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미문화상 응모글 12] 소고기명세장에 깃든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3월2일 09시30분    조회:125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소고기명세장에 깃든 이야기
백순천

 
전야에 황금오곡 무르익고 산등성이마다 단풍이 빨갛게 불타던 맑은 가을날 나는 오랜만에 내가 나서 자란 그립던 옛 고향을 찾아가 고향사람들을 만나보려고 서둘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은 촌로인협회에서는 대형뻐스를 세내여 훈춘 방천으로 관광을 떠나는 날이였다. 옷차림을 곱게 하고 나선 낯익은 고향사람들과 함께 유쾌한 하루를 보내며 담소를 나누던중 뜻하지 않은 섬뜩한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나의 소학교 동창생이였던 전임 촌장이 비리에 걸려 법적심사를 받다가 손목의 동맥을 끊고 자살까지 시도했다는것이다. 오염 없던 내 고향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고향사람들과 어울려 한껏 기분이 붕 들떠있던 나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여서 한동안 심정이 울적해지고말았다. 

나의 기억속의 고향사람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미더운 사람들이였다. 내가 특별히 고향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깊은 정을 품고있는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까마득한 일이지만 난 평생 잊을것 같지 못하다…

내가 열둬살쯤 되던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에는 몽당꼬리 누런 암소 한마리가 있었다. 어느해 여름방학때였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우리 집 암소를 잡는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집엔 두 형님이 군대에 가고 집에는 60세를 바라보는 아버지가 늘 병석에 누워계셨기에 집안팎일은 어머니가 홀로 떠메고있었다. 어머니가 소까지 거두기에는 힘에 부쳤고 아버지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가고있었다. 아예 소를 잡아 팔아 아버지 병치료에 쓰려고 타산을 하고있었던것이다.

그때 손에 현금을 쥔것이 없는 촌민들은 어쩌다 어느 집에서 돼지나 소를 잡게 되면 현금치기를 할수 없었다. 그래서 늦가을에 가서 징구량을 바치고 남은 햇곡을 팔아 갚기로 하고 외상으로 고기를 들어가는것이 상례였다. 하여 우리 집 암소도 례외없이 고기는 앞뒤마을에서 다 들어갔지만 어머니는 소고기돈 한푼 구경도 못해보고 소고기명세장만 달랑 건사해두고있었다.

몇달이 지난 가을탈곡때였댜. 어느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소고기명세장이 잃어졌다고 고아대며 온 집안을 발칵 뒤집고있었다. 평소에 어머니는 무슨 령수증이나 중요한 서류 같은건 덮개가 달린 작은 사기단지안에다 넣고 덮개를 꼭 덮어 건사해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응당 그 단지안에 있어야 할 제일 중요한 소고기명세장만은 종적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참말 귀신이 곡할노릇이였다. 성질이 급한 어머니는 안달아나서 열번도 넘게 그 사기단지를 거꾸로 들면서 련신 푸념질했다.

“귀신이 곡할노릇이네. 이안에 넣어둔 소고기명세가 왜 없노?”

어머니는 노전을 들어내고 장농을 뒤번져 옷가지들을 하나하나씩 꺼내 털어가며 집안의 손이 갈만한 곳은 죄다 서캐 훑듯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소고기명세장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안타까운 나머지 화가 치민 어머니는 나를 보고 설마하면서도 “네가 똥씃개 해치운건 아니냐?”며 고함쳤다. 내가 아무리 집에 종이가 없어 벼짚을 꿍져 휴지 대신 써도 그 중요한 소고기명세장을 꺼내 휴지로 쓸 그런 철부지는 아니였다.

어머니가 상심하여 분주히 떠들며 며칠째 찾는 바람에 동네 아낙네들까지 답답하여 같이 찾아주었다. 워낙 서발 장대를 휘둘러도 거칠것 없는 집안이라 찾을만한 곳은 다 뒤졌지만 없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걱정만 하다가 돌아갈뿐이였다.

