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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82] 엄마 아빠가 되던 날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5월4일 00시00분    조회: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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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0)

▩김삼철(룡정)

1968년 11월 7일, 맏딸 홍화의 돌생일날에 남긴 기념사진

지금도 우리 부부가 처음 엄마 아빠로 되던 날을 생각하면 나는 기쁨보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처음 맞게 되는 큰애의 출생이 안해의 난산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줄을 누가 알았으랴. ‘엄마, 아빠’로 되는 이 영광은 정말 어렵고도 긴 힘든 려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얻게 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몸소 겪었다.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1967년 11월 7일이였다. 11월 7일은 ‘쏘련 10월혁명’ 승리의 기념일이다. 온 지구의 무산자들이 ‘쏘련 10월혁명’ 승리를 경축하는 나날에 우리 가정에서는 또 하나의 무산계급혁명 후계자의 출생으로 인한 폭발적 뉴스가 발생하였다.

아직 해산을 1주일 가량 앞둔 안해는 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 집이라야 학교 관사에서 살 때였다. 그 때 안해는 룡정현 광신향 광신촌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념려하여 부근에 살고 있는 맏아주머니를 모셔다 안해의 곁을 보게 하였다.

저녁 8 시가 되여 나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안해의 거동이 심상치 않았다. 양수가 터졌다. ‘해산징조다. 어찌한담?’ 나는 맏아주머니한테 준비를 부탁하고 손살같이 뛰여나가 부근에 있는 생산대 우사에서 고무바퀴 밀차를 빌어왔다. 그 때 그 시절에는 택시는 고사하고 손잡이 뜨락또르는 물론 집에 전화마저 없는 때라 고무바퀴 밀차가 제일 손쉽게 얻는 교통수단이였다. 나는 인차 안해와 맏아주머니를 밀차에 앉히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 “걸음아 날 살려라!” 룡정산원으로 줄달음쳤다.

룡정산원까지는 7리 잘되는 거리이다. 안해는 맏아주머니에게 안기워 제법 해산 신음을 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위기일발의 시각이라 온몸의 힘을 다해 앞만 향해 내달렸다.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비오듯 떨어지고 오금에서는 비파소리 날 지경이였다. 공로는 연길에서 룡정으로 통하는 국도여서 넓고도 괜찮았으나 여전히 모래흙길이라 울퉁불퉁하여 밀차는 이따금씩 퉁퉁 튀였다. 그럴 때마다 안해의 신음소리는 더욱 가냘팠다. 연변농학원 렬사비와 룡지채대를 지나 기차길을 넘어섰을 때 안해는 몹시 바쁜 소리를 내며 차를 세우라고 하였다. 해산이 시작되였던 것이다. 맏아주머니는 빨리 길옆 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제꺽 밀차를 돌려 가까운 길옆 집 마당으로 들어가 출입문을 두드렸다.

때는 밤 아홉시가 잘되여 집은 불이 꺼져있었다. 별안간 요란스레 두드리는 문소리에 전등이 켜지고 출입문이 열렸다. 나를 맞은 사람은 40대 아주머니였는데 매우 당황해하였다. 나는 렴치없이 통사정하였다. 산모가 산원으로 가는 도중에 지금 해산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 녀인은 “어서 산모를 집안으로 모시라”면서 정주칸에 향해 “모두들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가마에 물을 끓이라고 명령했다. 전투는 벌어졌다. 남편은 빤쯔바람에 옷을 주어들고 부엌으로 내려갔고 아이들은 벌거숭이로 쫓기워 방안으로 들어갔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제꺽 고무천으로 만든 조산용 보자기를 펴면서 나더러 산모를 빨리 이우에 눕히라고 하였다.

해산은 이미 시작되였다. 그런데 애 머리부터 나와야 할 해산이 다리부터 나오니 큰 문제였다 순산이 아니라 난산이였다. 그 집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방법을 찾는듯하였다. 가마에서 물 끓는 소리가 집안의 고요를 깨뜨리며 들려왔다. 그 집 아주머니는 결단을 내리듯 나를 보고 명령하였다. “지금 산모가 난산인데 문제가 있을 것 같으니 빨리 산원에 가서 의사를 모셔오라.”고 하였다. 나는 금방 풀어놓은 말새끼처럼 줄행랑을 놓았다.

머리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시간을 쟁취하여 빨리 의사를 모셔오겠는가는 생각 뿐이였다. 얼굴은 땀투성이고 옷은 온통 물자루가 되여가고 있었다. 날씨는 립동을 하루 앞둔 때라 꽤나 쌀쌀했지만 내 몸에서는 열기를 뿜어 김이 나고 있었다.

