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색바랜 사진을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5월5일 09시19분    조회:174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백성이야기54] 색바랜 사진을 따라 찾은 옛 이야기 

림춘애: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제일 큰 소원은 모주석을 만나는 거였지요.

 


1957년 주중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의 연회에 참석한 중앙민족학원 소수민족학생들, 첫줄 왼쪽 첫번째 학생이 림춘애.

지난 력사의 한 장면은 문뜩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실은 림씨 성의 지인이 무심코 상기한 흑백사진의 이야기 때문이였다. 그 사진에는 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나타나고 있었고 또 애젊은 조선족 소녀가 있었다는 것.

“그맘 때라고 하는데요, 큰 고모는 또 모(택동)주석에게 꽃묶음을 드린 적 있다고 합니다.”

소녀는 바로 림씨가 말하는 그의 큰 고모, 림춘애였다. 큰 고모는 말이 소녀이지 지금은 여든 고개를 넘은 로인이였다.

우리 일행은 내몽골 중부의 편벽한 도시 포두(包頭)에 가서 주인공 림춘애를 만났다. 10대의 나이에 나라의 지도자들과 함께 섰던 그녀는 지금도 사진 속의 그날처럼 행복한 듯 했다.

포두의 자택에서 일기장을 찾아 옛 기억을 더듬는 림춘애.

“딸과 아들은 아직도 리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제일 큰 소원은 모주석을 만나는 거였지요.”

림춘애는 사물함에서 옛 사진들을 찾아 일일이 내놓았다. 색바랜 오랜 사진에는 그녀의 소중한 옛 기억이 담겨 져 있었다.

"8.15"광복에 즈음하여 림춘애는 여덟살을 먹던 해에 가족과 더불어 압록강을 건넜다. 그때 엄마는 두부를 앗고 콩나물을 기르고 국수를 삶아먹으며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였다.

1955년 7월, 림춘애는 고중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초급사(初級社) 즉 개인경제에서 집체경제에로 과도하던 시기였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인력과 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소득을 분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친은 탈곡기에 손을 다쳐 불구가 되였고 동생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나니 집안일은 전부 다 엄마의 몫이였다. 림춘애는 이른 봄이면 살얼음을 헤치고 도랑을 팠다. 너무 맥이 진해 저녁이면 구들에 오르기도 힘들었다. 딸애의 하얀 다리에 흐르는 빨간 피를 보고 엄마는 불쌍하다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저는 그렇게 일을 잘해야 언제인가 북경에 가서 꼭 모주석을 만나 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림춘애는 학교시절에도 남에게 뒤지지 않은 우등생이였다. 그녀 뿐만 아니라 세 오누이 모두 통화조선족중학교에서 하나처럼 유명한 우등생이였다. 그들은 각자의 학급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하고 있었다. 림춘애가 학교를 떠난 후 그녀의 대대장 완장은 둘째 동생 림형섭에게 돌아갔고 림형섭이 학교를 떠나자 이번에는 또 막내 동생 림춘자가 완장을 꼈다. 부친은 세 자식을 잘 키운 보람으로‘우수학부모’로 학교의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구름이 없는 하늘에 비가 내릴까.” 꿈같은 소원은 불현듯 그녀에게 지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1956년 여름, 림춘애에게 문득 중앙민족학원의 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바로 그녀가 촌의 대표로 추천되여 현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전국 각 지역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도합 100명이 선정되였는데 조선족은 림춘애가 유일했다.

중앙민족학원에 입학, 떠나기전에 가족과 남긴 사진, 뒤줄 오른쪽 첫 사람이 림춘애.

“그날이 1956년 8월 22일이였지요, 일부러 가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림춘애는 수도 북경에서 공부하는 한편 국가 지도자들과 만나며 보귀한 사진들을 남긴다. 그때 그 시절, 소수민족 대학생들은 특별초청으로 국내외 지도자를 마중하고 배웅하며 연회를 마련하는 장소에 자주 참석할 수 있었다.

이윽고 림춘애는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행복의 순간을 맞는다. 1957년 5월 26일, 림춘애는 모택동 주석을 지척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북경공항에서 외국의 지도자를 배웅하던 그날 림춘애는 그이에게 꽃묶음을 직접 올리게 되였다. 만약 세상에서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손바닥의 따스한 체온으로 느끼던 감동의 그 찰나를 시계추처럼 영원히 멈추게 하고 싶었다.

