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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생활수기5]일본시골에서 시작한 나의 일본생활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2월22일 14시40분    조회: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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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함께 한 윤화씨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은행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나한테 일본류학을 소개해준 것은 같은 은행을 퇴직하고 일본류학을 떠난 후배였다.

그 당시에는 류학신청에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모와 회사를 속이고 일본류학 신청을 시작했다.그런데 예산 못한 류학신청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이고 말았다.

부모들한테 일본류학을 신청한 사실을 털어놓으니 아버지는 완전히 반대하셨다. 남들 모두 들어가지 못해 안달아하는 멀쩡하고 좋은 직업 버리고 왜 이국타향에 가서 개고생하려고 하는지 리해할 수 없다면서 펄쩍 뛰시였다.

나도 두달 동안 여러가지로 고민 끝에 이 때까지 가장 멀게는 성도회지인 장춘 밖에 못 가본 자신이 외국땅을 한번 밟아보고 싶다는 단순한 리유로 일본류학을 결심했다. 회사에는 적을 남겨두고 부모님한테는 만약 일본에서 정 힘들면 부모님들이 대준 학비만 벌어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2000년 5월 28일 일본류학의 길에 나섰다.

대련에서 동경 직행 비행기를 타고 동경에 도착하니 사촌동생의 녀자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앞도 뒤도 모르는 나를 동경에서 신간센에 태워주었고 나는 저녁에 군마현 신간센역에 내리게 되였다.

학교가 역에서 가까울 거라고 나절로 판단한 나는 택시에 앉아 학교주소를 적은 봉투를 내보였다. 한 10분 정도이면 도착한다고 생각했는데 30분이 지나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도 모르는지라 물어볼 수도 없고 어둠컴컴한 밖을 한없이 내다보며 속을 졸이고 있는데 운전사가 미구하여 도착했다는 시늉을 하였다.

내리고 보니 캄캄한 건물 앞에 와있었고 문은 꽁꽁 잠겨져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어쩔바를 모르는 내가 안타까운지 택시운전사는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봉투에 전화번호가 있었다는 생각이 난 나는 운전사에게 손시늉을 하여 공공전화청을 소개받았다. 학교 전화는 받는 사람이 없었고 겨우 학교숙사 전화와 련결되였다. 학교숙사 중국친구의 중국말을 듣는 순간 북받치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택시는 그 친구가 알려준 대로 오불꼬불 산길을 돌아 반시간 정도 지나 숙사에 도착하였다.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불안했던 나는 숙소 앞에서 같은 중국친구를 보자 맥이 확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떠난 자신이 어리석었고 마지막까지 나를 태워준 택시운전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튿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바깥에 나선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주위에는 모두 올망졸망한 낮은 집들 밖에 없었다. 내가 갈망해오던 높은 층집이 쭉쭉 늘어선 대도시가 아닌 완전히 시골이였다. 학교숙사 또한 헐망한 아파트에 밥 하는 곳은 물론 화장실과 목욕실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였다.

서운한 마음이였지만 일본에 온 이상 버티여보려고 같은 조선족 녀자친구 넷이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일년 먼저 온 두 친구는 일자리가 있었고 금방 온 나와 한 친구는 매일 오전 학교가 끝나면 마을주위를 빙빙 돌거나 채소를 사서 저녁준비를 하였다. 넷이서 돈을 합쳐 숙소비를 내고 음식을 해먹야 하는 처지인데 둘 다 알바도 없는 처지인지라 빵이랑 아이스크림이랑 마음대로 사먹지도 못했다. 둘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던 적도 있었다.

매일 아침 학교뻐스가 학교숙소까지 와서 학생들을 태우고 학교에 간다. 후에 알고 보니 학교는 전차가 한시간에 한번 밖에 안 통하는 곳에 있었고 숙소 또한 시내에서 뻐스가 한시간에 한번 밖에 안 통하는 이름도「시라자와농촌」이라는 곳에 있었다 . 때문에 학교 친구들이 하는 알바는 농촌일 공장일이 많았다. 나도 처음으로 소개받은 알바가 농촌일이였다.

