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9월의 하늘에 띄워보내는 메시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9월15일 07시48분    조회:264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975년에 남긴 공사문예공연 기념사진. 중간줄 오른쪽 두번째 양봉송선생님, 뒤줄 오른쪽 첫번째 필자 유춘란.

 

지난 4월말 잠간 시간을 내여 소학교시절의 은사 양봉송선생님을 찾아뵈였다.

문을 떼고 선생님댁에 들어서니 첫눈에 안겨오는것이란 박스채로 쌓여있는 원고지와 서재벽을 메우고있는 책들이였다. 그속에는 선생님께서 퇴임하신후에 집필하신 《회룡봉촌사》와 훈춘시제5중학교 학생작품집 《자리정돈》도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있는 둥근 밥상에도 원고지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펼쳐놓은 원고지우에 마개를 열어놓은 필이 누워있는걸로 보아 금방까지도 책집필에 물두하고 계신듯했다 《선생님 아직도 글을 쓰십니까?》 하고 묻는 나를 바라보시며 선생님은 말없이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띄우셨다.

40년 동안 색바래지 않고 이 장애인 제자에게 한결같이 보내주는 따뜻한 미소이다.

원고지를 들고 첫페지를 펼쳐보니《훈춘조선족사화》라는 글발이 안겨와서 내 가슴은 뭉클해났다. 선생님은 고향 《회룡봉촌사》집필에 이어 또 훈춘의 조선족력사를 집필하시는구나. 이런 글을 쓰자면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뒤적여야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실들을 확인해야 하는지 책을 써보지 못한 나로서도 그 어려움이 대충 짐작이 가는데 선생님은 또 그 힘든 길을 선택하셨구나!

나는 다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1메터 70을 넘기는 훤칠한 키의 선생님은 지금 너무 말랐고 허리까지 약간 휘우둠해진듯싶어서 좀 안스러워보였다.

《선생님 건강은 어떠세요? 선생님도 이젠 70이신데…》

《몇해전에 중풍을 맞은 후유중으로 한쪽다리가 좀 불편하오 그래서 지금 아침마다 꾸준히 등산하고있소.》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 한쪽다리를 살짝 절고계셨다.

《장애인인 나를 너무 이뻐하시니까 선생님도 함께 장애가 되셨네.》

《그런가?》

우리 두 사제간은 마주보며 웃었다

이렇게 허물없는 사제간의 정은 어느덧 40년을 이어왔다.

1974년 선생님께서 우리 학급 담임을 맡으셨을 때 나는 소학교 4학년이였다. 교단에 오르시던 첫날 장애인인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에는 여느 선생님들에게서 흔히 느껴오던 동정의 눈빛이 아닌 믿음과 긍정이 담겨있어 마음은 몹시도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감로수가 되여 주눅이 들었던 내 마음의 구김살은 펴지고 나는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선생님한테서 지식외의 많은것들을 배울수가 있었다. 개구리 울던 여름밤 다른 애들을 따라다니며 뛰놀수 없어 홀로 골목길에서 놀고있는 내가 눈에 띄면 그저 지나치지 않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얘기들을 해주시던 선생님이였다.

한번은 독서를 많이 하라고 일깨워주는 선생님앞에서 읽을 책이 없다고 툴툴거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선뜻이 호주머니를 털어 3원 70전을 선대해서 《홍소병》잡지와 《연변문예》잡지를 주문해주셨다. 그때 민영교원으로 계시던 양선생님께서는 정부로부터 한달에 신문잡지값 5원을 지급받았고 월급은 년말에 대대에서 공수로 계산해준다고 했다. 온 가정의 한달 현금수입 5원에서 나를 위해 3원 70전을 지출하신 선생님, 아들 셋을 키우는 한 가정의 호주로서 어쩌면 그렇게 할수가 있었을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동이다. 그후 선생님께서는 학급학생들에게 집에 있는 도서들을 학급에 헌납할것을 제의하고 학급에 작은 도서상자를 마련해놓았다

