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3)
◆렴창응(유작)
테니스장에서 만년의 박달인생을 수놓던 렴창응 옹
1948년 3월 15일 룡정 련합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 돌아와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5.1, 5.4절을 맞으면서 전 현 사회 축구경기를 하게 되였다. 학교 축구대 대원이였던 최증석이 조양구 물레거우(덕신골)에 있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야 박달아, 네가 없는 사이에 우리 학교 축구대원들을 모두 천도구(영국덕)에 데려다가 집중훈련을 하고 있는데 빨리 가자.”라고 졸랐다. 나는 축구경기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이는 듯하여 당장 축구화, 스타킹, 대바 등을 가방에 주어넣고는 천도구로 달려가서 열심히 훈련하였다.
그 때에 나는 교내는 물론 사회에서도 ‘박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뽈을 잘 찼다. 축구경기에서 흔히 있는 몸싸움에서도 절대로 넘어지거나 밀리는 일이 없이 대방을 쓸어눕혔으니 ‘박달’이란 별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번 사회경기에서도 우리 천도구 축구대는 최종 결승전을 거쳐서 당연 우승기를 따내였다.
우리들이 수도물가에서 한창 몸을 씻는데 박규창(후에 연변대학 교장으로 부임) 교장선생님이 오셔서 이름 대신 “야, 박달아! 나는 오늘 큰 망신을 당했다. 이리 큰 학교가 인민중학교 B팀에게 졌는데 이게 그래 망신이 아니냐?”고 하시면서 “네가 다시 학교에 들어와서 축구대를 조직하면 안 되겠니?”라고 하였다. 나는 가정생활이 곤난하여 농사질을 해야 한다고 여쭈었다. 박교장선생님은 “그럼, 농사일이 바쁠 때면 집에 돌아가서 일하고 덜 바쁘거나 축구경기가 있을 때만 훈련하면 안되겠니?”라고 간청하시였다. 워낙 축구라면 쌍심지 불을 켜들고 쫓아다니던 놈이라 인차 수긍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는 고중 1학년에 편입되였다. 나는 원래의 선수들을 전부 불러들인 외 화룡중학교의 선수였던 김룡호, 리로한, 서성중학교의 허동진, 연길 공업학교의 리봉춘 등 선수들을 불러들여 새롭게 룡정중학교 축구대를 무었다.
지도로는 대성중학교 졸업생인 강성철, 동흥중학교 졸업생인 박로석(후에 연대 체육교원으로 되였음), 연길현체육회 마금춘(50, 60년대 전국 1급 축구심판원이였음) 등 분들을 모셔다가 매일 고된 훈련을 견지하였다.
주로 오전에는 예비운동을 한 다음 모아산으로 달려갔다 돌아온 다음에도 운동장을 열고패 달리고 나서야 기전술 훈련을 시작하였다. 오후에는 주로 게임을 치렀다. 하기에 실전에서의 운동기교와 위치선정 및 패스와 슛 면에서 전에 없던 진보를 가져왔다. 특히 체력면에서도 두시간의 경기를 대비한 고된 훈련을 하였기에 90분을 뛰여도 꿈쩍하지 않았고 경기도중에 선수교체란(상병 외) 기본상 없이 경기 초반이나 후반이나 매일반이였다.
1948년 가을경, 전 연변대회를 도문에서 개최하였다. 중학교대는 룡정중학, 인민중학, 도문중학, 이 세 팀 뿐이여서 사회청년팀들과 혼합 도태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제비뽑기로 경기상대를 결정하였는데 우리는 첫 경기에 도문시팀, 다음경기로는 도문철도팀, 그 다음 경기로는 조양구팀이였다. 이 3개 팀을 련속 이겨야만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중학교팀이지만 사회경기에 참가하기에 위만주국 선수권 획득자였던 장두렬선생까지 합세하니 두려울 것이 없게 되였다. 우리는 나젊은 패기와 정신력 및 튼실한 체력을 바탕으로 치렬하고도 우세한 경기로 도문시팀, 도문철로팀, 조양천팀을 가볍게 이겼다.
