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이야기]
선이는 밀항선 밑창에서 피오줌을 누고 물벼락을 뒤집어 쓰면서 일주일이나 견뎠다. 밀항선에서 내려보니 관광지인 자그마한 섬 백령도였다. 인민페 6만원이나 주고 왔기에 급히 돈을 벌어야 했다.
처음으로 찾은 일이 모텔일이다. 백령도는 유동인구가 많아 모텔일이 더 쉽지 않았다.
한 일년가량 하루도 쉬지 않고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한달에 한화 80만원을 받았다. 어느날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 달아나 맨발 바람으로 달리고 달려서 일산까지 다달았다.
거기서 찾은 일자리가 카렌다회사(달력만드는 회사)였다. 일은 별로 힘들지 않았으나 월급이 70만원밖에 안되였다.
그래서 120만원 주겠다는 한바식당으로 들어갔다. 공지일군들을 밥해주는 식당이다.
밥을 큰 가마로 몇가마씩 해야 했고 반찬도 큰 그릇으로 몇개씩이나 해야 한다.야참까지 하루에 다섯끼를 공급해야 한다.
설겆이까지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바로 꿈나라에 들어선다. 힘들고 지치지만 등어리가 소금이(땀이 해볕에 말라 굳어진 상태) 된 일군들을 보며 스스로 위안을 갖고 버티였다.
이렇게 버틴 시간이 옹근 7년이였다. 그 사이 번 돈으로 빚을 다 갚았고 자식들(아들 하나 딸 하나) 뒤바라지를 했다.
경찰만 보면 잡힐가봐 가슴을 꽁꽁 조이면서도 돈 벌 욕심은 점점 커가기만 했다.
140만원 준다는 추어탕집으로 들어갔다.
추어탕집은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그래서 야간 순대집에 또 다녔다. 4박5일을 하고나니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쓰러져버렸다.
옹근 이틀을 자고 깨여나니 친구가 《무슨 일을 죽을라고 하나? 살라고 하나?》한다. 그래서 추어탕집에만 다니면서 열심히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던중 어느 날 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치장암말기》라 한다.
남편 혼자 농사일하면서 병을 키웠다. 한달음에 달려갈수 없는 선이는 기가 막히고 억이 막혔다.
남편은 선이가 한국 나온지 9년만에 홀로 눈을 감았다.
2004년도부터 외국인등록증사용이 실시되면서 불법인들의 취업은 더욱 힘들어졌다.
남편을 잃은데다가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고 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2006년 말에 한국정책의 혜택을 받아 합법으로 된 선이는 두 어깨를 쭉 펴고 서울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도시맛이 물씬 풍기는 신촌동이였다. 번화한 지하철 3번입구쪽으로 있는 순대국집에서 일하다가 돼지갈비집으로 옮겼다.
주방장으로 있으면서 갈비 재우는 일과 갈비탕 만드는 일을 도맡아하였다.
한화 170만원 받았다. 아들딸은 모두 본과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서 회사직원으로 있다.
이제는 돈이 그립지 않다. 하지만 선이는 밥맛이 없어지면서 여위여 간다.
검사해보니 B형간염이라 한다. 행복을 누리고싶었다. 아들집으로 돌아온 선이는 자가용차를 몰고 출근하는 아들내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행복에 물젖어 있었다.
가시덤불로 얽힌 고달픈 길을 열심히 걸어 행복의 종점에 도착했다고 생각되니 어쩐지 서글퍼났다.
길림신문 황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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