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옌볜' 가리봉동, 고단했던 삶이 머물렀던 자리… 이국적 풍경이 스며들다
"류,류…뤄미엔. 이,이거어(우,우…육탕. 하,하나)."
이태원에 있는 크래프트비어 전문점에 이어 두 번째다. 서울에서 한국어로 음식을 주문했다가 통하지 않아서 당황한 건. 이태원 그 집 점원은 고개를 15도 정도 뒤로 젖힌 뒤 스노비시한 눈매를 내리깔며 "왓(What)?"이라고 했었는데, 여기 국숫집 점원은 고개를 10도쯤 숙인 채 "하,한국어 못해요…"라고 미안한 눈빛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더 미안했다. 아는 중국어 단어를 다 긁어 모아서 겨우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국숫집의 상호는 '동북대골신면(东北大骨抻面)'. 여기는 가리봉동 우마길, 서울 속 옌볜 거리다.
맞다. 그 가리봉동이다. 영화 '박하사탕'(1999)에서 피폐해진 영혼의 김영호(설경구)가 풋풋한 스무 살의 날들을 그리워하며 간절히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노동자의 거리,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1994)에서 다방 레지, 깡패 같은 주변부 인생들이 꾀던 서울의 뒷골목 말이다. 노동, 상경, 가난, 벌집, 연탄가스 같은 단어의 뉘앙스가 여전히 골목과 골목을 에테르처럼 채우고 있는 곳. 황석영이 일당 130원짜리 '시다'로 일했다거나 1980년대 '학출' 공지영이 위장취업 했다가 한 달 만에 정체가 탄로나 쫓겨난 얘기가 설화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 구로공단의 배후지는, 그런데 이제 전과는 다른 사회학의 개념어와 붙어 다닌다. '다문화'가 그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천공륙년도부터 장사했어요. 중국 일꾼들 많을 땐 시장골목이 꽉 찼는데 이젠 영 없어요. 그래도 지방 내려간 단골들이 일요일엔 일부러 찾아오고 그러니까 그만 둘 수 있나….어때요? 먹을 만해요?"
가리봉동 종합시장. 이 동네 사람들이 그냥 '야채시장'으로 부르는 좁다란 시장 골목 안에 중국 식료품점이 네댓 군데 있다. 하얼빈에서 온 신시남(69) 아주머니가 썰어준 옌볜식 순대는 여중생 팔뚝만큼이나 굵었다. 기름기가 낭자한 겉모양과 달리 맛이 의외로 담백했다. 내장과 선지, 부추, 배추, 파, 마늘, 찹쌀 같은 재료는 다 국내산을 쓴단다. 독특한 맛을 내는 향신료 예수우사만 중국에서 들여온 것. 무게로 따지자면 만분의 일도 안 될 그 향이 한국식과 중국식을 갈랐는데, 그 가름은 생각보다 확연해서 나 말고 가게에 들어오는 다른 (국적상) 한국인은 없었다. 옌볜 순대는 식어도 맛있었다.
벌집이니 쪽방촌이니 하는, 단위 면적 당 기숙 인구의 비인간적 밀집도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기실 꿈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몸뚱이 하나 빼곤 어떤 사회경제적 밑천도 없이 도시로 밀려든 젊음에게, 지난 세기 후반 서울에서의 꿈은 그렇게 비좁고 남루하고 층층이 겹쳐져 있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총각들이 고된 몸을 누이던 곳이 여기, 지금의 남부순환로를 사이에 두고 구로공단 맞은편에 있는 가리봉동이다. 1990년대 공단의 생산시설이 뿔뿔이 흩어진 뒤 '서울 드림'을 꿈꾸던 젊은이들도 사라졌다. 대략 그때와 겹쳐서 이 거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조선족, 지금은 중국동포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최저생계비에 최적화한 가리봉동의 주거 환경을 이들은 반겼다. 벌집과 쪽방은 이제 '코리안 드림'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이 됐다.
각설하고, 동네를 한번 걸어보자.
구로디지털단지역부터 시작하자. 가리봉동은 무척 작아졌다. 공단을 포함해서 1, 2, 3동까지 있던 커다란 동네는 현재 절반 이상을 뚝 떼서 금천구에 넘겨줬다. 그쪽은 이제 가산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지붕 낮은 공장이 다닥다닥 모여 있던 자리는 고층 빌딩 숲으로 변했다. 남부순환로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 가산디지털단지(옛 가리봉 2, 3동)와 가리봉동(옛 가리봉 1동)의 상반된 두 모습이 마치 부자가 된 공장주와 가난하게 남은 일꾼의 모습인 듯하다. 멀끔한 신도시의 분위기를 풍기는 가산동에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이 최근 문을 열었다. 옛 쪽방 건물을 보존해 전시와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여공들의 생활상을 비교적 충실히 복원해 뒀다.