북경 민족문화궁 부근에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소수민족학생들. 뒤줄 왼쪽 첫번째가 림춘애.

그날 저녁, 림춘애는 기숙사에 돌아온 후 그날의 흥분을 일기장에 또박또박 적었다.

하지만 한가지 유감이 남았다. 바로 그날의 잊지 못할 그 시각을 사진으로 기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다니던 의학예과반은 1956년에 소수민족 의대생을 위해 중앙민족학원 예과부에서 특별 개설한 유일한 반급이다.

해마다 국경절, "5.1"절 등 대형 행사 때면 중앙민족학원의 소수민족학생들이 의장대처럼 대오의 전렬에 서서 천안문 앞을 행진했다. 외국 수반을 환영하고 배웅하는 공항의 행사에도 소수민족 학생들이 참석했다. 일부 학생은 국가의 공식행사에만 6,7차 참석했다.

림춘애가 대학시절에 받았던 중국정부와 외국 대사관 연회의 초청장 일부.

의학예과반에는 이런저런 특혜가 제공되고 있었다. 전부의 학생들에게 이불과 담요, 치솔 등 도구가 차려졌다. 민족복장 역시 학원에서 특별히 개개인에게 맞춤복으로 만들어주었으며 대학 3년 동안 각기 세 벌씩 발급했다.

예과반 생활에서 제일 인상 깊던 건 그래도 고추라고 림춘애가 회억했다. “제가 조선족이라고 해서 매운 음식을 잘 먹는걸로 알고있었겠죠, 끼니마다 고추가 식탁에 올랐지요. 그런데 그 고추는 너무 매워서 도무지 견딜수 없었습니다.”

그 고추는 묘족들이 애용하는 토종 고추였다. 림춘애는 고추를 맛보다가 눈물까지 찔끔 짰지만 그들은 끼니마다밥처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때 학원에는 식당 다섯개가 있었는데 한족료리, 서장료리, 이슬람교와 회족료리, 조선족과 묘족, 나시족, 쫭족을 비롯한 다민족 료리, 종합료리는 식당마다 각양각색이였으며 와중에 2종을 선택할 수 있었다. 좌석에는 또 여러 가지 짠지도 미리 준비되여 있었다.

“명절 때면 조선족들은 찰떡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김치는 없었지만 늘 매운 짠지가 있었지요.”

림춘애가 말하는 찰떡은 쫀득쫀득하게 찰진 떡이 아닌 중국식의 튀김 찹쌀떡을 말한다. 그래도 료리사의 정성 때문에 옛 고향의 맛을 맛볼 수 있었다. 김치며 랭면 생각이 나면 서단(西單) 귀퉁이에 있는 조선족랭면집에 가서 먹군 했다. 중앙민족학원에서 수학(修學)을 하고 있던 연변지역 조선족간부들은 늘 림춘애를 함께 불러 맛좋은 음식을 사주었다.

“그런데 그 고마운 분들과 기념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했지요. 정말 유감스러웠지요.”

나중에 의학예과반의 100명 학생 가운데서 50명이 승진, 북경의학원에서 림상의학 등을 배웠다. 이 의학원이 바로 지금의 북경대학 의학학부이다.

1965년 9월, 림춘애는 남편을 따라 내몽골 중부의 포두(包頭)에 전근되였다. 포두는 철강의 도시를 건설하면서 생긴 전형적인 이민도시이다.

“제가 올 때 포두에는 조선족이 100명 정도 살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때 포두의 조선족은 대부분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일찍 1939년에 포두에는 조선인 64명이 살고 있었으며 1950년대 초에는 오히려 34명으로 줄었다고‘내몽골조선족연구회’가 밝히고 있다. 1953년 중앙정부에서 포두에 철강공업기지의 건설을 결정하면서 포두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1990년대에는 포두의 조선족인구가 5백여명이였다.

2001년 포두 로동공원에서 조선족들과 함께 유식의 한 때를 즐기는 림춘애(파란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람.)