결승팀 상대로는 1947년도 우승팀인 안도현팀였다. 우리 팀은 경기가 시작되여 5분도 안되는 사이에 선제꼴을 넣었다. 그러나 상대팀은 만만치 않았으며 치렬한 공방전과 각축전을 벌리면서 더는 득점 없이 버티다가 그만 전반전이 거의 끝날 무렵, 안도팀에서 무작정 변선에 차버린 공이 5-6급바람에 날려 도로 우리측 문전에 날아왔다. 우측 수비였던 장두렬선생님이 막느라고 발을 들었는데 바람 때문에 그만 발끝에 맞아서 자기 꼴문으로 말려들어갔다. 이렇게 자책꼴을 먹자 같이 전반전은 끝났다.
중간휴식시간에 우리는 한결같이 후반경기가 시작되자같이 5분 내에 건곤일척(乾坤一掷)으로 꼴을 넣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지금은 광천수를 마시지만 그 때에는 생닭알을 몇개씩 먹고는 기운차게 뽈을 찼다.
드디여 후반전이 시작되였다. 11명 선수가 한결같이 선생님과 견여반석인 이 ‘박달’의 두리에 똘똘 뭉쳐 정신을 바싹 차리고 림하였기에 약속 대로 5분 전에 득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경기가 결속될 때까지 압도적인 축구를 벌리면서 최종 2대1로 우승팀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전 연변 사회경기에서 우승은 하였어도 학교에서는 대회경비가 없어서 학교문예공연대를 동원하여 극장을 빌어서 낮에는 응원하고 밤에는 공연하여 번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으니 얼마나 각골했으랴! 하기에 점심에는 국수 두그릇도 아니고 한그릇씩만 먹고는 그 날 오후 장도선 렬차로 귀로에 올랐다.
저녁밥을 거른데다가 조양천역에서 기다리려니 배고파서 죽겠다고들 아우성질이여서 별수없이 학교에 전화로 상황을 알렸다. 빨리 밥을 해오라는 급보를 받은 학교에서는 축구공신들이 굶어서야 되겠냐며 몇몇 선생님들 집에서 밥을 지어 주먹밥을 해가지고 왔다. 어쩌면 그리도 맛있던지! 우리들은 게눈 감추듯 먹고 나니 살 것만 같았다.
어언 룡정역에 이르렀더니 이게 웬 일인가? 싸움판에서 승전한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경관을 방불케 하다니! 연변가무단악대(출장길이였음)의 성수난 환영속에 우리들은 감동되여 눈시울을 적시면서 서서히 차에서 내려 대렬을 지었다. 맨 앞에서는 가무단악대가 우렁차고도 경쾌하게 북을 치고 주악을 울리였고 그 뒤에 선 우리 선수들은 우승기를 높이 추켜들고 우렁찬 노래와 승리의 함성을 목놓아 웨치면서 시내 유행을 하였다.
그 때의 그 감정은 지금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백골난망이다. 우리 대원들 뒤에는 중소학교 학생들과 중학생 가족들이 큰 경사를 치르듯 뒤따르고 길 량켠에는 나래나 돋친듯 ‘룡정중학 축구팀이 연변일등을 했다’는 귀소문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이 환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하던 그 모습과 정경은 우리 민족 축구의 매력과 함께 영원한 추억으로 내 머리에 각인되여있다!
그 이튿날에는 비록 우승하지는 못했어도 연길현 축구팀이라는데서 우리들을 초청하고는 현 지도자 분들과 관중들이 보는 데서 표현경기를 펼쳤으며 점심에는 음식점에서 난생처음으로 푸짐한 초대를 받았다. 저녁에는 학교에서 답례로 현축구대를 초청하겠는데는 돈 한푼 없어서 박규찬 교장선생님이 양복 한벌을 시장에 내다 판 돈 80만원(당시 화페)으로 현축구팀과 우리 운동선수들을 초대하였다.
오늘 돌이켜보노라니 이렇듯 박규찬 교장선생님이 학교 축구를 지극정성으로 관심하고 보듬은 것은 결코 그 분만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축구사랑에 대한 심성임을 보아낼 수 있었다. 하기에 우리 민족은 축구를 뿌리 깊은 문화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망국노의 설음 속에서도 민족단합의 장으로, 건재함을 과시하는 장으로, 마음의 안식처로, 자존심으로 전하여 내려온 우리 민족의 둘도 없는 ‘명함장’이리라!
2017년 3월 5일
(연길시테니스협회 80세이상조의 조장이였던 렴창응로인(박달)은 지난 4월 11일, 심장병으로 91세를 일기로 사망.)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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