그 도서상자안에 꽂혀있던 보풀이 인 책들은 고갈된 내 마음에 독서의 향기를 채워주었다. 지금도 내 눈앞에 그때 그 책이름들이 또렷이 안겨온다

《동곽선생의 이야기》, 《소리나는 화살》,《서유기》, 《뢰봉이야기》, 《무명천의 격전》, 《서사의 아들딸》,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선생님의 그런 헌신과 노력으로 나는 학교시절에 글쓰기와 독서에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되였고 글쓰기의 첫발자국인 일기쓰기도 꾸준히 견지할수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를 한편한편 봐주시고 좋은 일기를 골라서 학급학생들앞에서 읽어주면서 참 잘 썼다고 칭찬해주실 때, 내가 쓴 글이 자기 학생들을 초과했다며 초중반 선생님들이 자기 학급 학생들에게 읽어줄 때 나는 항상 어깨가 으쓱해지군 하였다. 그 순간에만은 그야말로 내가 장애인이 아닌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의 눈길을 한몸에 받아안은 공주님이였다. 아, 얼마나 신나는 일이였던가!

또 내게 아주 큰 자부심을 안겨준 일이 있었는데 내가 쓴 《일요일 지원로동》이란 동시에 선생님께서 친히 곡을 붙여주셔서 회룡봉학교문예선전대의 녀성중창으로 훈춘현 중소학생문예경연에서 상까지 받은것이였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입버릇처럼 내게 말씀하셨다 《장애인인 너에게 적합한 직업은 아마 작가일것 같다. 아무쪼록 열심히 글을 써서 글쓰기수준을 제고하는것이 최선인것 같다.》 중학교만 졸업하면 무조건 농촌에 나가 농업로동에 종사해야 하던 때라 선생님께서는 장애인인 나의 앞날까지 근심하고 계셨던것이다. 선생님의 그러한 어버이다운 관심과 지도하에 쌓아온 문학수양이 바탕이 되여주었기에 나는 지금 나이 50에 그동안 잊고있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시, 수필, 가사와 같은 많은 문학작품들을 각종 신문, 잡지에 발표하고 시랑송 장끼까지 뽐내며 멋진 중년을 보내고있다.

지난 8월 11일 지체장애인날에도 훈춘시장애인련합회에서 조직한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자작시 《어머니》를 읊었다.

《채 피지 못하고 스러지는

한송이 꽃이였음에도

날아보지도 못한채 나래 부러진

한마리 새였음에도

보듬어 안아주며

함께 울어주는 어머니가 있어

차마 이 한 목숨 버릴수가 없었습니다

……》

장내에 모인 장애인 친구들은 물론 련합회 리사장님들까지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내 시랑송에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또 늦깎이로 글쓰기를 시작했음에도 《한국국제문학 신인상》, 《연변인민방송국생활수기공모 금상》과 같은 상들을 안아오는 뿌듯함도 만끽하고있다.

나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내가 사회에 진출한후에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대학시험에서 락방되여 절망하고있던 1983년 8월 선생님께서는 30리 산길을 걸으셔서 경신향 벌등촌에 있는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대학교입학통지서를 받으면 꼭 제일먼저 보여드리고싶은 선생님이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순간 먼지를 뒤집어쓴 선생님의 남색운동화가 눈에 띄였다 너무 눈에 익은 운동화였다. 소학시절에도 선생님께서는 저렇게 남색운동화를 신으시고 지체장애인인 나를 경신공사(지금의 경신진)에서 열리는 시랑송대회, 이야기대회, 3호학생강연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해 손목 잡고 30리 산길을 함께 걸으시지 않았던가! 내가 못나서 오늘 선생님께서 또 그 험한 길을 걸어오셨다고 생각하니 왈칵 울움이 터짐을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그러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선생님께서는 절절히 타이르셨다.

《춘란이앞에 선생으로 서있는 나도 기실 초중졸업생이요. 고중입학통지서를 받고서도 가난때문에 학교에 갈수 없을 때엔 정말 내 인생이 끝장난듯싶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이젠 대학교 졸업장도 탔고 그 작은 로전소학교(회룡봉소학교분교였음) 민영교원부터 시작해서 이젠 당당한 경신중학교 정식 교원까지 되였소.》

《대학에 가야만 훌륭한 인재인건 아니요. 이 사회에는 춘란이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청년들이 할일이 많고많소.》

……

선생님의 그 정성, 그 노력이 나를 감동시켰고 먼지 묻은 선생님의 운동화가 내 가슴에서 《포기》라는 두글자를 지워주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나는 체면이란 허울을 벗어던지고 또 마음에서 장애인이란 자비감도 밀어내고 평범한 인간 유춘란이로 열심히 살기로 작심하고 마을의 소학교에 대과교원으로 취직했다

