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고향떡집” 녀주인 “아몽”의 꽃꿈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2월1일 14시52분    조회:91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떡 만들기 “달인”급에 상당한 그녀가 왜 이곳 연변을 찾아왔을가.

연변이모한테서 물려받은 "고향떡집"

타향살이에 힘들고 지칠 때면 어련히 생각나는 것이 고향이다. 그녀는 워낙 화룡시 서성진 북고성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연변태생이였다. 스무두살 꽃나이에 금의환향을 꿈꾸며 또래들과 함께 대도시 광주로 향하는 그때 그녀는 아예 ‘김련화’라는 자신의 이름마저 “김몽”(金梦)으로 고쳤다.

꿈이 아무리 야무지더라도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 없이 타향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몇년이 지나면서 또래들은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들 왔으나 그녀는 당지의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총각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아이가 두살 나는 해인 2001년에 그녀는 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작은 스낵음식점을 차렸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돌아치는 스낵점 일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친분이 있는 ‘연변이모’한분이 자기가 하던 "고향떡집"을 물려주었다. “광주에는 한국인들도 많고 조선족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떡집을 하면 성공할거다.” 연변이모는 이틀간 떡 만드는 기본기술을 가르치고는 사정이 있어 연변으로 돌아갔다.

정작 떡집을 차리고 보니 스낵점 일보다 배로 힘들고 어려웠다. 허나 떡은 광주지역에서 누구나 손 댈 수 있는 품목이 아니고 또 떡을 요구하는 손님들은 각별한 기대를 안고 매장을 찾는지라 웬지 계속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모찌떡 있어요?” “모찌떡이 없는데요? 그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없으면 없다 모르면 모른다면서 애써 해보려 하는 그녀에게 고객들은 떡 만드는 방법도 사심없이 알려주었다. 강한 호기심을 앞세우고 감히 도전해 나서며 그녀는 고객들의 수요에 따라 각종 떡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떡 한그릇 들고 30리 길을 다녀오며 고객 평가에 귀 기울리고 고객들의 수요에 따라 이름 모를 떡도 절로 떡명을 지어내면서 찰떡, 시루떡만도 수십가지나 개발해냈다.

“제가 만든 쑥시루떡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거든요. 한가마에다 백여근씩 단번에 쪄낼 수 있는데요. 저는 손으로 한층한층 말아가며 꺼냅니다. 이런 방법은 아마 저밖에 모를거예요.”

남방에서 북방에다 농사기지를 두고

그맘때쯤 광주에는 한국인 떡집이 수풀처럼 일떠서면서 가격경쟁이 일었다. 모든 떡 값을 꼭 1원씩만 떨구어 파는 가게 쪽으로 갑자기 손님들이 쏠려갔다. 그녀는 위기 앞에 랭정하게 사색하면서 자신의 우세를 떠올렸다. 언어우세로 고객들과의 소통이 좋고 일군관리가 안정된데다 떡의 질만 더 높여간다면 승산이 있었다. 그녀는 가격경쟁에 휘말리기보다 떡의 질 제고에 모지름을 썼다.

지역에 따라 쌀 성능에 구별이 있고 또 광주지역은 더운 곳이라 쌀을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해 길림지역에 농사기지를 따로 세웠다. 모든 알곡은 겉곡으로 두었다가 본인이 요구하는 시간대에 바로바로 정미를 하여 보내주도록 한 것이다. 하여 그녀의 떡맛은 질적으로 달랐다. 떠났던 고객들이 다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특히 ‘고향떡집’떡볶이, 가래떡은 광동이며 주강3각주, 절강, 강소일대 남부지역에 널리 알려져 반성품으로 대량 팔려나갔다.

하지만 곡경은 곡경대로 따로 겪어야 했다. 떡집을 차려 1년만에 백설기로 떡케익을 하고싶은 의욕이 생겨났다. 백설기를 가마에 찌어 그 우에 사탕도 놓고 과일도 얹고 인물캐릭터도 만들어 올리면서 시장판로를 열어가는데 광주의 한 유명 호텔에서 대형떡케익을 주문해왔다.

