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연변에 대한 찬가를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상해지식청년 석토영(石兔瑛, 62세)씨의 절절한 이 한마디에 나는 전률을 느꼈다. 그녀의 여전히 힘있는 눈매에 실린 진솔한 감정이 피부로 느껴졌다. 연변을 떠난지 수십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선말을 류창하게 구사하는 그녀가 놀라웁기만 했다.
석토영씨는 당의 호소에 주동적으로 하향을 신청했다. 하지만 정작 연길현 지신공사(현 룡정시 지신진)에 도착했을 때 상상도 못해본 생활조건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중을 나온 소달구지도 태여나서 그때 처음 봤다는 그녀의 나이 16세였다.
어려서부터 자력갱생형의 아이였던 그녀는 재빨리 생활에 적응했다. 함께 내려온 15명의 지식청년중 고된 일을 이기지 못하고 병들어 눕는 사람도 있었지만 석토영씨만은 오히려 부모에게 절대로 부담을 드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일을 해제꼈다. 조선말, 조선글도 제꺽 배워냈다.
“조선족 녀성들은 참 대단한것 같습니다. 모두들 열정이 드높았지요. 저는 그런 모습을 닮고싶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대의 추천하에 그녀는 부녀주임을 맡게 되였고 2년후에는 생산대장으로 당선됐다. 밤낮이 따로 없이 일했고 휴일이 따로 없이 일했던 고된 나날들이였다. 마을의 오보호로인들을 도와 물도 길어주고 남새도 보내주었는데 한번은 겨울이 오기전 땔나무를 장만해주려다가 도끼에 다리를 찍힌적도 있었다. 쉴새 없이 돌아치는 그녀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철의 아가씨”라고 친절히 불렀다.
“마을에서 공수가 제일 높았어요. 600공 아가씨로 불렸지요.”
그런 “철의 아가씨”에게도 무서운것은 있었다. 매일 저녁 불빛 하나 없는 산을 넘어 대대로 회의하러 갈 때면 저도 모르게 달음박질을 쳤다. 깊은 밤, 조용한 마을에 타박타박 그녀의 발걸음소리가 들리면 약속이나 한듯이 집집마다 불을 켰다. 그 창가에서 흘러나오던 따스한 불빛을 떠올릴때마다 석토영씨는 가슴속에서 감동이 여울친다.
겨울이면 함께 온 지식청년들은 상해로 돌아갔지만 석토영씨는 한번도 돌아간적이 없었다. 1972년의 겨울, 상해지식청년들의 현황을 살피러 내려온 조사조는 석토영씨의 사적을 듣고 모든 지식청년들이 따라배울만한 본보기라고 칭찬하며 상해시정부일군 환영회에도 초대했다. 1973년 석토영씨는 상해에서 모든 지식청년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석토영씨는 연변에 하향해있는 동안 겨울이면 일거리가 없는 상황을 고려하여 지식청년들을 상대로 한 가공공장을 세우기도 했고 옥수수 영양모단지를 보급시켜 그해 산량을 높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불태우는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여기에서 입당을 했고 공사 당위 부서기로까지 당선됐다.
드디여 1979년 모든 지식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변에 내려왔던 1만 8000여명이 모두 상해로 돌아갔다. 10년 청춘을 불태웠던 제2의 고향 연변에 남아서 발전하려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상해가 손짓했다. 170만명에 달하는 지식청년들의 일자리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던것이다.
상해라는 훨씬 큰 활무대에서 그녀는 인생의 두번째 장의 막을 열었다. 상해복개경영회사 총경리, 상해흥화회사 총경리, 상해통용자동차부속품공장 공장장, 상해이거얼집단 부총재… 거칠것이 없었다. 그녀가 상해에서 왕성하게 펼친 활동들도 모두 상해지식청년들을 위한 일이였다.
“상해에서 아주 많은 발전의 기회가 나에게 차례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식청년들을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간고한 곳일수록 일할 힘이 솟구쳤다는 석토영씨는 연변에 하향해서 고생하던 시절이 인생의 큰 밑거름이였다고 고백했다. 청춘을 불태웠던 잊을수 없는 고장, 많은 지식청년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석토영씨는 퇴직후 “상해연변지식청년련합회”를 설립하고 일심전력 지식청년들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모든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변을 위한 사업이기도 했다. 10년 동안 회비를 전혀 거두지 않고 사재로 운영해온 그녀를 두고 가족들은 리해를 하면서도 가끔씩 안타까운 마음에 “기부 방식이 틀렸다”고 꼬집기도 했지만 그녀는 허허 웃으며 넘겼다.
석토영씨는 상해의 연변지식청년, 연변에 남은 상해지식청년들의 일뿐만아니라 연변이라면 발벗고 나설만큼 연변사랑이 대단하다.
2012년 사과배 판로때문에 고민하는 연변재배농의 사연에 팔걷고 나서서 해결해줬고 연변가무단이 상해공연을 갔을 때 숙박을 전부 배치해주기도 했다. 연변에서 손님이 오면 그녀의 집은 비공식적인 거처이다. 연변손님들을 위해 그녀는 커다란 대야에 김치를 담그고 찰떡도 쳤다.
석토영씨는 최근 연변의 관광업에 큰 관심을 갖고있다. 앞장서서 상해, 나아가 전국과 연변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데 취지를 두고 관광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 운신하지 못할 때면 연변에 와서 지내고싶을만큼 연변을 사랑하는 석토영씨, “연변이 나를 있게 했다. 내 말에 호소력이 남아있을 때까지 연변을 위한 일에 나서고싶다”고 고백한다.
연변일보 글· 사진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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