림춘애는 포두의 편벽한 산골에 의사로 배치되였다. 위생소(衛生所)는 시내에서 70키로미터 상거한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의료의기는커녕 의학서적도 없었고 신출내기인 그녀를 가르칠 전문의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려움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직원들을 인솔하여 창업하고 최종적으로 위생소의 모습을 일변시켰다. 1980년 시내의 철강종업원병원 피부과에 전근한 후 림춘애는 또 독립적으로 연구하여 난치병 등 10여종의 희귀병을 진단, 치료하는 놀라운 실적을 올린다.

“제가요, 나라의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꼭 보답을 해야 하지요.” 림춘애는 의례히 해야 할 일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남을 돕는 그런 활동을 하고 싶은데요, 나이 때문에 생각처럼 안돼 안타깝습니다.”

림춘애는 퇴직한 후에도 공익활동에 적극 투신, 지진지역을  지원하는 등 좋은 일을 하여 세 번이나 모범으로 당선되였다. 그래도 림춘애는 아직까지 너무 부족하고 또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흑백사진에 실린 소녀의 옛 숙원은 60여년 세월이 지난 오늘 날에도 푸른 하늘처럼 변치 않고 있는 듯 했다.

(글/사진 북경 국제방송 김호림)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ㅡ룡정온천사우나의 ‘때밀이박사’ 김철수도 아빠트 두채에 자가용 갖춘 부자 지금은 목용탕에서 때밀이를 하는 사람들중 조선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밀이를‘천’한 일로 여기기때문이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17년 째 해오고 있는...
  • 2018-05-16
  • - 아들의 프로 데뷔를 보고 싶은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 지난 10일 만난 정명호(46세)씨는 수심이 가득했다. 부모가 돼서 자식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목에 튜브를 낀 정명호씨는 이틀에 한번씩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뇨독증 환자이다. 당뇨합병증을 10여년 앓던 그...
  • 2018-05-14
  • 5월 10일 오전, 연길시 신흥가 민창사회구역에서 점심준비가 한창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인 어머니날은 미국에서 유래된 기념일(5월 두번째 일요일)로 연변에서는 ‘3.8’부녀절이나 ‘8.15’로인절 등에 비해 작은 규모의 비교적 생소한 명절에 불과하나 독거로인을 비롯한 로인...
  • 2018-05-12
  • 4월 22일, 일본국제문화원 정걸씨의 초청으로 메지로대학“스즈키선생과 장연선생을 모시는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날 모임의 현장 ㅡ 동경 닛포리 HOTEL LUNGWOOD으로 가는 길은 연변의“진달래꽃 축제”를 마중해 언녕 핀듯한 울긋불긋한 철쭉꽃들로 필자의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하였다. 이날 모임은...
  • 2018-05-10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1) ▩양상태(길림) 필자부부가 당시 두손으로 지은 기와집 내가 결혼할 당시(1967년 겨울)에 우로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이가 계셨는데 누이는 출가했고 형님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제대하여 흑룡강성 대경시에 배치받았다. 아래로는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
  • 2018-05-09
  • 왕청진후대관심사업위원회 전금선 주임의 사적   (흑룡강신문=하얼빈)리강춘 특약기자= 10년을 하루와 같이 왕청현 왕청진 동진소학교의 학교, 유치원어린이들에게 새 이불, 솜신, 솜옷, 교복, 운동복을 보내주고 생활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 온갖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는 공산당원이 있다. 그가 바로 왕청진 후...
  • 2018-05-08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0) ▩김삼철(룡정) 1968년 11월 7일, 맏딸 홍화의 돌생일날에 남긴 기념사진 지금도 우리 부부가 처음 엄마 아빠로 되던 날을 생각하면 나는 기쁨보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처음 맞게 되는 큰애의 출생이 안해의 난산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줄을 누가 알았으랴. &lsqu...