주문시간은 빠듯이 다가오고 가마에서 갓 쪄낸 백설기는 채 식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며 백설기 우에 사탕이랑 잔뜩 얹어 예쁜 장식을 마치고 배달했다. 그런데 사탕이 녹아내리면서 떡케익이 마구 범벅이 되는 바람에 호텔측으로부터 눈이 빠지도록 욕을 얻어 먹게 되였다.

그뒤로 감히 떡케익에 손을 대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탈이 없고 안전하며 건강하고 이쁜 꽃떡을 개발하려는 구상을 그냥 무르익혀갔다. “떡을 하라고 그랬는지 뜻밖으로 남편이 꽃떡 빚는 재간도 있었고 부탁하는 대로 떡도구들도 뚝딱뚝딱 잘 만들어주었어요. 하여 우리 집 떡케익에는 10년전부터 무색소 천연식재료로 된 고무마 장미꽃도 올랐고 노란 호박꽃도 올랐으며 다종다양한 떡케익이 광주에서 판을 쳤어요. 떡맛이 월등한데다 떡케익을 급랭동하여 신선도를 보장하면서 원근에 지체없이 배달하다보니 한국인들도 우리 집 떡을 사들고 귀국방문을 하게 된거지요.”

아버지의 명언- '물어뜯어서라도 이겨라'

그러던 언젠가는 “고향떡집”에서 떡을 안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분명 누군가의 시기에 찬 비루한 작간이였다. 별로 위챗도 들여다볼새 없었던 그녀는 일부러 “아몽”(雅梦)이라는 멋진 위챗명으로 그럴듯한 채색떡광고까지 굉장히 올리면서 나쁜 소문을 터뜨린 자를 검거해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거짓 소문임이 간파되자 "엄마"들은 더욱 한마음이 되여 "아몽"의 꽃떡을 아껴주었다.

“어찌보면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한걸음 한걸음씩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노라면 화룡현 서성진 수의소 소장을 지낸적 있는 우리 아버지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딸만 셋이였던 아버지는 아들 없는 허수함에 술 한잔 하시고는 우리 자매들에게 늘‘물어 뜯어서라도 이겨라’고 당부를 하셨거든요.” 이미 고인된 아버지를 그리는 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지금쯤 부모님들이 살아계신다면 뉘집 아들 못지 않게 “성공”한 딸을 앞에 두고 얼마나 기뻐하실가. 지금 그녀의 년간 떡생산량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고향떡집”은 명실공히 강남의 떡공급기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동안의 노력은 다만 물량을 늘이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허구프게 웃는다.

“한달간 ‘궁중떡향기’공방에 머물면서 리향단 원장의 지성어린 가르침에 따라 옛날 황제의 음식상에 올렸다는 두텁떡도 만들고 로할머니가 저의 생일이면 정성껏 빚어주던 수수경단도 만들고 다과공예도 잘 익히면서 책에서나 보아오던 떡공예를 실전으로 배우고 나니 바랄 것이 더 없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굽은 길을 적게 걷게 한다’는 말의 참뜻을 알 것 같습니다."

기실 연변행을 하기 전 그녀는 매일과 같이 반복되는 힘든 일상에 권태감을 느꼈고 비전이 없는 떡 만들기를 당장 손에서 놓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번씩 일었다고 한다.

