌담길과 시청역 지하상가, 파고다 인근 공원에는 억센 연변 사투리의 조선족들이 펼친 노점으로 부산했다. 그들 대부분은 ‘가족 방문’을 위해 온 사람이었다. 바로 그즈음 내 작은할아버지도 한국 땅을 밟으셨다.

 

당숙모의 보자기에 들어 있던 것은…

 

할아버지를 영락없이 빼닮은 형제 중의 막내셨던 그분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다.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싶어 무엇 하나 해드리려 하면 “일없다! 네 아바이 안 그래도 우리 오게 한다고 돈 마이 썼다!” 손을 내저으시던 그분을 모시고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롯데월드에 모시고 갔다. 놀이기구를 타실 연배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구경거리가 될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할아버지는 크게 놀라신 듯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놀이기구와 휘황하게 번쩍이는 조명들, 화려한 퍼레이드와 음악 소리는 연변에서 평생 농사짓고 살아온 조선족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을 터다.

 

입을 다물지 못하시던 할아버지가 한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이거 돌리는 데 전기가 얼마나 들어가나?” 글쎄요, 하고 넘어갔는데 오늘 검색해 보니 당시 롯데월드는 월 1200만㎾, 의정부시(인구 40만명) 사용량의 절반을 혼자 잡아먹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당시 중국 연변자치주 연길시 전체의 전력 소비량 정도에 육박했을 것이다.

 

그렇듯 오색찬란한 롯데월드의 조명처럼 눈부신 성장을 하던 한국 자본주의의 발밑으로 조선족은 계속 유입됐다. 우리 가족에게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왔다. 공항에서 눈물을 지으며 “또 볼 수는 없겠지”라고 손을 흔드시던, 하지만 아버지가 쥐여 주시는 얼마간의 돈도 굳이 사양하실 만큼 꼿꼿했던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간 뒤 그 아들과 며느리가 방문한 것이다. 수백만원어치의 한약재를 싸 들고서. 나에게 당숙모가 되는 분은 배가 남산만 했다. 그 몸으로 둘러업고 온 보자기에서 고슴도치 쓸개니 뭐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쏟아질 때의 난감함이란. 그중 일부는 어찌어찌 소화했지만 대부분은 처치 곤란이었다.

 

결국 여비는 보태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한약을 더 이상은 팔아드릴 수 없다는 말을 해야 했고 그들은 실망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그 뒤로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 그분들은 그 약을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국내 한약재 시장이 휘청일 만큼 공급 포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흘낏 우리를 돌아보던 눈초리에는 ‘참 야박하구먼’ 하는 원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도 묘했다. 처음으로 사촌동생을 만난 반가움과 안타까움과 연민과 아울러 제대했다고 공부할 생각은 않고 빈둥빈둥 놀던 아들에게 보내던 것과 비슷한 멸시의 색깔도 진하게 섞이고 있었던 것이다. 당숙이 배부른 아내를 데리고 떠나던 1992년의 설 즈음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설 연휴가 계속된 5일 오전 9시께 서울역 앞 지하도에는 특이한 말씨의 중국 동포 50여명이 여느 때처럼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국에 온 지 한달쯤 됐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김씨는 경기도 안산시의 한 염색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이야기판에 불쑥 끼어든 서울의 동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끼어든 서울 동포는 그들의 한국행을 못마땅해하고 감시하는 방해꾼으로 비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조선족은 한국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맨 아래를 구성하는 집단이 되어갔다. 식당 아주머니들부터 90년대부터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3D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은 기타 외국인들과 그 자리를 메웠다. 어쩌면 조선족은 우리가 가장 늦게 발견한 ‘동족’이면서 가장 먼저 발견한 ‘외국인 노동자’였을지 모른다. 조선족 또한 아무리 힘들어도 1년만 벌면 집 한채 산다는 ‘코리안드림’ 홍수에 휩쓸려 김포공항과 인천부두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을 노리는 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짧은 기간 동안 조사한 통계만 봐도 피해자는 1만8000명, 조선족들이 당한 사기 총액도 300억원을 훨씬 넘었다.