아침 4시에 일어나 농장 주인이 운전한 차로 산을 빙빙 타고 올라가 새벽에 세시간 일하고, 농장주인이 준 주먹밥을 먹으면서 차에 앉아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학교가 끝나면 또 농장 주인의 차로 산우에 올라가 일하군 하였다.

산을 빙빙 돌아서 올라갈 때면 언제나 차창문밖의 낭떠러지를 보면서 눈을 꼭 감고 제발 떨어지지 마세요… 하고 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부모님들에게 전화할 때는 근심할가봐 감히 농사일을 한다고 여쭈지 못하고 언제나 수월한 일을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윤화씨 가족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 「입쌀밥 먹으면서 벼가 어떻게 생긴 줄 모르는 친구야!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하게 살아라!」고 써준 친구한테 인젠 벼 뿐만 아니라 채소뿌리도 알 만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몇달 동안 견지하다가 귀도 열리고 나절로 일거리도 찾을 수 있게 되자 농촌일을 그만두게 되였다.

두번째 일은 우연하게 지나가다가 돼지밸로 정식하는 식당이 새로 오픈한 것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알바가 필요한가고 물어보았다. 늙은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였다. 시골이여서 시급은 적었지만 점심저녁식사를 포함해주니 식사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그러나 금방 오픈한 때문인지 손님이 적어서 월급을 제때제때 주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월급을 한달 이상 밀리우게 되자 친구들이 위험하다고 그만두라고 하였다. 결국 마지막 월급은 절반도 못 받고 나와버렸다.

세번째 일은 저절로 구인정보를 보고 전화한 공장이였다. 운이 좋게 사장면접도 보고 합격되였다. 공장 근처에 집도 맡고 핸드폰도 샀다.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도 소개하여 우리 학년 대여섯명이 같이 다니게 되였다 .

비록 시급은 적었지만 시골이이여서 그런지 같이 일하는 일본아줌마들이 자기 밭의 채소랑 과일을 원조해주어 생활비는 그나마 적게 들었다. 하지만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 한시부터 다섯시까지 하는 일이여서 한달 수입이 얼마 안되였다.

내가 시급이 적다고 하면 모두 리해를 잘 못하겠지만 우리 시골은 한시간에 700엔 정도 밖에 안되였다. 동경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시급900엔을 받았을 때 너무너무 흥분되였던 기억이 난다. 더 벌려고 하는 내 사정을 안 공장에서는 일거리를 저녁에 집에 가져가서 해도 된다고 건의해왔다. 나는 그 건의를 받고 집에서 저녁 12시까지 일하였다. 주로 차주위를 다스리는 연마솔을 만드는 일이여서 손은 점점 거칠거칠하게 되여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숨 넘어갈듯한 아픔에 움직일 수 없게 되였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에서 시집온 언니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 언니의 남편 차로 병원에 실려간 나는 요추간판돌출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선생님은 진통제와 허리띠를 주면서 한주일 휴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여 허리가 덜 아프게 되자 또 일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돈 꿔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돈이 너무 없는 것도 아니였는데 왜 제 몸을 아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일본어자격시험을 치러 처음으로 동경에 갔을 때 쭉쭉 늘어선 층집들을 보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완전히 시골이란 것을 느끼게 되였다. 특히 청력시험을 칠 때 시골에서 전차를 못 타본지라 전차의 아나운서가 하는 내용의 청력을 알아듣지 못해 애간장을 태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골을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에서 대학을 다녔으면 직접 일본의 대학원에 갈수 있다는 정보도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 무작정 동경 쪽의 대학교를 시험쳤다.

그 시골을 떠난 지도 이젠 16년, 지금 생각해보면 이곳은 일본에서의 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도 못해본 농촌일, 식당일, 공장일 가리지 않고 모두 해보고 고향에 돌아가려던 마음을 꾹 누르고 삭히면서 열심히 분투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중국에 있었더라면 지금 쯤 다른 여유로운 생할을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회사일, 가정일 바삐바삐 보내고 내 자신의 선택에 후회없이 앞만 보며 달리는 일본에서의 내 삶이 너무너무 충실한 것 같다.

/글 재일조선족류학생 윤화

/원고기획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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