소고기명세장이 없어졌다는건 앞으로 소고기값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거나 다름없는 일이였다. 당시 촌민들은 한알에 몇전씩밖에 안하는 닭알을 모아가지고 공급판매합작사에 가져다 팔아 그 푼돈으로 소금이나 등잔불을 켤 석유 같은 생활필수품들을 겨우 사오는 형편이였다. 이런 구차한 농촌살림에 소 한마리를 거저 허망하게 날린다는건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었다. 어머니는 상심하다 못해 환장할 지경이였다. 며칠이나 안달복달하며 애간장을 태우다가 끝내 몸져 자리에 드러눕고말았다. 한밤중에도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왜 없노? 왜 없노?” 하고 연신 되뇌이며 구들장이 꺼져라 한숨만 풀풀 내쉬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말없이 병석에 누워 속만 태우시던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인젠 별수가 없으니 집집이 돌면서 소고기를 가져간 집들에서 대주는 근수에 따라 소고기명세장을 다시 만드소. 담 얼마라도 고기값을 건져야지.”
50세도 넘는 어머니가 앞뒤마을을 한집씩 돌면서 소고기명세장을 다시 만든다는건 말하기는 쉬워도 힘겹고 아름찬 일이였다. 게다가 시일이 지난지도 퍼그나 오래된 일이여서 고기를 가져간 집들에서 고기근수를 제대로 기억하고있겠는가 하는것도 문제였거니와 설혹 기억하고있다 치더라도 사람들이 명세장도 없는 외상 소고기 근수를 제대로 말해주겠는가 하는것이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이였다.

“오래전 일이여서 사람들이 제대로 알려주겠습니꺼?”                                      

어머니가 내키지 않아 하는 말이였다.

“그러찮으면 므슨 딴 신통한 수가 있다고 그래? 애를 데리고 한집씩 돌면서 고기를 가져간 집들에서 어림짐작으로 대주는대로 적어오구려.”

어머니탓으로 생각하고 진작 속이 잔뜩 꼬여있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에 그만 결이 나서 성을 버럭 냈다.

어머니는 반신반의하며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할수없이 마을사람들이 다 집에 있는 저녁시간을 리용하여 돌기로 작심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자 주저심이 많던 어머니는 드디여 용단을 내리고 나를 데리고 집문을 나섰다. 

나의 어린 마음에도 소고기명세장을 다시 만든다는것이 억이 막히는 일이였다. 하지만 소 한마리가 오락가락하는 집의 큰일이니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얼른 뒤따라나섰다.

전기도 없는 괴괴한 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은듯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는 나지막한 초가집들이 어쩐지 낯설게 눈에 안겨왔다. 우리는 석유등불이 창문을 희미하게 비추는 집들을 한집씩 찾아들어갔다. 어떤 집들에선 석유를 아껴 등불도 켜지 않고있어 캄캄한 집안에서는 담배불빛만 어둠속에서 반디불처럼 반짝이고있었다.

생각밖에 우리를 기쁘게 한것은 마을사람들의 대범하고 시원스런 대답이였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소고기명세장을 잃어버린 일을 자기네 일처럼 걱정하였다.

“거참 안됐구만. 그러나 소를 잡은 집을 절대 밑지게 해서야 안됩지요.”

그러면서 자기네가 가져간 소고기 근수를 올려붙이면 붙였지 깎으려 들지 않는것이였다.

“다섯근이 좀 안되게 가져왔는데 그저 다섯근으로 적어라.”

“너근에 꼬리가 붙은것 같은데 너근 반으로 합소.”

모두들 통쾌하게 알려주었다. 마을사람들의 이와 같은 미더운 처사는 워낙 이번 일에 그닥 자신이 없었던 우리에게 용기와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우리는 신바람이 나서 발걸음을 재우쳤다. 

희미한 등불과 떨어져있는 내가 어두워 기장하기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집주인은 시렁우에 얹혀있던 아물거리는 석유등잔을 들어내려 불이 꺼지지 않게 한손을 모아 등잔앞을 막아가며 조심스레 나한테로 들고 왔다. 그리고는 내가 똑똑히 기장할수 있도록 종이 가까이에까지 갖다 비춰주기도 했고 어느 집에서는 성냥 한통을 어머니한테 건네주면서 갖고 다니며 내가 기장할 때마다 불을 켜 비춰주라고 하였다. 이런 일은 우리가 떠날 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였다. 간혹 어떤 집들에서 확실히 고기 근수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기를 들 때의 무게와 수량을 가늠하여 어림짐작으로 우리 집쪽이 서운하지 않도록 푼푼하게 근수를 쳐주어 우리를 흐뭇하게 하였다.

