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4시부터 삼삼오오 모여…공사장으로 청소 인부로…
일 못잡으면 막걸리로 목축이고…무료밥차에서 끼니 해결
추워지면 일자리 3분의 1로 뚝…“봄까지 어찌 견디나” 한숨만
“부지런하고 건강한 사람은 한 달에 37일까지 일해요. 난 뭐하는지 모르겠어.”
지난달 28일 아침 5시. 서울 지하철 남구로역 5번 출구 앞 화단에 쭈그려 앉은 전모(54) 씨는 몸 건강한 게 가장 부럽다고 했다. 그는 경련이 일어나는 오른쪽 눈을 깜빡이며 20m가량 떨어진, 수십 명의 웅성대는 무리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는 11월 중 단 하루도 일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여름에 한달 꼬박 일하고 7일 야간(근무)까지 해서 37일 일하는 사람도 봤어요. 나도 몸만 성하면 그렇게 근면할 수 있는데….”
|
26일 새벽 구로 인력시장에서 구직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
전 씨는 한때 국내 굴지의 의류업체에서 섬유 관련 엔지니어로 근무한 고급 인력이었다. 세계기능올림픽에서 참가해 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경쟁 업체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잇따라 받았을때가 인생의 전성기였다.
그는 퇴사 후 멕시코 등 남미에서 의류사업을 크게 벌였지만 부도를 맞게 됐다. 수천명 직원을 고용하던 사장님이 새벽 인력시장으로 내몰린 것은 한 순간이었다. 전 씨는 “눈도 안 보이고, 당뇨병도 앓고 있어서 힘든 일을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사거리는 빠듯하게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만 하는 이같은 갖가지 사연이 뒤엉킨, 전국 최대 규모의 새벽 인력시장이다.
남구로역을 찾는 노동자들은 매일 새벽 4시부터 모인다. 절정인 5시30분 돗떼기시장을 이뤘다가 해가 뜨기 전 승합차에 타 삼삼오오 수도권 구석구석으로 실려간다. 검은색 모자에 점퍼, 밑창이 두꺼운 운동화 차림의 50∼60대 중년들이 이곳의 주요 구성원이다.
이날 새벽 5시30분께 2번 출구 쪽 왕복 2차선 도로 양쪽에는 어김없이 신형ㆍ구형 스타렉스 10여대가 도로변에 늘어서 있었다. 두껍게 옷을 입은 중년들은 햇볕도 없는 새벽의 검은 공기와 공회전하는 승합차의 하얀 입김을 번갈아 들이쉬며 조용히 탑승을 기다렸다.
이곳 인력과 공사장을 연결하는 A 씨가 꼬깃한 메모지를 보면서 “양섭이 형! 김중희 씨! 최상철 씨!”하고 낯설거나 친한 이름을 외쳤다. 이들은 한 조가 되어 승합차의 빈 자리를 채워나갔다. 남구로역을 찾아 그날 일자리를 얻는 사람은 10명 중 7∼8명 정도다.
문제는 12월부터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는 12월 초ㆍ중순쯤부터 공사장 일자리는 급감하기 시작한다. ‘일자리 보릿고개’로 접어드는 것이다.
박모(55) 씨는 “12월 초쯤만 돼도 이곳 인력시장은 거의 전멸이라고 보면 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비수기를 코앞에 둔 요즘이 막바지로 일감을 많이 챙겨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 60대 정모 씨는 “근면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겨울에 좀 덜 추운 경상도나 제주도로 내려가 일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일을 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공사장 찾아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이날도 남구로역 인근 2평 남짓한 구멍가게 삼성식품에선 일감을 받는 데 실패한 2∼3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김 가야 오늘은 일 잡았냐. 막걸리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이 구멍가게 안에서 튀어나왔다.
이곳 인력은 6대4 정도로 중국동포가 내국인보다 많다. 일감 한파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만 중국동포의 겨울은 더 매섭다.
중국동포 서모 씨는 “이곳 10명 중 4명은 알음알음 인맥으로 일자리를 미리 잡고서 차만 기다리려고 오는 사람들”이라며 “그런 점에서 보면 아무래도 중국동포들이 일자리 잡는 데 좀 불리하긴 하다”고 했다.
이곳으로 5년 넘게 출근(?)한다는 중국동포 최모(52) 씨는 “12월부터는 여름에 비해 일감이 거의 반토막 이상 나기 때문에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짜야 한다”며 “아예 쉬는 사람도 있고 겨울 동안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같은 일자리 보릿고개는 날이 풀리는 3월까지나 계속된다고 했다.
일자리 불안감이 남구로역 인력시장을 엄습하고 있지만, 매일 이곳에서 똑같은 온기를 피워올리며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리봉동에 사는 신영일(57) 씨는 승합차가 늘어서서 좁아진 2번 출구 부분의 2차선 도로를 매일 아침 2시간씩 선다. 교통정리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다. 신 씨는 20년간 이곳 사람들과 똑같이 공사장에서 일했다. 15년 전부터 당뇨 합병증으로 오른쪽 발가락을 자르는 등 몸이 불편해져 더이상 거친 일을 못하게 됐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는데 나라에서 날로 돈 받아먹는 게 미안해서 매일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구로역 5번 출구 앞에는 월∼금요일 새벽 4시부터 ‘희망식당 빨간밥차’가 김을 피우며 서 있다. 밥차는 2009년부터 인력시장 노동자에게 무료로 밥을 줬다. 현재는 서울시와 구로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운영 중이다.
망우리에 사는 김형주(66) 실장은 10년째 매일 새벽 2시30분에 일어난다. 그리고 대림동 가로공원에 세워둔 밥차를 끌고 이곳으로 밥을 푸러 온다. 이사운수라는 마을버스 회사의 경영자이기도 한 그는 “아침 6시쯤 밥차 배식을 끝내고 회사로 출근하면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게 된다”고 했다.
김 씨는 “봉사받는 분들이 안좋게 행동할 때도 있지만 힘들게 사는 분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나쁘게 생각하면 안된다”며 “‘봉사는 심봉사’라는 말처럼 그냥 눈 감고 봉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밥차의 이날 메뉴는 북어국이었다. 북어국은 갈색 플라스틱 뚝배기에 담겼다. 이날 200그릇의 북어국에 200개의 밥덩이가 말아졌다. 나중에는 밥이 동났고, 라면 15개가 부랴부랴 솥에 삶아졌다.
이 시각까지 공사장으로 출근하지 못한 경모(58) 씨는 “우리는 매일 채용됐다가 매일 해고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지하철역 안으로 사라졌다.
서울시의 ‘새벽 인력시장 운영 현황’에 따르면 남구로역 새벽 인력시장을 찾는 노동자는 하루 평균 1000명. 일감이 줄어드는 겨울에도 하루 평균 600명이 이곳을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헤럴드경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