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피해자 될 수 있어" 불안
술마신 상태서 저지른 경우 52%… 현실불만이 범죄로 이어지기도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방문 상담
20대 여성 직장인 이가람(가명)씨는 요즘 밤낮 관계없이 거리를 걷다가 멈춰 주위를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최근 홍대 앞 번화가를 걷는데 모르는 남성이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와 심한 욕설을 하고 금방이라도 때릴 듯 이씨를 뒤쫓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집까지 전력을 다해 뛰어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 남성을 잡지 못했다. 그는 "최근 내 또래 여성들이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사람에게 범죄를 당하는 뉴스들을 보다 보니 낯선 사람이 말만 걸어도 가슴이 뛰고 불안하다"고 했다.
지난 1일 새벽엔 한 20대 남성이 서울 성동구 길가에서 한 20대 여성을 뒤쫓아가 둔기로 내리치고 달아난 뒤 아파트에서 투신한 일이 있었다. 경찰은 아직 이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결론짓지 않았다. 범인이 죽어 정확한 범행 동기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피해 여성(25)이 경찰 조사에서 "이씨와는 전혀 안면이 없다"고 진술한 것이 알려지면서 '묻지마 범죄'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앞서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 화장실과 수락산 등산로에서 흉기에 찔려 사망한 여성들도 범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묻지마 범죄는 범인이 주로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대검찰청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묻지마 범죄 163건을 분석했더니, 범행 전 음주 비율이 84건(52%)으로 절반을 넘었다.
지난 31일 오전 1시쯤 광주광역시 한 영화관 앞에선 휴가를 나온 해병대 병장 최모(21)씨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 승용차와 택시를 세운 뒤 운전자와 승객 3명을 차례로 때렸다. 인도(人道)로 돌아온 그는 40대 여성 등 행인 3명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정신질환(36%)이나 현실에 대한 불만(24%)이 묻지마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다. 강남역 근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을 살해한 김모(34)씨는 심한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았던 환자였다. 수락산에서 6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피의자 김모(61)씨 역시 지난달 조현병 약을 처방받았다. 강도살인 전과가 있는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돈이 없어 며칠을 물만 먹고 지냈다"고 진술했다.
길거리나 공공 장소에서 범행이 자주 이루어지고, 피해자 사망이 잦다는 것도 묻지마 범죄의 특징이다. 지난해 1월 경기 부천에 사는 라모(33)씨는 처음 보는 50대 여성을 길거리에서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대검 분석 결과, 묻지마 범죄 4건당 1건이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길거리·공공장소의 범행은 110건(67%)이나 됐다. 대검 관계자는 "묻지마 범죄 상당수가 살해로 이어지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장소에서 일어난다"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사실상 예방법이 없어 시민들의 불안감도 더 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범죄 고위험군'에 대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윤정숙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신질환자는 일반인보다 범죄율이 낮지만, 전과가 있거나 약물을 남용한 적이 있으면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며 "전과자 중 정신 병력이 있는 사람을 파악해 출소 후 지속적인 관리·치료만 해도 상당한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묻지마 범죄를 일으킨다는 의견도 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장은 "공동체와 유대 관계가 끊어지면 사회가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분노가 쌓이며 범죄를 정당화한다"며 "이럴 때는 생계 지원과 함께 심리 치료도 동시에 해야 한다"고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규범 안에 머물도록 사회 연결망을 유지해줘야 한다"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를 정기적으로 방문 상담하는 일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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