어떤 집을 찾아들어가면 마실을 온 몇몇 장년들이 등불도 없는 어둠속에서 한담하고있었는데 이런 집을 만날 때면 몇집을 한자리에서 기장할수 있었기에 수월할수 있었다. 우리 집 린근의 어떤 집들에선 또 주동적으로 찾아와 자기네 집에서 들어간 고기 근수를 알려주기도 했다. 하여 우리 일은 예상밖으로 빠르게 진척되여 며칠 안 가서 새로운 소고기명세장을 다 작성하게 되였다. 천만 다행스런 일이였다. 처음에 이 일이 성사될지 말지 수심에 싸여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제야 가슴을 짓누르던 큰 돌덩이가 떨어져나간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해 세밑에 우리 집에서는 소고기 판 돈을 모두 받을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지 일년이 지난 이듬해 한겨울, 기관지천식으로 앓던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는 농짝 한구석에 처박혀있던 아버지 낡은 조끼저고리 안쪽 호주머니속에서 뜻밖에 차곡차곡 납작하게 접힌채 누렇게 변색한 소고기명세장 원본을 찾아냈다. 워낙 데설궂은 더퍼리어머니가 명세장을 너무 깊이 숨겨두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때는 이미 소고기값을 다 받아들인지도 옛날이였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돈과 소고기명세장에 적힌 문세를 대조해보니 우리가 더 받았던것이다. 이것이 고향사람들의 인심이였다.

내가 열다섯살 되던 해 우리 집은 군대에서 제대되여온 큰형을 따라 도회지로 이주하면서 나는 아쉬운 심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 그 사실은 이미 까마득히 먼 옛일로 되였건만 당시 어스름한 석유등밑에서 소고기명세장에 또박또박 적어넣던 고향사람들의 이름만은 지금까지 나 스스로도 신기하리만치 기억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면서도 남을 더 관심해주던 고향사람들의 정직한 소행이 어린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때문이 아닐가. 지금 생각하면 고향사람들의 근로하고 순박하고 진실하고 후덕한 그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가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여 그후의 내 한생을 어질고 순박하게 살아오게 했는지 모른다.

내 추억속의 소고기명세장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색바래지지 않을것 같다. 어데로 가도 잊지 못할 그리운 고향사람들처럼 말이다.