"가장 필요한 때에 스승님을 만나 우리 떡의 문화가치를 알게 되고 떡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특히 스승님의 손끝에서 탄생되는 예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앙금플라워 꽃떡 작품을 흠상하면서 여태껏 17년이란 세월동안 물량을 늘이기 위해 아글타글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새롭게 우리 민족 문화를 전파하고 우리 민족을 알리는 강남의 '꽃떡왕'으로 거듭나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아몽(雅梦), 그녀는 새로운 꽃꿈을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지난 8월 23일 오전, 북경에 자리 잡고 있는 랑시주식유한회사(동사장 신동일)가 오상 조선족 수재민들에게 100만원 물자를 기증했다. 이날 수재물자 기증식은 오상시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렸는데 랑시주식유한회사 신동억 가족대표와 신동철 동사장조리 등 4명이 신동일 동사장의 위탁을 받고 오상시에 와서 수재물자를 기증...
  • 2023-08-24
  • 5월 13일 아침 일찍 짐을 챙겼다. 두 밤을 지내며 홀랑 마음을 앗아간 보금자리를 떠나기 아쉬웠다. 하지만 더 좋은 호텔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볍게 문지방을 넘을 수 있었으니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우리가 투숙한 두번째 호텔의 이름은 림바란포레스트리조트(金巴兰森林度假酒店)이다. 발리는 이름이 길수록 호텔...
  • 2023-06-01
  • 아버지의 배웅 허향순   12년전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낼 때 아버지는 너무나 억이 막혀 아무런 말씀도 못하고 그저 내내 손만 저으셨다. 나는 그 외롭고 허무한 손짓에서 슬픔과 아픔을 읽었다. 그 해 아버지는 81세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고독을 견디...
  • 2023-03-20
  •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2022 총화대회 및 3.8절 행사 성황    이른 봄 피여나는 진래의 성미는 부지런한 연변녀성 우리들을 닮았다네 만산위의 허물 덮고 아름답게 피는 꽃 똘똘뭉쳐 피여난 진달래의 그 모습 나라 발전 민족 부흥 나눔 실천 앞장서는  거기가 어디냐 연변녀성발전촉진회&he...
  • 2023-03-06
  • 곰과 인연을 맺은 네 아이 엄마 최미화 '녀자'와 '곰', 두 단어는 원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한데 네 아이를 둔 가냘픈 엄마가 육중한 곰 45마리를 거느린다고 하면 더욱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그저 나온 말이 아니였음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저 한다. &...
  • 2023-01-08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기념 기획보도   2008년 북경올림픽 대학생 지원자로 근무하면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함께 대학생 지원자로 근무하는 조선족 총각을 만나서 사랑을 속삭일 때까지만 해도 저는 조선족 그리고 연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013년 봄에 그 총각을 따라 예비 시부모님을 뵈러...
  • 2022-08-29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기념 특별기획 박철원 선생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60돐을 경축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세월이 빨리도 흘러 어느덧 자치주성립70돐을 곧 맞이하게 되였다. 어언 10년세월이 흘렀어도 자치주성립60돐 경축행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로인 선전 봉사자'로 뛰여다니던 자랑과 긍지는 줄곧 내 ...
  • 2022-08-16
  • 다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황재형, 한수남 로부부가 청화대학생 둘을 양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상해의 조선족 응시생 김군림 학생이 상해시 3위의 우수한 성적으로 청화대학에 입학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김군림  학생은 어려서부터 자률적인 학습습관을 양성해왔고 품행도 단정하며 피아노 ...
  • 2022-08-11
  • 편집자의 말: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돐을 맞으면서 본사 편집부에서는‘나와 연변’타이틀의 기획보도를 륙속 펴내게 된다. 외부 시각에서 바라본 백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연변의 이모저모를 조명해보고 아름다운 연변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한다. /길림신문사 편집부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