룡문교 굽인돌이에 도착할 무렵 길 서쪽에 있는 광신공소사 간판이 대문 등불에 비치여 한눈에 안겨왔다. 나는 피뜩 공소사 경비실에 전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기다리는 경비원은 나오지 않고 라지오방송소리만 높게 들려왔다. 나는 더 지체할 겨를이 없이 제꺽 공소사 담장을 뛰여넘었다. 담장을 뛰여넘고 보니 옷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갈래갈래 찢기여 꼴불견이였다. 담장 우에 설치한 가시 철망에 찢긴 것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걸 언제 살필 겨를이 없이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경비원은 펄쩍 놀라 라지오를 끄며 문을 열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경비원은 인차 전화기를 내 앞에 밀어주었다. 나는 재빨리 다이얄을 돌려 전화를 걸었다. 그 시절에는 고정전화기도 단위에만 있을 때이고 그것도 손잡이 다이얄을 돌려서 교환수를 통해 련결되는 전화였다. 다행히도 산원의 직일의사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인차 떠나겠으니 마중오라”고 하였다. 나는 경비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또 냅다 뛰였다.

내가 빨리 의사를 만나야 빨리 모셔올 수 있으니 내 행동의 빠르고 늦음에 안해와 어린애의 생명이 련계되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병원에 구급차는커녕 공용 자전거도 없을 때라 긴급시기에는 애로가 많았다. 내가 룡문교다리를 절반 가량 갔을 때 저 앞에서 하얀 위생복을 나붓기며 달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보였다. 산원의 의사였다. 나는 인차 의사의 왕진가방을 빼앗다 싶이 제꺽 받아메고 앞에서 뛰였다. 두 의사는 나를 뒤따르느라 숨이 턱에 닿아 헐떡였다. 오직 나에게는 안해와 어린애 두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드디여 집에 도착하였다.

그 기간 그 집 녀인은 과단한 조치와 방법을 취하여 산모의 해산을 기본상 순조롭게 끝낸 뒤였다. 산원에서 온 의사들은 그 집 녀인을 인차 알아보았다. 알고 보니 그 집 녀인은 그 근방에서 조산기술이 높은 소문난 산파(조산원)였다. 산원 의사들은 어린애와 산모를 검진하더니 인차 산모와 어린애를 산원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맏아아주머니는“오늘 저녁 저 산파가 아니였더라면 큰일 날 번했다”고 하면서 힘들었던 해산과정을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안해는 그 날 저녁 재간 있는 산파를 만났기에 해산이 순조로왔던 것이다. 산원 의사들은 난산위험에서 위기를 잘 넘긴 산파의 기술이 고명하다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하면서 그 집을 나섰다.

나는 산원 의사의 분부 대로 인차 산모와 어린애를 룡정시 산원으로 옮기여 산후조리를 하였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였다.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고 있었다. 따뜻한 산원의 침대우에 시름없이 누워있는 안해와 딸을 바라보며 나는 새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얻게 되는 ‘엄마 아빠’란 영광스런 칭호는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안해는 나를 보며 “당신이 오늘 저녁 대 수고를 했어요. 당신이 아니였더라면 나와 어린애는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예요.” 하며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아니, 나보다 당신이 몇십배 더 고생했소.”라고 하며 안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창밖을 보니 동녘하늘이 푸름히 밝아오고 있었다. 안해의 10달 임신과 하루저녁의 길고 긴 해산진통 끝에 얻게 되는 ‘엄마 아빠’란 칭호는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 후 우리는 몇년간 그 날 저녁 출생한 큰 딸 홍화를 데리고 가까운 친척 나들이마냥 그 산파네 집으로 자주 놀러 다니며 은공을 잊지 않았다.

딸 셋을 키운 우리 가정은 ‘엄마 아빠’란 소중한 이름 속에서 더없이 행복하였고 아이들도 건실하게 자라 나라의 훌륭한 일군으로 되였다. 그 날 저녁 출생한 큰딸 홍화는 지금 50세의 령마루에서 름름한 아들과 같이 새 며느리 영접준비에 바삐 보내고 있다.

매년 맏딸의 생일이면 형제와 친척들이 모여서 축하 피티를 여는데 그 때마다 길가 남의 집에서 출생하던 이야기를 하며 추억의 웃음판을 벌리군 한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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