<청년생활> 잡지 2016년 1월 호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한때 내게는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내놓고 별다른 취미가 따로 없었다. 같잖은 글이라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곡차곡 글로 표현해내고 나면 모종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군 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요즘은 글을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여버렸다. 졸업을 하고 출판사의 편집이 되고 나서, 또 지금은...
  • 2019-11-25
  • 건국 70돐 기념 특별기획: 〈일대일로의 조선족 개척자들〉(1) 글 사진/서정옥 올해 휴가는 어디로 떠날가 고민하는 나에게 남편은 지중해 남쪽 해안 나라 튀니지로 가자고 한다. 튀니지가 도대체 지구촌 어딘데?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우리와 거의 지구 반대쪽에 있는 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한 튀니지, 사하라사막이 있는...
  • 2019-11-16
  • [수기] 엄마가  준  두번째 생명 림율아 나는 우리나라 3년 자연재해시기였던 1961년 봄에 태여났다.   1959~1961년을  중국의 3년 자연재해시기 또는 3년 고난의 시기라고 한다. 이 3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식량과 부식품이 극도로 결핍하여 인민들의 건강과 생명에 엄중한 해를 끼쳤다.백성들은 먹을...
  • 2019-11-14
  • 연길 세집 2017년 8월 24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겁이 꽤 많았다. 특히 밤이 되면 변소에 가기를 그렇게 무서워했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아니면 아버지가 ‘보초’를 서주어야 했다. 캄캄한 시골의 재래식변소에 앉아있으면 자꾸 누군가가 뒤에 서있는 것 같고 당장이라도 밑으로부터 뭔가가 올라올 것 같은 공포...
  • 2019-11-12
  • 계림문화상 대상 수상작품 "일본에서 살기" 리홍매(일본) 머리말 1983년, 당시의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우고 세계를 향하여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을 열었다. 80년대말에 이르러 활성화된 중국정부의 류학생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어가 널리 보급된 동북3성지역의...
  • 2019-11-12
  • 병원치료 포기 2017년 7월 21일 내 고향친구들한테는 엄마는 ‘어죽’으로 통한다.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나, 어죽을 잘 끓이는 엄마 그래서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기를 좋아했다. 놀러오면 엄마는 거의 혼자서 준비를 다해서 우리가 서쪽 강변에 나가 마음껏 천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군 했다. 처음 몇번은...
  • 2019-11-11
  • “온 힘을 다해 이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던 그 눈빛”, “어느 구석을 봐도 엄마가 보이는데 어디에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생소해 미칠 것 같았다”,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본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엄마만 떠올리면 억...
  • 2019-11-11
  •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70년 당령(党龄)의 한춘옥 ‘마지막 공헌'으로 유체 기증을 선언   ‘한춘옥 ’이름자와 전국 통일 번호(2785)를 밝혀 발급된 건국 70돐 기념장 소장함. 기자한테 자신이 받은 건국 70돐 기념장을 ...
  • 2019-11-08
  • 편집자의 말 우리 나라에는 아직 유체 기증 사업 관련 법은 없다. 하지만 유체 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소행이 싹트고 있다. ‘유체 기증'은 기증인이 생전에 유체 기증 념원을 표명하고 사망 후 위탁인 혹은 집행인이 유체를 전부 혹은 부분적(장기 기증 경우)으로 의학 교수 및 연구사업에 기증하는 문명행위...
  • 2019-11-08
  • 영화 삼촌은 지난세기 50년대에 룡정 덕신중학교 학생회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어린나이에 자기보다 몇살 위인 선배들앞에서 연설을 하군했는데 똑똑하다고 정평이 났으며 이름난 웅변가였다고 한다.   사진뒤면에  ...
  • 2019-11-07
  • 지난 10월 31일, 간단한 기부식이 무순1중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료녕무공공구주식유한회사 리사장 장명상이10만원의 기부금을 빈곤대학생 손영택에게 전달했다. 장명상이 손영택에게 하는 두번째 기부다.   19세의 손영택과 그의 가정은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의 누나는 13세 때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선천성 ...
  • 2019-11-07
  • 어린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박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박사재학중에 있고 간혹가다 비루한 솜씨로 쓴 글들을 투고하여 가뭄에 콩 나듯 지면에 내 이름을 올리면서 살고 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의 현재 삶을 브리핑한 목적은 어렵사리 어릴적 꿈을 지키고 이루어낸 ‘성공신화의 주인공...
  • 2019-11-01
  • [청춘노트]  리은실(李银实) 필명 몽실(梦实). 1984년출생 2009년 연변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 취득. 현재 북경민족출판사 근무 최근에 글을 왜 쓰냐는 질문을 몇번 받았다. 글쎄다. 나는 글을 왜 쓸가? 언제나 먹기보단 잠자기를 우선시하는, 잠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라 생각하는 ‘잠보’가 잠을 포기하...
  • 2019-10-26
  • 지난 8월 29일, 나는 흑룡강성 계서시 계동현 계림조선족향에서 펼쳐진 약선(药膳)강습행사를 마치고 50년 만에 다시 그리운 북대황 기러기섬(雁窝岛)으로 향했다. 기러기섬은 바로 50년전인 1969년 3월에 가서 1973년 3월까지 내가 청춘열정을 쏟아부어 벼농사를 개척한 정든 고장이다.   1962년 6월 22일, 국무원...
  • 2019-10-22
  • 지난 10월 19일, 연길시도시건설투자그룹유한회사(대서양공관대상)에서 주최하고 공청단연변주위, 연변사회조직관리국, 연변9.3애심공익협회에서 주관한 “대서양공관대상 애심입쌀 3만근 전달”식이 연변체육관에서 펼쳐졌다.   10월 17일은 여섯번째로 되는“전국 빈곤층 부축의 날”이다.&nbs...
  • 2019-10-21
  • 백세 시대인 요즘엔 칠십나이는 삶의 지혜를 빛내는 황금 시절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두번째 봄이다. 공화국 창립과 동갑인 나의 칠십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어린시절과 그림같은 고향의 풍경이 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에서 ...
  • 2019-10-18
  • #예로부터 결혼은 인륜지대사로 꼽혔다. 그러나 점점 결혼을 늦게 하는 만혼인구 증가률이 상승하고 지어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비혼족이 생겨나는 등 시대가 변하면서 요즘 세대들의 결혼관 또한 빠른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변화와 더불어 관점의 충돌로 인한 갈등 또한 항상 존재해 왔다. 다름 아닌 “...
  • 2019-10-12
  • "더 기다려주다가는 혼자 사는 게 더 편하다고 할가봐 걱정돼서 달려왔죠."  "급해하는 엄마 마음 리해가 돼서 함께 왔어요."... 결혼에 대한 인식이 다양해지다 보니 만혼 인구도 점차 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 적령기 자녀와 부모의 ‘결혼에 관한 론쟁’도 항상 이슈로 떠오른다. “자식의 결...
  • 2019-10-08
  • - 글 / 국하 -       (흑룡강신문=도쿄) 알람 소리에 따르릉, 이불을 개는 소리 착착, 창문을 여는 소리 찰칵,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살살, 웃집에서 걸음을 걷는 소리 쿵쾅쿵쾅, 수도물이 내려오는 소리 쏴쏴... 내 마음이 오늘도 힘내라고 하는 소리 뿅뿅.   찌르륵 찌르륵 계란후라이 지지는 소리와 같이...
  • 2019-09-24
‹처음  이전 3 4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