체계적인 사범교육을 받지 못하고 교원사업에 참가한 나였기에 애들을 가르치는데 어려움도 한두가지가 아니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를 어떻게 가르쳤던가를 돌이키면서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양선생님께서 필기장에 장난삼아 그려놓은 충남이의 그림을 보고 그림에 특장이 있다고 칭찬해주며 만화를 그리도록 인도해주시면서 그 애가 그린 그림을 교실벽에 전시해주던 일, 줄뛰기하는 순자의 동작이 률동감이 있다고 무용을 하면 되겠다고 학교문예선전대에 추천해서 무대에 올려주던 일, 열살이 넘도록 식자관을 못 넘긴 김광훈학생이 흑룡강으로부터 전학해왔을 때 수업시간마다 개별수업을 따로 해주며 1년만에 4학년 수업을 소화할수 있도록 제고시키던일 등등은 나에게 포기를 모르는 교육자의 정신과 《인재시교》의 교육리념을 가르치는 산 교재로 되였다.

이렇게 교육사업을 하는 내앞에는 항상 양봉송선생님이란 훌륭한 본보기가 있었기에 나는 장애인이였으면서도 탄탄한 교수실력으로 사회와 학부모들의 인정과 찬사를 받는 우수교원이 될수 있었고 2000년부터는 훈춘시 영안진중심유치원 원장을 련임하면서 유치원에 《구역놀이법》이라는 새로운 교육활동모식을 대담히 도입하여 상급교육부문의 인정을 받았다

2008년에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고향의 아침》프로에서 우리 유치원과 나를 소개하기도 했다

구쏘련의 위대한 교육가 까이로브는 이렇게 말했다 《천부는 종자로 될수 있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식과 덕성이 아니다. 이런 종자의 발전은 반드시 교육과 교양에 의해서만 도달할수 있다.》 참으로 지당한 명언이다.

훈춘시 경신향 벌등촌이란 편벽한 산골에서 장애인이란 《쭉정이 종자》로 태여난 내가 인젠 제법 시랑송가로,문학애호가로,교육자로 떳떳이 자리매김할수 있은것은 양봉송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선생님의 참다운 교육과 교양이 있었기때문이 아닐가?

옛추억을 더듬어보다가 나는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여쭈었다. “지난 70년대초에는 교육이 중시받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자격증서 없이 아무나 하는 교원사업이 아니였습니까? 지금처럼 고급교원평의도 없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바라고 그렇듯 헌신적으로 사업하셨습니까?”라고 말이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학부모들의 긍정의 눈길이 나의 자격증서였고 한글자 두글자 지식을 익혀가며 건강하게 커가는 시골아이들 역시 당과 사회에 바치는 나의 량심의 자격증서였다.》고 대답하시는것이였다. 심산속의 벽계수 같이 맑고 깨끗한 지조를 지니신 선생님만이 써낼수 있는 완벽한 답장인듯싶었다.

그런 신조가 있었기에 선생님께서는 장애인학생일지라도,후진학생일지라도 다 금싸락같이 여기며 마음으로 품어 애지중지 키우셨던것이다 .

나의 존경하는 은사 양봉송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식보다 사랑의 마음을, 실력보다 지극한 정성을 쏟아가며 한명한명의 학생들을 키우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게 바로 소질교육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40년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교육자들 앞에 채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는 교육모식을 선생님께서는 벌써 지난 세기 70년대에 실천하고 탐구하신것이다.

그리고 그후 훈춘시제5중학교에서 작문지도교원으로 사업하실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풍성한 성과를 따내셨다. 나는 그때 선생님을 보며 또 한번 마음으로 느꼈다. 《교육사업에 대한 무한한 애착심을 갖고 항상 학생들의 미래를 념두에 두고있는 교원의 마음가짐이 바로 교육자의 지혜를 낳는 원천》이라는것을.

내가 이 글을 쓰고있는 시각에도 나의 인생의 본보기 양봉송선생님께서는 물질의 풍요로움을 즐기기에 드바쁜 사람들과는 달리 70고령임에도 후대들에게 우리 민족의 빛나는 자취를 남겨놓기 위해 《훈춘조선족사화》의 마무리 집필에 몰두하고계신다.