  • 2022-07-25
  • 나에게는 누나가 없다. 그래서 청년시절까지는 누나가 있는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누나가 있으면 상냥하면서 부드러운 누나 사랑을 한껏 느끼면서 관심도 듬뿍 받고 응석을 부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팔자에도 없는 ‘누나타령’을 하면서 아무나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
  • 2022-07-24
  • 며칠전 동생이 이쁜 장갑을 끼고 엄마집에 왔다. 엄마는 그 장갑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 오른손에 껴보시는 것이였다.    “엄마, 욕심나시면 끼세요. 수박색이여서 환하지도 않아 엄마 얼마든지 낄 수 있어요”   동생의 말에 엄마가 급히 거절하셨다. “내가 이런 장갑 어떻게 낀다고 그...
  • 2022-07-20
  • 고희를 넘긴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 서면서 나는 자꾸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 보게 된다. 이중에서도 소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나의 꿈을 펼쳐주고 지식의 낟가리를 쌓아 주었으며 더우기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1954년 7월 나는 길림성 왕청현 동광진 동림소학교에 입...
  • 2022-07-14
  • 베네치아 려행을 끝내자마자 뻐스에 올랐는데 밤이 썩 깊어서야 로마에 도착했다. 이튿날,날씨부터 체크했다. 온도도 적당하고 해빛도 좋고 바람도 맞춤하고 게다가 도보려행이라니 얼씨구 신났다. 로마 일각 그런데 희한하게도 로마려행은 다른 나라 바티칸시국(梵蒂冈)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로마시내에 박힌 자그마한...
  • 2022-06-18
  • 5월 20일 이른 아침 독일 퓌센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꽤 먼길을 달려 이딸리아 베네치아(威尼斯)에 도착했다. 수상도시 베네치아 (水城 威尼斯) 국내 일반인들이 알고있는 베네치아는 그저 물우에 떠있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도시지만 연극인들에게는 좀 더 특별하고 신성한 도시로 다가온다. 그것은 베네치아가 세계적 ...
  • 2022-06-07
  •   작자 최청숙 우리 동네 삼꽃거리는 나에게 깊은 추억이 있는 거리입니다. 주덕해, 전인영, 요흔 등 분들이 살던 동네이고요 . 어린 시절 청년늪을 만드느라 땅을 파고 부르하통하의 물을 끌어올리는 것도 봤고요. 홍수에 제방뚝이 무너져 삼꽃거리가 강이 되여 파도 치던 일, 그래서 울 동네에서는 보따리...
  • 2022-06-05
  • 6년 전 이맘 때인 2016년 5월 19일 아침이였다. 독일 려행 준비를 마치고 스위스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역시 인간은 군거(群居)동물임이 틀림없다. 련 며칠 동행하면서 친절해진 동행들, 따뜻한 인사를 나누는 아침 얼굴이 화사하다. 버스 안, 처음과는 조금 달라져 간다. 여기저기 새 친구들 끼리끼리의 다...
  • 2022-06-05
  • 세계에서 제일 좋은 시계를 만드는 나라로만 알고 있던 스위스, 려행을 앞두고 지리 위치와 투어코스를 찾아봤다. 부유하고 평화롭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인심까지 넉넉하다는 스위스, 우리의 려행지는 루체른이란 작은 도시지만 본국 인들도 밀월을 즐길 때 자주 찾는 곳으로서 밀월마을 (蜜月小镇)이라는 별칭...
  • 2022-06-02
  • 나의 아버지는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2살, 삼촌은 7살, 고모가 3살로 한창 어머니품에서 응석 부릴 때였다. 개구쟁이로 뒹굴며 놀음에 빠질 나이였지만 아버지는 여념없이 밭일을 해야 했고 가무일까지 도와야 했다. 아버지는 손재간도 많았고 일솜씨도 좋았다. ...
  • 2022-06-02
  • 한국생활 체험기   동북지역의 편벽한 조선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해온지 28년이 된다. 90년대초부터 한국열이 불면서 나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전문 한국드라마, 뉴스를 시청하였다. 한국인 못지않게 드라마내용도 줄줄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취업비자 h-2를 따낸지 3년이 되였지...
  • 2022-05-26
  • 80고개에 들어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화려하고 가슴이 부풀며 랑만적으로 보낸 시절이 아마도 지난 세기 60년대 농촌에서 농업 생산로동에 참가하면서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소학교 3학년 때부터 맏형님이 사다주는 《조선아동》문학잡지를 열독하면서 글쓰기를 좋아했...
  • 2022-05-25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