 

바로 그해, 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페스카마호의 비극이 일어났다. 조선족 선원들이 주도한 한국 해운 사상 최악의 선상반란 사건이었다. 한국인 7명, 인도네시아인 3명, 조선족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단 한명의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기지로 배 안에 갇힌 채 체포된 조선족들은 항해 내내 선장과 갑판장의 비인간적인 폭행과 욕설에 시달렸다고 입을 모았다. 이미 그때쯤이면 험한 뱃일을 감당하겠다는 한국인은 적었고 그 빈 곳을 조선족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채우고 있었다. 당시 규정으로는 외국인 선원은 전체의 50%를 초과할 수 없었지만 한국인 선원 월급의 20~30%만 주면 고용할 수 있는 외국인 선원의 수는 그 기준을 우습게 초과했고 페스카마호도 그랬던 것이다.

 

 

사형선고 받은 전재천, 3만명이 탄원서를 내다

 

더욱이 비명에 간 페스카마호의 선장은 선장으로서 처음 항해에 나선 터라 의욕에 차 있었다. 처음 배를 타 멀미나 해대고 일은 서툰 조선족이 답답했을 것이고 그 호령은 부드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족들은 난생처음 당해보는 대접과 욕설에 분노를 키웠고 그 대립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비극은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한국과 조선족 사회 양쪽에 심대한 충격을 던진다.

 

일부 한국인은 조선족이 보여준 잔인함에 치를 떨면서 이들에 대한 편견의 벽을 높였고, 조선족 사회는 한국 사회의 차별이 이 참극을 빚어냈다며 어금니를 물었다. 주범으로서 11명의 생명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전재천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는 고향을 떠나오기 전 인자하기로 이름난 음악 교사였다. 그의 5형제 모두 모범적인 군 생활을 거쳐 중국 정부로부터 ‘광영지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은 가족이었다. 전재천이 페스카마호 선상 생활을 기록한 수기가 중국 내 조선족 언론에 실렸고 이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3만명에 이르는 조선족이 정상참작 해달라는 탄원을 보내기에 이른다. 내용은 대충 이랬을 것이다. “유가족에겐 너무 죄송합니다. 하지만 형님의 범행이 고국 동포들의 차디찬 냉대와 구타를 견디지 못해 일어난 것임을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전재천의 동생 전재수의 탄원 중에서)

 

그들의 범죄 행각은 돌아볼수록 잔인했다. 특히 그 배의 선원도 아니었으며, 병이 나서 조선족들을 하선시키기 위해 사모아항으로 돌아가는 페스카마호에 옮겨 탔을 뿐인 젊은이를 의자에 묶어 바다에 던져버린 대목에서는 욕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그로부터 6년 전만 해도 온 방송사 다큐멘터리가 “순박하고 소탈한 우리 민족의 원형질이 남아 있다”고 감격스레 읊던 조선족의 전형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특수한 존재,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자라난 외국인이면서 동시에 우리 동포였던 조선족의 부침은 매우 짧고도 파괴적이었다. 조선족 사회는 붕괴라는 표현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 격변을 겪었고 우리 사회는 우리 안에 내재된 배타성과 잔인함을 증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카마호 사건은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지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이렇게 두고 보면 “통일은 대박”이라던 대통령의 말씀에 조금은 토를 달고 싶어진다. 90년대 우리 곁에 다가왔던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볼 때 과연 우리에게 통일은 대박일 수 있을까. 통일에 대한 고민과 준비가 미진할 때 갑작스레 통일이 들이닥치고 새롭게 북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대량으로 신속하게 유입된다면 우리는 어제를 거울삼아 그 시절의 아픔과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북한 인구는 2200만명, 조선족의 10배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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