횡단보도 건너가면 여즉 가리봉동이다. 공단이 있던 시절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머물던 여인숙, 숫저운 눈빛이 오가던 다방, 잔업을 마치고 나와 허기진 배를 채우던 곱창집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공동화장실과, 구들장을 데우고 나온 연탄재도 여전히 현역이다. 1980년대 서울의 '빈티지'가 대규모로 남아 있는 공간. 딴 데서 돌리고 돌린 다음 늘어진 필름을 걸던 허름한 극장, 구제품을 주로 팔던 백화점도 얼마 전까지 있었단다. 그것들은 사라지고 없는데 이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은 여전히 천일극장이나 파노라마쇼핑센터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는다. 다만 길거리의 간판들이 이젠 한글 대신 중국어 간체자다.
이정표에 '우마길'로 표시된 중국동포거리는 남구로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디지털단지오거리 방향으로 250m 정도 떨어진 시장 삼거리부터 300m 정도다. 중국식 양꼬치집, 분식집, 식료품집, 노래방 등등이 죽 이어져 있다. 대략 한 집 건너 한 집이 중국동포의 가게다. 굳이 가리봉동의 시시콜콜한 얘기엔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여기 오면, 누구나 최소한 입이 즐거워진다. 족히 한국의 두세 배 크기인 만두와 꽈배기와 순대, 그리고 딴 데선 비싼 값 주고 먹어야 하는 정통 중국식 면요리와 양꼬치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널리 쓰인다. 그런데 그게 또 해외여행을 온 듯 유별난 재미를 준다. 요컨대 친절하고 즐겁고 맛있는 거리다.
"일곱 집 중에 이제 나 하나 남았어. 내가 마흔 아홉에 이 집을 인수했는데 그땐 대단했지. 여섯 시 퇴근 종 땡 치면, 공장에서 우르르 몰려나왔으니까. 테이블 14개가 금세 꽉 찼어."
우마길 가운데쯤에서 언덕 쪽으로 꺾어진 길이 야채시장이다. 시장의 끝에 붙은 곱창골목. 골목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젠 '호남곱창' 딱 한 집 남아있다. 올해 일흔 넷인 주인 아주머니는 전남 해남에서 상경하신 분이다. 매주 주말과 공장 기숙생들이 외출을 나오던 수요일, 아주머니는 하루에 곱창을 네 관(약 15㎏)씩 팔았단다. 40년도 더 된 내력의 곱창집은 그러나 찾아간 날이 토요일 해거름임에도 썰렁했다. 이날 매출은 총 6만원. 가리봉시장의 장사가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은 공단이 이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그게 중국동포들이 몰려든 시기와 맞물렸다. 시장 안에서 여전히 서로 섞이지 못하는 공기들의 버성김이 느껴졌다. 오래된 채소가게 주인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저런 음식도 먹는다지만 우린 통 입에 안 맞아서…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10년 넘게 이웃으로 살지만 여태 한번도 서로 가게 가서 뭘 산 적이 없어."
시장 골목을 벗어나 50세대가 한 집에 사는 경이적인 주거밀집도를 보여주는 다가구주택 '50가구집'과 벌집촌의 좁은 미로들, 책꽂이를 아무리 뒤져도 2001년 6월 21일 발행된 허영만의 <타짜: 제3부 '원아이드잭'>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인 만화방 등등을 구경하다가 앞머리에 쓴 국숫집에 갔다. 실수했다. "뿌요 샹차이(고수는 빼 주세요)"라는 말을 빼 먹었다. 그런데 반나절 옌볜의 분위기에 젖어 있어서였는지, 그 향도 심히 거북하지가 않았다. 주문을 받은 뒤 반죽해 뽑은 납작한 수타면에 쇠고기 절편을 올리고, 정통 중국식 고추기름을 푼 우육탕 값이 4,000원이다. 오랜 만에 먹는 대륙의 진하고 깊은 맛. 중국어로 '맛있다'를 몰라 이렇게 말했다. "딩하오!". 스포츠머리의 동포 청년이 수줍게 웃었다.
[여행수첩]
●남구로역 5번 출구에서 나오면 구로공단 벌집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리다. 공영주택 단지와 영화 '장미빛인생' '초록물고기' '황해' 등의 촬영 현장이다. 중국동포거리는 물가가 싼 편이다. 큰 호떡 2개에 1,500원 선. 옌볜식 순대는 한국 순대에 비해 값이 2배 정도 한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은 가산디지털단지역 2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있다. 화~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쪽방 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다. 해설사가 있다. 무료. (02)830-8426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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