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추모글]별찌는 짧은 순간이여도 밝게 빛난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5월21일 00시00분    조회:240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애심을 천직으로 간주하고 빛을 밝히다 생을 마감한 고 강철수씨를 추모하면서

《사람으로 세상에 태여나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부동하다.그러나 생명의 의의를 가늠하는 척도는 생명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불타는 족적으로 세상에 남긴 한 사람의 선행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가치관이다.

이 말의 의미는 애심으로 오로지 남을 돕는 것을 락으로 여기며 우리 주변을 빛내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강철수(康哲洙)씨의 아름다운 생을 기리는 추도사의 한 구절이다.

5월 18일,길림성 연길시장의관 추모광장에서는 불우이웃을 돕는 것을 자신의 천직으로 간직하고 삶을 빛내다가 영영 우리 곁을 떠난 후사모 회원 고 강철수씨의 추도식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1978년생인 강철수씨는 길림성 화룡시 숭선진 태생으로서 지난 5월 10일, 한국의 한 작업현장에서 크레인 작업을 하다가 의외의 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진 후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당일 39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고 강철수씨(오른쪽)가 생전에 후사모 리경호 초대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전달받고 있는 모습

이날 추도식에는 고 강철수씨의 가족, 지인 그리고 후사모(연변 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 회원들과 고 강철수씨 생전에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일부 인사들도 참석해 비통을 함께 하였다.

연변후사모 고문(초대회장) 리경호가 사회한 추도식에서 후사모 회장 김태국은 추도사를 통해 《고 강철수씨한테도 생전에 보통사람들이 누리는 아주 소박한 소망이 있었는데 바로 집 한채를 장만하고 사랑하는 녀자를 만나 장가 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였다》며 《그러나 열심히 일해 벌어들인 돈은 모아지다가도 누군가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전부 기부로 이어져 남는 것이 없었다”고 감동적인 사연을 털어놓았다.

강철수씨는 생활조건이 훌륭한 집안에서 태여나지 못했다.

세상물정를 알기 시작하면서 주위를 비교하고 자신은 남들과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고 강철수씨(가운데)가 생전에 두부방을 차리고 후사모 애심봉사 회원들과 함께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있는 집도 그에게는 사치였고 남들은 모두 건강한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렸지만 그에게는  자기 몸도 제대로 건사하기 어려운 장애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던것이다.

정부의 혜택으로 시골 양로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 가족의 현실이였고 그런 일상은 언제면 끝날지 모르는 밑도 끝도 없는 고단한 삶의 연속이였다.

경제난으로 어렵게 초중을 겨우 졸업하고 그는 1995년 영광스럽게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하여 대련 81379부대에 입대하게 되였다.

부대생활은 그에게 종래로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당과 정부,그리고 사회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굳센 의지와 열정을 다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였다.

부대에서 그는 우수전사로 퇀급 상장도 수차 받았고 참군 2년 만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99년 강철수씨는 3년간의 군부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집에 돌아온 후 얼마 안되여 그는 이제 더 이상 사회에 무거운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양로원에서 남편을 잃고 뇌출혈로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작정 빈손으로 연길로 왔다.

고 강철수씨(뒤줄 가운데)가 생전에 후사모 회원들과 함께 등산후 남긴 사진

세집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생존을 위해 날마다 그는 몸의 기운이 다 빠지도록 악착스레 일했고 그의 노력은 주위에서 찬사와 함께 따스한 도움의 손길로 찾아왔다.

운신을 못하는 어머니 목욕을 전담해주던 조양천아줌마, 늘 과일을 가져다주던 시장아줌마, 엄마가 좋아하는 순대를 대접하라고 가져온 마음씨 고운 순대아줌마, 늘 곱돌장을 끓여주던 70세 고령의 할머니와 김밥을 두둑하게 담아주시던 김밥아줌마,체력로동을 하는 사람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고기국을 자주 가져다주던 오주시장의 소고기국집 아줌마, 항상 뜨근한 아침상을 차려주던 주인집 아줌마, 그외에도 주변의 마음씨 고운 분들의 따스한 손길로 인해 그는 용기와 힘을 얻고 더욱 열심히 일했다.