듣는바에 의하면 훈춘시에서 조직하는 교사절 30주년 기념대회에서 선생님께서 또 영예롭게 표창받으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교사절도 벌써 30주년이다. 이 뜻깊은 시각 나는 높아가는 9월의 쪽빛하늘을 우러러 선생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웨쳐본다.

《선생님, 마음으로 품어 정성으로 키워준 그 은혜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길림신문
/유춘란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흔 기자 = 어린시절 한족가정에 입양됐던 조선족 조향염씨가 현재 생모를 애타게 찾는 사연이 본지를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지난 7월 30일 오전 조향염씨는 기사를 읽고 전화했다는 길림성 부여시 도뢰소(陶赖昭)진 홍성촌의 방금녀씨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서 방...
  • 2014-08-20
  •   “저는 마음 잇기 차대의 성원입니다. 택시에 두고 내린 물품을 임자한테 되돌려주는것은 저의 응당한 책임입니다.” 19일, 17년간 도문시에서 택시운전수로 근무하면서 선후로 15만원에 달하는 금품과 수십대의 핸드폰을 주어 임자를 찾아 돌려준 양계걸(53세)은 이같이 말문을 열었다. 2000년 여름, 한 ...
  • 2014-08-20
  •   지난 12일 한화 1550만원(9만원좌우)를 택시에 두고 내렸다가 세시간만에 되찾은 김승호(61세)씨는 연길 택시운전수 왕소(王潇)의 아름다운 소행에 련신 고마음을 표했다. 한국에서 귀국한지 이틀째 되는 날인 12일, 김승호씨는 친구한테서 꾼 돈을 돌려주려고 훈춘으로 떠났다. 아침 7시 50분경에 그는 동생과 함께...
  • 2014-08-20
  •   “자식들이 다 쓸데 없어유... 늙어서 손에 갚힌게 없으니 이 모양이 잖아유...” 어느 김씨로부부는 한때 유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정년에 되자 저금도 없는데다 안로인이 시름시름 앓기까지 해 늘 자식들 넉두리만 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양로혜택으로 점점 자식한테 기대려는 로인들이 ...
  • 2014-08-19
  • 왕청현 공상은행에는 현재 50여명의 리퇴직인원이있다. 한때 이 은행에서는 “자관회(自管会)”라는 방식으로 로간부를 관리하였는데 자아관리에 애로가 많았고 누구도 관계하지않는 상태로 되여 로인들이 흩어지게 되였다. 10년전 이들은 전주 은행계통에서 처음으로 로인협회모식을 인입하여 관...
  • 2014-08-18
  • 《꽃타령》을 열창하고있는 최홍련(오른쪽) 최종화(왼쪽) 자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펼친 《로인절맞이 우리노래대잔치》프로에서 흑룡강성동녕현삼차구진오성촌에서 온 74세나는 최홍련과 최종화(70세) 두자매는 민요 《꽃타령》을 성수나게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들 자매가 이 노래무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
  • 2014-08-18
  • 18일 오전 10시경, 연변천지예술단에서는 “절씨구씨구 세월 좋아~”가 흘러나온다. 남들이 다양한 문예공연들로 로인절을 축하하는 가운데 이들은 절로 “세월 좋아”를 부르면서 춤판을 벌리는것이다.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며칠 남지 않은 공연준비에 다급해진것이다...
  • 2014-08-18
  • 훈춘 농장로인협회의 미담   “우리 농장의 로인들은 그야말로 보배랍니다. 지금 전 주의 조선족농촌마을의 형편은 서로 엇비슷하지 않습니까. 젊은이들과 장년들은 모두 로무송출에 나서다보니 마을에는 로인과 어린이들만 남아있지요. 그러다보니 마을을 지키고 가꾸는 중임이 로인들의 어깨에 놓여졌지요.&rdq...
  • 2014-08-18
  • 90세 고령의 시아버지를 살뜰히 보살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 며느리가 있습니다. 연길시 하남가두 춘광사회구역의 마귀금녀성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올해 67세인 마귀금이 아침에 일어나 하는 첫 번째 일은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것입니다. 이어 따뜻한 음식을 시아버지에게 대접하고 세수를 시키고 면도질을 ...
  • 2014-08-15
