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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선]나의 아버지는 거룩한 산이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3월13일 10시08분    조회: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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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군정대학 60주년 합영. (세번째줄 좌로부터 일곱번째가 아버지 신청송임)

사람들은 흔히 자식들을 따스한 품에 안아주시고 살뜰히 쓰다듬어주시는 어머니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자식들을 지켜주고 이끌어주는 아버지를 우뚝 솟은 높은 산에 비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를 낳아주고 생명의 젖줄기로 키워주신 어머님의 그 은혜도 백골난망이지만 우리 일곱자식을 먹여살리고 남보다 더 잘 키우기 위하여 모든 정력과 지혜를 몰부어 로심초사하신 아버지,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로간부이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애롭고 훌륭한 아버지를 한껏 자랑하고싶다.

나의 아버지-신청송은 조선반도가 일제의 철발굽에 유린당하던 1926년 11월 20일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신씨가문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여났지만 공부를 하여 큰 뜻을 이루어보겠다는 포부를 품고 9살 나던 해부터 배로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광개구 선구소학교와 후동소학교, 백룡평소학교를 다녔다. 그사이 돈이 없어서 우차몰이를 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라진에 가서 일년간 일했지만 공부할 결심만은 변치 않았다.

16세 나던 해인 1941년부터 2년간 아버지는 연길 왕도서원에서 중학교공부를 했는데 그 이듬해에 부모들의 주선으로 당시 18세나는 어머니 김금녀와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결혼식을 마치고 4일만에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계속할 정도로 공부에만 집념하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4년 3월, 할아버지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뜨자 가정의 중임을 한몸에 떠멘 아버지는 험난했던 세월에 힘겨운 세상살이를 해야 했다. 다행히 중학교공부를 했던 탓에 그 이듬해부터는 후동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고 광복을 맞자 글을 더 배우고싶은 욕심으로 연길에 달려가 광성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가정형편때문에 그 공부도 얼마 못하고 또다시 힘든 농사일을 하여야 했다.

그 시기 동북민주련군이 연변을 근거지로 국민당과 싸웠는데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북받치는 혁명열정으로 너도나도 전선에 달려나가 싸울것을 청원했다. 21살 한창 나이였던 아버지께서는 홀로난 어머니한테 년로하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처자와 동생 셋을 떠맡기고 혁명의 용광로인 동북군정대학길림분교를 찾아갔다.

당시 군정대학에 모여온 학원생은 200여명이였는데 대학이라야 헐망한 교실과 숙사가 전부였고 자기가 가져온 이불에 홑옷과 할아버지가 삼아준 초신으로 추운 겨울을 나야 했는데 두달이 지나니 고생을 이겨내지 못한 학원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100여명만 남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군정대학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렬악한 환경에서 굳은 의지를 키웠고 간고분투, 자력갱생정신과 단결, 긴장, 엄숙, 활발의 작풍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군정대학을 졸업하고 대부분 학원들은 군관이 되여 전선으로 달려나갔고 일부분 학원들은 후방사업의 수요로 지방에 남게 되였는데 아버지는 개산툰소학교에 배치되였다.

1948년 덕신소학교교원 일동.(두번째줄 좌로 두번째가 아버지 신청송임)

평생 정직하고 총명한 재질을 소유자인 아버지는 교육사업에 혼신을 다했는데 사업의 수요로 연길현, 안도현 등 여러 학교들을 전전하면서 만은 곤난과 애로들을 용케 이겨내고 출중하게 당과 정부에서 맡겨준 임무를 완수하였다. 아버지는 24살 젊은 나이에 안도현량병중심소학교 교무주임사업을 맡았고 25살 나던 해에는 안도현송강중심소학교에 전근되여 교장직을 맡았다. 그로부터 수십년간 여러 학교들을 오가면서 교장직을 맡아하였는데 교직원들과 학생들을 이끌고 학교를 잘 꾸려 훌륭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1958년도에는 안도현의 교직원대표로 뽑혀 연변주에서 조직한 북경참관단 일원으로 수도 북경을 참관하는 영예도 지녔다. 이 시기 아버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기회가 여러번 생겼지만 해방전 우차를 몰아 아들을 공부시킨 할아버지의 성분이 부농으로 획분되는 바람에 끝내 입당하지 못하였다.

