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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5시부터 한시간 가장 큰 인력시장 열려
8년전부터 봉사하는 박씨.. 차 한잔, 격려 한마디 건네
경찰·환경미화원·상인도 노동자들 위해 분주히 활동
지난 5일 서울 도림로 남구로역 오거리 인력시장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나온 일용직 근로자들이 모여 있다. 인력시장은 매일 새벽 5시부터 몰려드는 구직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사진=김진호 수습기자
해도 안 뜬 시각, 서울 도림로 남구로역 오거리에 드문드문 난로를 놓아두는 사람이 있다. 덜컹거리는 수레에 난로를 가득 싣고 나타난 박귀만씨(62)다. 지난 5일 새벽 3시, 남구로역 인력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박씨가 놓은 난로는 금세 빨갛게 달아올라 인적없는 거리의 찬 기운을 데웠다.
난로를 빙 둘러싸고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력시장이 오전 5시부터 6시까지 한 시간 동안, 서울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부근에서 열린다. 박씨는 40년을 이곳에서 살며 자율방범대, 밥차 등 봉사활동을 했다. 매일 600여명이 몰리는 노동자들의 뒤에는 그처럼 이 거리를 묵묵히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 자원봉사자 외에도 트럭노점상, 경찰과 환경미화원이 매일 새벽 인력시장을 돌본다. 이들은 새해에도 어김없이 노동자들의 얼어붙은 새벽을 녹이고 있었다.
■마음의 부자로 살기
박씨는 "봉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거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며 "마음의 부자로 사는 것이 좋다"고 운을 뗐다.
그는 매일 새벽 노동자들을 위해 따뜻한 둥굴레차를 준비한다. 20일 전까지만 해도 밥차를 운영했지만, 재정 문제로 그만 뒀다고 했다. 인력시장에서 볼 수 있는 무료 먹거리라곤 이제 한 종교단체에서 나눠주는 떡과 박씨의 둥굴레차뿐이다.
박씨와 봉사를 함께하는 이는 모두 여섯명. 8년 전부터 인력시장에 나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5년 전부터는 커피를 둥굴레차로 바꿔서 나눠주고 있다. 커피보다 인기가 좋았다.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은 사무실로 사용하는 작은 창고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봉사 준비를 한다. 새벽 일찍 나오느라 피곤할 텐데도 표정만큼은 밝았다.
매일 아침을 함께 시작하다보니 서로의 집 반찬이 무엇인지도 아는 사이가 됐다. 특히나 요즘처럼 날씨가 추울 때 이들은 남구로 인력시장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박씨는 이곳의 질서반장 역할도 도맡는다. 그는 "내 입장에선 수백 대 일이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은 나를 일대일로 만난다"며 "모두가 나를 알지. 내 말은 다 통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가끔 술에 취해 행패부리는 사람도 박씨의 한마디면 금방 꼬리를 내린다고 했다. 해가 뜬 뒤 박씨와 마주치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늘었다.
추운 겨울 나눠주는 차 한 잔과 따뜻한 격려 한마디는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박씨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며 "공짜를 바라지 않고 이곳에서 제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부자"라고 말했다.
남구로인력시장 자원봉사자인 박귀만씨(오른쪽 두번째)는 서울 도림로 남구로역 한쪽에 마련된 작은 창고에서 한파를 뚫고 일자리를 찾으러 나온 일용직 근로자들에게 따뜻한 차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박씨와 동료들이 새벽 3시부터 물을 끓이고 자리를 펴면서 봉사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김진호 수습기자
■"우리도 있습니다"
새벽 4시 50분. 인력시장에서 옷 가게로 통하는 노점 트럭이 길가에 멈췄다. 한 시간 장사를 위해 움직이는 이주현씨(75·가명)의 몸놀림이 분주하다. 이씨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인터뷰를) 하세요"라며 연신 자신을 낮췄다.
그가 자리를 열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사가는 품목은 장갑이다. 두꺼운 것은 4500원, 얇은 것은 4000원이다. 장갑 하나 팔면 500원이 남는다.
이씨는 "여기 전부 힘들게 사는 사람들인데 싸게 팔아야죠"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가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40년째다. 지금은 몸이 불편해 남구로 인력시장에서만 일을 하고 집에서 쉰다. 이씨는 "정이 들었는지 여기는 계속 오게 된다"고 말했다.
남구로역에는 질서를 잡기 위해 경찰차가 2대나 와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경찰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아무리 좁은 건널목이라도 무단횡단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격하게 단속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날도 횡단보도 앞에 경찰이 지키고 서서 철저히 신호를 통제했다. 경찰들은 찬바람 속에서 형광봉을 깜박이며 질서를 잡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승강이가 있을 법도 한데 경찰이 함께 있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차분했다.
새벽 6시.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길 위에 쓰레기와 담배꽁초만 남았을 때, 환경미화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형광색 복장을 입은 미화원 셋이 각각 구역을 나눠 청소를 시작했다. 도림로 담당 환경미화원 박형진씨(45·가명)는 "솔직히 이 구역이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익숙하다는 듯 쓰레기를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그는 "아침 출근길 주민들 불만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기 속 피어나는 희망
이른 시간부터 나와 일자리를 찾던 장인철씨(46·가명)는 오늘도 허탕을 쳤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일을 나갈 수 있으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장씨는 "바라는 것 따로 없다. 애들 잘 크고 매일 일만 있으면 좋겠다"면서 "사람은 일해야 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록 일감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장씨의 표정은 밝았다. 남구로역을 지키는 많은 사람들의 격려 덕분이었다.
장씨는 봉사자들이 쳐놓은 천막에서 둥굴레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는 이내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족 노동자들 사이로 청바지에 두툼한 외투를 걸친 젊은 청년이 눈에 띄었다. 일한 지 1년이 막 지났다는 김경호씨(24·가명)다. 친화력이 좋은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원래 일행이 있는데 오늘은 혼자 일을 구하고 있다"며 "하루라도 쉴 수 없다. 돈 벌려고 왔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매일 새벽 길거리에 나와 일거리를 찾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그 어려움이 배가 된다.
뜨끈한 차 한 잔과 두툼한 장갑 한 켤레, 노동자들을 위해 움직이는 남구로 지킴이들. 이들이 함께 있는 한 인력시장에 나온 노동자들의 한숨도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활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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