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7)
◇리종석(영길)
필자 리종석 부부 |
50여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수술자리를 볼 때면 수술 당시 장면들이 어제런듯 영화필림처럼 눈앞에 환히 떠오른다.
그 날은 출근중이였는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해지면서 아래배가 터질 것 같이 아프고 소변도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사정없이 아팠던지 참을 수가 없어 바닥을 기여다니도록 고통이 심했다. 너무도 급해서 구급차에 실려 큰 병원으로 떠났다.
고생하면서 몇시간을 들추며 시병원에 도착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의사들의 진단이 흐리멍텅하고 어물어물하는 것이 얼마나 눈에 거슬리고 의아쩍은지 당장 군병원을 다시 선택해 옮기고 말았다.
현역군인이 아니고 일반평민은 입원하기가 어려운 곳이였는데 다행히 사정을 해서 입원을 할 수 있었다.
세밀한 검사를 거친 결과 콩팥 속에 생긴 돌이 약기운으로 빠져나오다가 좁은 수뇨관에 걸려 막혀버렸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오줌이 제대로 뻐져나오지 못해 콩팥이 퉁퉁 불어나 사태가 엄중한 상황이였다. 병원에는 마침 잘 왔는데 빨리 손을 써야지 만약 불어난 콩팥이 감당 못하고 터지게 되면 일이 크게 되여 생명에까지 위협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 수술을 해야 했다.
그런데 대단한 큰 수술은 아니지만 반드시 병자가족이 서명을 하고 도장을 보증서에 찍어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였다. 급히 오는 데다 집에는 병으로 몸이 불편한 년로한 어머니에 세살짜리 딸애와 학교에 다니는 아들애 오누이가 있어 집사람이 없이는 밥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다 석탄에 황토를 섞어 반죽을 해서 불을 때는 부엌이라 불을 한번 살리려 해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런 형편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집사람이여서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은 늦출 수 없고 해서 별 수 없이 담당의사와 상의를 해서 수술받는 병자 자신이 서명을 하도록 했는데 이것도 병원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술받고 깨여나서 보니 나는 페니실린에 다른 여러가지 약을 섞어 배합한 점적주사를 맞으며 생기는 오줌을 제때에 배출시키기 위해 따로 인류(引流)관까지 달고 있었다.
사흘 동안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겨우 움직일 만해서 살살 일어나 한발자욱 한발자욱 조심히 앞으로 내디디며 걸어 화장실에 갔다 돌아와서는 침대에 눕지 않고 창가로 가서 기대여서서 병원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은 청청히 맑게 개인 화창한 좋은 날씨였다.
내가 있는 병실은 병원 앞채 건물이기에 앞이 탁 트인 데다 3층이여서 병원 앞 큰길과 병원 마당이 훤히 내다보였고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들마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수술자리가 아물지 않아 각별히 조심해야 했고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몹시 아프고 불편했지만 나는 공연히 행여나 하는 미련이 생겨 창가로 갔던 것이다. 수술했다고 집에 알리지도 않아 집에서는 모르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해도 올 수 없는 형편이란 것을 번연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 땐 집사람이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참 사람의 감정이란 이렇게 이상하고도 이상한 것이였다.
내가 있는 환자실은 수술환자의 가족들이 끊일 새 없이 오고 가고 했지만 유독 나만은 례외였다. 한번은 주치의사가 나보고 집에서 수술한 것을 모르느냐고 묻기에 나는 알리지 않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안다고 해도 집을 떠나올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은 그렇게 잘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남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병원의 밥은 왜 그렇게도 씹어넘기기가 어려웠던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하였고 한숟가락도 뜨기 싫을 때는 옆침대 환자 가족에게 몽땅 넘겨주고 마는 일이 한번 두 번이 아니였다.
하루는 50세 가량 되여보이는 군관 내외가 아들 보러 오면서 잉어를 먹음직하게 해가지고 왔다. 아들은 그것을 기갈이라도 들었던 것처럼 얼마나 맛있게 잘도 먹는지 옆에서 할 일 없이 구경하던 내가 단번에 먹고 싶은 생각이 솟구쳐 구미가 확 당기였다. 그래서 당장 병원 호리원에게 부탁해 물고기 통졸임 한병을 사왔다. 뚜껑을 확 열어제끼고 나도 한번 맛있게 먹어보자 하고 먹기 시작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겨우 두어점 먹었을가 말가 하고는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뚜껑을 도로 꼭 닫아서 두었는데 하루밤 새 그만 변해버려 아깝지만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이틀 후 같은 조선족 환자의 안해가 남편 병문안을 오면서 무슨 절편이요 시루떡이요 찰떡이요 해서 여러가지 먹을 것을 정성들여 많이도 해왔다. 같은 조선족이라고 그들이 챙겨주는 떡들을 받아서 나는 정말 꿀맛처럼 맛있게 게 눈 감추듯 먹어버렸다. 그토록 식욕이 없던 사람 같지 않게 말이다. 한편으론 우리 집사람도 저렇게 좀 만들어오면 나도 얻어먹지만 말고 나누어먹을 것인데 하다가 생각지 말자, 오지도 못할 사람을 애타게 기다린다 해도 쓸데 없는 일이고 어리석은 노릇이며 오지 못하는 집사람인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애가 타서 재가 된 마음으로 잠인들 옳게 자겠는가 하면서 또 한편 행여나 병원을 찾아왔다가 나를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가 하고 걱정을 했다.
이렇게 지내던 하루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녀성이 병원마당에 들어서는데 키나 걸음걸이나 생김새가 틀림 없는 우리 집사람이였다.
“여보, 나 여기 있소.”
얼마나 반가왔던지 소리 치고 떠들어서는 안되는 병실이란 것도 까맣게 잊고 고함쳐 불렸다. 그랬더니 그 녀자도 고개를 들어 한참을 올려다보고는 말없이 히죽이 웃으며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였다.
그만 헛눈에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큰 실수를 하고는 환자들 보기에 얼마나 창피스럽고 무안했던지 몸 둘 바를 몰랐다.
몇달 되는 오랜 시간은 아니였지만 하루를 여삼추 같이 여기며 지루히 무료하게 보내다가 드디여 퇴원을 하게 되였다.
나는 병도 고치고 기쁜 마음으로 걱정하고 계시던 년로한 어머니를 만나고 귀여운 아이들도 반갑게 만났다. 그 심정은 마치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며 개선가를 부르는 장군과도 같았다. 다른 말은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해서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 안해였지만 속으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얼마나 더 반가웠겠는가. 그래서 안해는 정성을 다해 뼈에 살가죽만 붙어 나무꼬챙이 같이 빼빼 마른 남편을 보신해주느라고 출근을 하면서도 정신없이 설치였다.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도록 푹 고은 메기국이며 돼지발쪽이며 좋다는 것은 빠짐없이 아끼지 않고 알뜰히 챙겨서 보살펴준 덕분에 나는 빠르게도 건강이 몰라보게 회복되였다. 이것이 바로 부부이고 이 어찌 고마운 안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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