1951년 안도현제6구 제2완전소학교 졸업사진.(두번째줄 오른쪽 다섯번째가 신청송임)

1961년 10월부터 1972년 3월까지 아버지는 중한 간염으로 출근하지 못하고 투병생활을 하여야 하였는데 아버지는 완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병마와 싸워 끝내 이겨냈다. 1972년부터 아버지는 만보공사금화대대소학교, 안도현건설국도시농촌계획국판공실, 안도현우도공사 등 사업단위에서 사업하다가 1979년 5월 10일에 허약한 신체조건때문에 일찍 리직하였다.

리직후 아버지는 사업때문에 피로해진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로운 만년을 보내야 했건만 아버지는 편히 쉬지 못하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장기환자로 병치료를 해야 했고 집의 막내인 녀동생이 자비로 대학을 다니다보니 엄청난 학비가 들어야 했다. 우리 자식들이 여럿이라고는 하지만 저마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하다보니 아버지의 퇴직금을 가지고는 생활비가 판부족이였다. 아버지는 또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우량한 전통을 발휘하였다. 리직간부이고 로교장의 신분도 체면도 버리고 삼륜차를 몰고 네거리에 나선것이다. 아버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도문에 가서 남들이 좋다는 인력삼륜차를 찾아 치수를 재여보고 돌아와 자체로 설계도를 그리고 자기의 손으로 직접 삼륜차를 만들어 몰고 다니며 3년동안이나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자체로 설계제조한 삼륜차로 가정의 중임을 떠멘 69세의 아버지

이시기 아버지는 매일 가계부를 적었었다. 《1992년 7월 수입 41.00원, 두번째달 수입 88.00원, 세번째달 수입 127.00원, 네번째달 수입 180.00원...1993년 6월 수입 289.00원...》 지금도 아버지가 적은 가계부를 꺼내볼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나 고난의 세월속에서 마음과 뼈를 굳혀오면서 언제나 정직하고 남을 돕는것을 락으로 삼아온 아버지는 삼륜차를 몰면서도 현로간부국 로인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글도 쓰고 악기도 다루는 등 락관적인 생활을 하였다. 아버지는 서예, 장기, 바둑, 악기, 가요창작, 고기잡이 등 모든것에 흥취가 있었고 손에 잡으면 놓을줄 몰랐고 남들보다 더 잘했다. 1996년 여름에는 강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기 위하여 헤염칠줄도 모르는 년로한 몸으로 강물에 뛰여들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적도 있다. 당시 그 사적은 《연변일보》와 연변인민방송 등을 매체를 통해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안도현에서는 전현 간부대회를 열고 아버지의 영웅사적을 선전하고 아버지를 따라배울것을 호소하였다.

아버지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1962년에 삼촌인 신일송을 따라 조선 신의주에 간 큰딸 증복(1943년 9월 22일생)이는 1966년에 소식이 끊긴후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늘 근심하고있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큰언니가 그때 대학시험에서 의학원에 입합되였지만 가정형편때문에 보내지 못한게 내내 한으로 남았다는것이다. 후날 조선에서 김일성주석이 언니의 이름을 신행복이라고 고쳐주었고 신의주방직공장에서 큰 간부로 되였다는 소식도 풍문으로 얻어들었으나 아직까지 확인할 길이 없다. 큰언니나 삼촌의 말만 나오면 아버지는 한숨만 풀풀 내쉰다.

남들처럼 도박이나 술에 물젖지 않고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오신 아버지, 젊어서부터 그 어떤 곤난에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꿋꿋이 살아오신 아버지, 동북군정대학에서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을 터득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아버지는 2011년에는 86세의 고령임에도 젊은이들처럼 컴퓨터에 도전, 현재는 사이버세상을 자유롭게 누비는 끌끌한 할아버지로, 연변장백산로인아빠트 도서관 관장으로 만년을 보내고있다.

항렬로는 넷째, 딸로는 둘째인 나는 자식들을 출세시키고 인젠 60이 되였지만 지금도 아버지앞에 서면 늘 자신이 왜소해지고 또 자기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버지를 도와주지 못한 지난날이 떠오르면서 늘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89세의 고령에도 하냥 씩씩하고 즐겁게 만년을 즐기는 훌륭한 아버지를 늘 볼수 있다는게 딸로서는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글/사진제공 신미선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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