  •   1일,연길시적십자회에서 한국에 무료수술치료를 보냈던 6명의 선천성심장병어린이가 건강을 회복하고 귀국했다. 연길시적십자회에서 한국 구세군, 한국 동의성단원병원과 련합하여 전개하는 이 “적십자심장병어린이구조항목...
  • 2014-08-14
  •   아껴 먹고 아껴 쓰며 모은 돈 선뜻이 기부 지진재해구를 향한 연변인민들의 자발적인 사랑의 손길이 이어지고있다. 5일,연길시 공원가두 원신사회구역의 김주일로인(84세)이 적십자봉사소를 찾아 로당원으로서 운남 로전지진재해구에 저그마한 성의라도 표하고싶다며 성금 200원을 내놓았다.료해한데 따르면 김주일로...
  • 2014-08-14
  •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12일, 40여명 로인과 15명의 봉사자가 탄 뻐스에서 신나는 노래소리가 울려퍼진다. 연길시 진학가두 네잎클로버자원봉사협회가 로인절 30돐을 맞아 독거로인들과 “연길구경”에 나선것이다. 9시경, 뻐스는 연길시 진학가두판공실앞에서 출발해 첫 지...
  • 2014-08-14
  •  “1984년 8월에 주로인협회가 정식으로 설립됐고 또한 8월 15일을 연변의 로인절로 정했습니다. 올해 우리 주에서는 문예공연, 좌담회, 로년사업 30년 대사기, 화책, 정책자문 등 일련의 활동으로 로인절을 맞이하게 됩니다”고 7일 주로인협회 전평선회장이 로인절 30돐을 맞으면서 우리 주에서 펼치게 될...
  • 2014-08-14
  • 연길시공원소학교 3학년 3학급 담임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이 더운 여름 선생님 학급의 동가영학생이 방학간의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저의 단위에 와서 사무실을 청소하고 책도 정리하고 화분에 물을 주면서 저의들의 손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마냥 뛰여놀고 싶을텐데 그래도 저의 단위 선생님들의 심부름도 생글생글...
  • 2014-08-13
  • 만성신부전증(뇨독증)으로 한국 서울성모병원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하고있던 가수 송경철씨가 석달간의 국외치료생활을 잠시 접고 지난 8월 8일 연길로 돌아왔다. 12일, 연길시 공원가의 한 세집에서 송경철가수를 만났다. 거액의 병원치료비때문에 진달래광장부근에 있던 살림집을 팔다보니 귀국해 부득불 조촐한 세집생활...
  • 2014-08-13
  • 10일 연길시 10명의 로인들은 팔도 강락장수원 홍명옥원장의  초청에  복숭아 두광주리를 사가지고 팔도로 향하였다.  홍원장은 오래전 같이 글쓰던 통신원들이라고 잊지 않고 로인절도 곧 돌아오는데 물좋고 공기좋은 곳에 와서하루를 즐기라면서 자리를 마련하였다. 홍원장은 장수락원의 50여명 로인들 보...
  • 2014-08-13
  • 지난 3월, 뻐스 탈 때 있은 일이다. 차에 오르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짧게 전화 받고 급한대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마음으로 콩나물시루속 같은 차안을  비집고 올라갔다. 오른손으로 공중손잡이를 잡고 힘겹게 서서 정신줄을 놓고있는 사이 도적이 손쉽게 웃옷호주머니의 쪼르래기를 활짝 열고 스...
  • 2014-08-12
  • 8월 8일 연길공원 남쪽광장은 한복차림에 알룩딸룩 모자를 쓴 로인들로 붐비였다. 이날 연길시 진학가두에 자리잡고있는  흔흔로인락원에서 축수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고령로인들이 조용히 모이여 자아양로를 해오는 흔흔로인락원은 지금  60여명으로 80세이상 로인이 30여명 년장자는 92세이다. 연변로인절을 ...
  • 2014-08-12
  • 닷새전 서울에서 악몽 같은 비보가 갑자기 날아왔다. 한국 카톨릭대학 서울성모병원에서 골수의식 치료를 받고있던 박운봉교수가 엄중한 합병증으로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는것이다. 몇달전 모두가 큰 기대를 안고 한국으로 병치료를 떠나는 교수님을 배웅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 2014-08-12
  • 중국조선족항일가요합창단 단장 황성렬씨   “우리 합창단을 전문화된 합창단으로 승격시켜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싶습니다.” 11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퇴직하고 2013년 3월에 퇴직일군들로 구성된 중국조선족항일가요합창단을 설립한 황성렬(65세)단장을 ...
  • 2014-08-12
‹처음  이전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