  • 2018-05-04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9) ▩김성숙(장춘) 앞줄 왼쪽부터 필자의 올케, 어머니, 오빠. 뒤줄 왼쪽부터 필자의 동생부부, 언니, 필자 김성숙.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네 형제자매를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키우기에 힘썼다. 후에 아들을 장가 보내 며느리를 삼은 후에는 화목한 가...
  • 2018-04-25
  • 료녕성 무순시에서 해방전쟁시기 전투영웅 리형선 로인을 만나 취재중인 김광현. 출판기념모임에서《백년실록》교육편의 주필인 허청선 교수와 담소하고 있는 김창석. (지난 기에 이어) 김광현과 김창석은 아예 우리 지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부터 취재를 시작하기로 기획을 하고 일시불로 동영상카메라 4대를 샀다...
  • 2018-04-20
  • -10여년간 불우이웃에 따뜻한 애심손길 보내준 김선희씨 이야기 휴빈스의 애심천사 “영채꽃”은 누구? “불우이웃을 돕는데 전혀 사심이 없고 항상 앞장선다” 는 짤막한 기사제보를 보내준 사람은 화룡시 팔가자진에서 옹기된장기업을 운영하고있는 장청옥, 김경남씨 부부였다. 함께 애심활동을...
  • 2018-04-16
  • 연변주봉체육양성쎈터 양매 외지에 오래 있다 보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창업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줄곧 외지에서 사업했던 연길시주봉체육양성쎈터 교장 양매(43세)도 그중 한 사람이다.   “창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줄곧 장춘, 심양 등지에서 기업관리에 종사했습니다. 외지에 나간 시간이...
  • 2018-04-13
  •     광둥 후이저우에 조선족 노인협회가 탄생되기까지   (흑룡강신문=하얼빈) 자녀따라 광둥에 진출한 노인들은 악착같이 버텼다. 적응기는 빡셌고 슬펐다.   친구도, 말 동무도 없었던 노인들은 정착 과정에서 문화적응, 언어장벽, 여가생활의 부족, 병원 등 사회 공공 기관  사용의 불편은...
  • 2018-04-11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 ◈김철우(위해) 40여년전 유치원 문예공연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중간 필자) 오늘 나는 책상서랍을 뒤지다 우연히 흑백사진 한장을 땅에 떨구었다. 허리를 굽혀 손에 쥐여들고 보다가 나는 세월 속에 깊숙이 묻힌 추억의 바다 속에 저도 몰래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 2018-04-11
  • 일본에 온 지가 어느덧 18년이 돼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두번이나 변할 정도의 기나긴 세월이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다. 일본은 나에게 희망도, 행복도, 저주도, 슬픔도 배워준 희로애락의 인생교과서이다 . 나는 처음부터 그 어떤 웅대한 포부나 꿈을 가지고 일본류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
  • 2018-04-10
  • 5일 새벽, 깊은 산속에서 54년간 묵묵히 렬사기념비를 지켜온 리은기 로인이 지팡이를 짚고 오솔길을 따라 마을에서 그닥 멀지 않은 산속을 향해 걷는다. 길의 저 끝에는 혁명렬사기념비 하나가 조용히 서있었다. 기념비에 도착한 로인은 손으로 기념비 우에 앉은 먼지를 살살 닦아내고는 기념비 앞에 두 발 모아 바로 선 ...
  • 2018-04-09
  • 일본전통씨름대회인 오오즈모 현장 지난 4월 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 (舞鶴) 시에서 있은 봄철 오오즈모(大相撲:일본전통씨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던 시장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다. 긴급한 상황에서 관객석에 있었던 두 녀성(간호사)이 도효(土俵:경기장)에 올라 구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잇따라 다른 두명...
  • 2018-04-09
  • [편집자의 말] 을 펴내면서 북경 등 전국 각지 네티즌들 뿐만 아닌 한국 네티즌까지 아낌없는 고무격려와 응원의 박수에 감사를 드린다. 에서는 서로 떨어져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그리움, 원망으로부터 서로 리해해주고 서로 응원해주는 가족사랑을 담은 내용이였다면 (3)에서는 부모와 자식간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가면서...
  • 2018-04-08
  •    든든한 "무송서기"로 불리우는 룡정시 석문촌 김무승 제1서기   (흑룡강신문=하얼빈)류설화 렴청화 연변특파원= "우리 무송서기한테 토닭알하고 된장을 좀 줘야겠는데, 우리 아바이는 매일 저녁만 되면 날이 추워져서 무송서기가 잠을 못잘가봐 '우리 집으로 데려올까'하고 물어보오. 어디 그뿐이오...
  • 2018-03-2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 ◈김삼철(룡정) 당년의 ‘땅소나기’ 김병인로인(84세). 당시 조선에 사는 한 친척 화가가 놀러 왔다가 그렸다고 함.
  • 2018-03-29
‹처음  이전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