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저게 뭐지?”
서울 종암경찰서 석관파출소 신종환 경위가 야간 순찰을 돌다 석관동 치안센터 앞에 멈춰선 것은 지난달 22일 오전 1시. 주간 근무시간이 끝나 굳게 닫힌 치안센터 문틈에 ‘흰 봉투’가 꽂혀 있었다. 은행 이름이 적힌 봉투에는 10만원권 수표 5장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메모도, 소유자를 유추할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신 경위는 이 ‘수상한’ 봉투를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석관파출소는 이를 청문감사관실에 신고했다. 수사 청탁용 뇌물일 수 있어서다.
종암경찰서 지능팀은 돈 봉투의 출처를 가려내기 위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치안센터 인근 CCTV를 분석해 전날 오후 8시쯤 봉투를 문 틈새로 밀어 넣는 한 중년 남성(사진)을 발견했다. 깡마른 체구의 남성은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이 돈 봉투를 남긴 채 3초 만에 유유히 사라졌다.
경찰은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수표 추적에 나섰다. 일련번호가 연달아 있던 다섯 장의 수표 출처는 의외였다. 한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 급여를 관리하는 직원 계좌에서 발급됐다. 경찰은 탐문 수사 끝에 봉투의 주인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중국동포 최모(54)씨였음을 밝혀냈다. ‘청탁’을 의심하던 경찰은 관내 사건기록을 전부 뒤졌지만 최씨가 연루된 사건을 찾을 수 없었다.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직접 최씨를 찾아간 경찰은 사연을 듣고 숙연해졌다. 그 돈은 최씨가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고 자식 둔 부모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희생자 가족을 돕고 싶어 냈던 ‘기부금’이었다.
월수입이 150여만원에 불과한 최씨는 성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장 반장에게 “돈 쓸 곳이 있다”며 열흘 치 급여 60여만원을 미리 받았다. 최씨는 그 돈에서 최소한의 생활비 10만원만 제하고 50만원을 고스란히 봉투에 넣었다.
13년 전 한국에 들어온 그는 충남 천안에서 일하는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며 원룸에 혼자 산다. 20대 후반 아들은 결혼해 경기도 안산에 산다고 했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월급의 3분의 1이나 되는 돈을 내놓으면서도 최씨는 망설이지 않았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돈을 전달하고 싶었던 최씨는 집에서 가까운 치안센터에 두고 가면 성금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전해지리라 여겼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이 자신을 찾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는 얘기를 전하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경찰은 최씨에게 돈을 돌려주며 공식 등록된 세월호 모금단체에 기부하도록 안내했다. CCTV 분석부터 수표 추적, 사건기록 검토까지 우여곡절 끝에 발생 2주가 지나서야 치안센터 돈 봉투 사건은 ‘내사 종결’됐다. 경찰 관계자는 “생활이 어려운 중국동포까지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도우려 월급을 쪼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며 “최씨는 이런 선행이 알려지기를 극구 꺼렸다”고 전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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