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한국로무갔다 두 번의 유방암 이겨낸 5년 암 생존자 안명애 씨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9월20일 08시18분    조회:249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28살 젊은 나이에 한 살배기 아들을 중국 하얼빈에 두고 부산의 방직공장으로 돈 벌러 한국에 왔던 조선족. 식당 주방일과 홀 서빙 등으로 전국을 전전하며 억척같이 돈을 모아 귀화도 하고 30대 후반에는 번듯한 호프집도 운영하며 승승장구했다는 사람.

하지만 이를 시샘이라도 한 걸까? 승승장구하던 시절 갑자기 찾아온 유방암!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생각할 즈음 반대편에 또다시 찾아온 유방암! 그리고 계속된 재발 그리고 재발….

언제 끝날지 막막하기만 했던 재발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올 3월 암 완치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다. 경기도 안양에 사는 안명애 씨(48세)다. “아들 때문에 살아야만 했어요. 살 수 있다고만 하면 뭐든 다 했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암 극복 비결을 들어봤다.

 

눈물 가득했던 타향살이…그러나 이젠

28살, 한창때였다. 한 살배기 아들을 두고 떠나기가 절대 쉽지 않았지만, 아들을 위해서 떠나와야만 했다. 당장은 마음 아프지만, 돈을 벌어 남부럽지 않게 아들을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같이 부산의 방직공장에 연수생으로 취직되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국에 좀 적응할 만하자 1년간의 근로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식당 주방일과 홀서빙 등 일자리가 있다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기 시작했다.

“울산, 금촌 등 전국을 떠돌면서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너무 울어서 눈물이 다 말라 버렸죠(웃음).”

그러다 2년 만에 안양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 지금까지 18년간 안양이 제2의 고향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안명애 씨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살만해지자 느닷없이 암 진단

한국에 와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억척스레 일한 만큼 보람도 있었다. 한국 온 지 10년째 되던 2005년에는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큰 호프집을 운영할 정도가 됐고, 장사도 잘됐다.

“그때는 한국의 돈을 제가 다 버는 것처럼 정말 많이 벌었어요. 중국에 집도 사고 그랬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그간의 고생이 다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누가 시샘이라도 했던 걸까? 감기가 낫질 않았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다 사우나에 갔다가 뭔가 이상해서 오른쪽 가슴을 눌렀더니 피고름이 나왔다. 엄청난 양의 하혈도 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죠. 장사한다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밖에 못 잤고, 영업하는 내내 담배 연기 속에서 살았고, 음주도 좋아해서 과음도 하고 그랬거든요. 사는 데 정신없어서 건강 관리 같은 건 아예 생각도 못하고 살았거든요.”

서둘러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고 증상을 상세히 알렸다. 이것저것 검사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순간 ‘암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의사는 보호자를 찾았다. 보호자는 없다고 그냥 직접 말해달라고 하자 의사는 담담히 말했다.

“암입니다. 빨리 큰 병원으로 가세요.”

이제 겨우 살만한 데… 조금만 더 있으면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는데 암이라니! 충격이 컸지만, 절망도 사치였다. 살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아들 때문에 살아야만 했다.

암으로부터 자신을 살려줄 만한 곳을 수소문해 제일 좋다는 대학병원엘 찾아갔다. 암 진단은 받았지만, 한 달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자리가 없어서 당장 입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할 것만 같았는데,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거 같았는데 한 달 후에 오라고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 한 달 새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죠.”

망연자실해 진료실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한 할머니가 말을 건넸다. 자기 여동생도 유방암이었는데 순천향대 서울병원 이민혁 교수한테 치료를 잘 받았다며 그 병원에 가보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턱대고 순천향병원엘 찾아갔다. 도착하니 12시 30분. 오전 진료가 끝날 시간이었고, 예약도 안 한 상태라 진료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진료실 앞까지 찾아갔다.

때마침 이민혁 교수가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때 무작정 이민혁 교수의 손을 잡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는 안명애 씨.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치료받고 싶다고 간곡히 청했다. 다행히 이민혁 교수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오후에 입원한 후 일주일 뒤 오른쪽 유방암 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임파선을 다 잘라내 수술 직후에는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꾸준히 운동했다. 죽지 않고 살았는데 어떤 고통이라도 참지 못할 것이 없었다. 덕분에 지금은 불편함 없이 생활하고 있다.

 

왼쪽에도 유방암이…

오른쪽 유방암 수술 후 3년째인 2008년, 안명애 씨는 날벼락 같은 정기검진 결과를 들었다. 왼쪽 유방에서도 암세포가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왼쪽은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왼쪽 가슴이 딱딱해지면서 느낌이 이상하더라고요. 장사하느라 잠도 못 자고, 스트레스를 받고, 과음도 하면서 무리한 생활을 했는데 아마도 그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자신을 살려준 이민혁 교수(가운데)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라는 안명애(좌) 씨는 순천향대 서울병원 유방암센터장 이민혁 교수가 이끌고 있는 순유회(순천향대 서울병원 유방암 환우회)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caption]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 갈 때마다 왼쪽 유방에서 종양이 계속 발견됐다. 종양 덩어리를 긁어내는 맘모톰 시술을 받았다. 오른쪽과 달리 왼쪽은 재발에 재발을 거듭했다.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재발의 수렁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암에 좋다는 것을 찾아 나섰다. 등산에서 온열치료까지 암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다 찾아서 해보고 먹어보았다.

“그러다 알게 된 게 아사이베리에요. 지인이 아사이베리를 먹은 암 환자들이 많이 좋아졌다고 알려줘서 그때부터 아사이베리도 꼭꼭 챙겨 먹기 시작했어요.”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왼쪽가슴에 암세포가 발견된 지 2년 6개월째 되던 2011년 정기검진 때 안명애 씨는 암세포가 정상세포로 돌아갔다는 조직검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재발의 늪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올해 3월 4일, 안명애 씨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아무 이상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암세포로 보이는 건 하나도 없다고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현재 안명애 씨는…

지금도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꼭 등산을 하고 아사이베리도 꾸준히 섭취하고 있다는 안명애 씨. 편식이 심했지만, 이제는 가리는 음식 없이 골고루 챙겨 먹는다. 정기검진도 꾸준히 받고 있으며, 순유회(순천향대 서울병원 유방암 환우회)에도 적극 참여하며 활동 중이다.

처녀 시절, 얼굴 전체에 여드름이 너무 많아서 늘 고민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여드름 때문에 시집도 못 가겠다고 할 정도로 여드름이 심해서 모진 마음을 먹고 두 번이나 약을 먹었다는 안명애 씨다. 그런 그녀에게 여드름은 감히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암을 극복하게 된 비결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들이요. 아들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들을 생각하면서 암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그런 아들은 지금 어엿한 대한민국 청년이 되어 대형 기획사에서 가수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건강다이제스트  이기옥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외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활상황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설을 쇨 때에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음력설기간 기자는 외지에서 사업하고 학습하는 안도현의 4명 귀향인원을 만나 이들이 고향에 대한 기대와 정감을 느껴보았다.   시민 마우붕은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후...
  • 2018-02-27
  • [백성이야기71]수집인생의 “화분”으로 빚어내는 “황금꿀” 연변장백산우취협회 리사 김영일선생의 수집인생 이야기 들어본다 모아왔던 수집품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일선생 “언제든지 시간 나면 놀러오슈…” 매주 주말이면 장이 서는 연길의 한 골동품...
  • 2018-02-26
  •       음력설을 맞아 위챗 채팅그룹마다 따뜻한 새해덕담과 명절인사로 가득찼다. 이 가운데 16일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자체 채팅그룹에서 ‘온정’을 주제로한 사진교류활동을 벌렸다. 회원들이 채팅그룹에 적극 공유한 가족사진, 설날밥상사진을 투표에 따라 1, 2, 3등을 ...
  • 2018-02-24
  • 북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일본회사에서 8년간 일하다가 작은 집도 사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 생활에 대한 격정과 자극이 없었고 더 발전이 없을것 같은 따분한 현재가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현실을 타개하는 길을 선택한것이 바로 일본류학이였다.   일본 도쿄...
  • 2018-02-23
  •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한 윤화씨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은행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나한테 일본류학을 소개해준 것은 같은 은행을 퇴직하고 일본류학을 떠난 후배였다. 그 당시에는 류학신청에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모와 회사를 속이고 일본류학 신청을 시작했다.그런데 예산...
  • 2018-02-22
  •      ‘미(美)+청(青)’ 사진관 4년만에 9개 가맹점 거느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당신에게 다가서는 김개강 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정명자 기자=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했던 90년대, 스튜디오이자 사진 현상소(照片冲洗店)였던 사진관은 어디서든 쉽게 볼수 있었다.   하지...
  • 2018-02-12
  • 일본에 온 지 어느덧 17년, 내 인생의 거의 절반, 그것도 제일 찬란한 20대와 30대를 일본에서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힘든 적도 있었고 슬픈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거같다. 누구나 다 있는 20대와 30대를 많은 이야기로 수놓았으니 지나온 날들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연변대학...
  • 2018-02-09
  • 내가 일본에 와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넌 일본에 살아서 참 좋겠다.”  일본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외로운데, 서러울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그러나 끝내는 무거운 미소로 묵인하고 만다.  “그래, 나 너무 좋아. 찢어지게 가난하던 촌년이 일본에 와서 출세했으니...
  • 2018-02-05
  • 남영권씨 가족 “세월이 류수”라는 말이 지금은 리해가 간다. 일본에 온지 벌써 20년이 되였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바로 그 시기를 나는 일본땅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덕분에 사이타마켄(埼玉県)에 있는 일본어학교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나는 부모님이 챙겨준 일...
  • 2018-02-05
  •     (흑룡강신문=하얼빈)1932년 4월 조상봉씨의 셋째 아들로 태여난 나는 다섯살때 어머니를 잃고 12살때 기둥같이 믿던 아버지마저 급성장염으로 돌아가셨다. 동년시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지주의 머슴질도 해보고 학도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나는 조직의 배양으로 1952년 10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입당을 하...
  • 2018-02-05
  • 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
  • 2018-02-01
  • 편집자의 말: “일본생활수기”시리즈를 내면서 1983년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운 후 세계로 향한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이 열렸다. 80년대 국비류학, 사비류학으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에로의 이동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정착의 시대를 넘어...
  • 2018-02-01
  • "기층 당지부서기로서 군중과 한마음이 되여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련다." 이는 촌에 내려가 제1서기 직무를 맡고 있는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당지부서기 박선렬의 심중 고백이다. 금년에 39살에 나는 박선렬은 지난해 5월, 현 조직부문의 배치에 따라 십사도구진 망천아신촌에 내려가 촌당지부 제1서기 직무...
  • 2018-01-22
  •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에 들어서는 길목은 버드나무로 즐비하다. 마을 입구에서 우정국까지 나무가 500-600미터쯤 줄지어선 모습은 동불사회구역로인협회 회원들이 '마을가꾸기'의 일환으로 일궈낸 풍경이다.   그들이 마을을 ...
  • 2018-01-1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1) ◇한해동(장춘)   필자 한해동  벌써 80고개를 훨씬 넘은 나는 늘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게 된다. 후회되는 일도 많고 자랑스런 일도 적지 않다. 인생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도 같아 장애물에 부딪쳐도 멈추지 않고 에돌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끝내 머나먼 큰 바다...
  • 2018-01-17
  • 섬나라 사람들인 일본인들은 나무 한그루, 벌레 한마리에도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힐링의 명소로 찾는 일본정원, 늪을 중심으로 정원석과 자연의 나무, 풀로 꾸며진 그 곳에 가면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짙게 느끼게 된다. 자연을 가까이에 하려는 일본...
  • 2018-01-17
  • 한국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안녕? 사랑하는 내 딸 지월아,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나 보고 싶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우리 딸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커줘서 엄마는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여러 방면에서 모두 우수해서 엄마는 너무나 기쁘고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우리 딸이 가장 필...
  • 2018-01-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
  • 2018-01-0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9) ◇리송규(훈춘) 학생시절 대련 바다가에서의 필자 소중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 할가? 그것도 내가 가장 즐기는 바다에서 얻은 것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물 몇살 젊은 시절 장춘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대련에 간 적이 있었다. 대...
  • 2018-01-09
‹처음  이전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