항상 가난과 역경으로 남보다 못하고 부족함을 느끼며 살았지만 그는 꼭 하나만은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

가난했지만 그는 마음의 부자였다. 그것은 열심히 노력해 당과 정부,그리고 고마운 이웃들의 은혜와 은정에 보답하려는 착한 마음가짐과 굳센 의지의 표현이였다. 하루 또 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 한가운데 불우한 이웃을 도우려는 애심의 마음이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2002년부터 강철수와 동생 강철봉씨 형제는 연길서시장에서 삼륜차부로 힘들게 일하면서 매일 1원씩 매달 30원의 돈을 무명으로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들의 선행은 무려 10여년 넘게 꾸준히 이어졌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송금통지서를 단서로 고마운 주인공 강철수, 강철봉씨를 찾는 데 무려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때로부터 그의 사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였고 연변에서는 매일 1원씩 성금을 모아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후원하는 열풍이 일었다. 그 후 그의 기부는 쉼없이 이어졌다. 불우한 학생들을 지원하라고 후사모에 2만원(인민페),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시 연변부덕축구구락부에 만원, 백혈병을 앓는 김은정학생에게 5천원, 골수암으로 앓는 공원소학교 김가영학생에게도 만원, 사랑의 집에도 수천원 어치의 육류를 보냈고 화룡고아원에 한화 30만원,부모 없는 어린 손자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에게 5천원…수없이 보낸 기부는 이들에게 생의 용기와 힘이 되였다.

연변후사모 리경호 회장에 따르면 강철수는 생전에 몸이 어느 곳에 있든 상관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거나 혹시 후사모 위챗을 통해서 불우한 이웃들의 사연을 들으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무척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열심히 창업해서 번 돈이나 외국에 나가 힘들게 번 돈이라도 앞뒤를 고려하지 않고 맨먼저 기부했다고 한다. 강철수씨가 생전에 어려움에 처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했는지 일절 성함을 밝히지 않은 원인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정확한 수자를 알 수가 없다.

2016년 강철수씨는 창업으로 연길지질6소 부근에 두부방을 차렸다. 그는 매일 이른새벽에 일어나 밤 늦게까지 열심히 두부를 만들어서 무상으로 사회봉사를 하였다.

고 강철수씨가 생전에 두부방에서 고아원에 지원할 두부를 포장하고 있는 모습

룡정시 도촌자애원, 동불사진새별관, 연길희망복지원…이외에도 많은 고아원들은 그의 기부대상이였다.

추호도 리기적이지 않고 오로지 수많은 불우이웃들을 위해 성심성의로 애심을 베풀며 뛰였다.

강철수씨가 한국에서 사고를 당하고 돌아갔다는 비보를 접하고 생전에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이날 장례식장에서 비통한 눈물을 쏟았다.

연변희망복지원 유영애 부원장은 지난 5월 10일, 강철수씨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이 진실인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며 너무나 큰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철수씨가 두부방 경영을 접고 2017년 12월, 로무로 한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류영애 부원장을 만나 《한국에서 이번에 열심히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와 집도 마련하고 좋은 녀자를 만나 장가도 들겠다며 기뻐하던 일이 어제 갔은데...》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강철수씨는 생전에 다른 고아원과 마찬가지로 종종 희망복지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과일과 맛 있는 음식을 사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두부방을 차린 후에는 늘 바쁜 시간에도 금방 앗은 따스한 두부를 복지원에 가져왔다.

고 강철수씨 추도식에 참가해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

복지원의 애들은 강철수씨를 ‘두부삼촌’이라고 편하게 부르며 속심을 나누군 하였다.  애들이 축구구경을 하고 싶어하자 연변팀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기 돈으로 입장권을 사서는 축구구경도 함께 다니며 매우 친근하게 보냈다.

늘 아이들에게 자신도 어릴 적에 복지원에서 자랐다며 공부를 잘해 훌륭한 사람이 되여 꼭 사랑과 도움을 받은 만큼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추도식에서 류영애 부원장이 대독한 희망복지원 아이들이 보낸 10여통의 편지와 고 강철수씨 생전에 도움을 받은 분들이 전하는 마디마디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리미화학생은 편지에서 《우리가 그냥 철수삼촌을 허물없이 ‘두부삼촌’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우리 곁을 영영 떠나게 돼서 뭐라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두부삼촌’은 힘들게 두부를 만들어서 우리들에게 자주 두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늘은 참 무정하네요. 왜 착한 삼촌이 이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나게 하는지요. 비록 삼촌은 영영 우리 곁을 떠났지만 삼촌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우리는 삼촌의 말씀을 꼭 명심하고 삼촌의 뒤를 따라 앞으로 사회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리복자씨는 눈물범벅이 되여 준비한 원고를 읽다가 도중에 비통을 참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려 주위를 또 한번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2015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서 리복자씨의 딸 김은정이가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고 천문수자와도 같은 병원비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방송된 후였다.

며칠 후 프로책임자로부터 당시 한국에서 일하던 강철수란 분이 딸의 병치료에 보태라고 인민페 5천원을 송금해왔다며 돈을 리복자씨한테 전달해왔다. 낯모를 분이 보내온 돈을 받고 그녀는 당시 매우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고 한다.

고 강철수씨(가운데)가 생전에 후사모 회원들과 함께 등산 후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는 모습

힘들게 피땀으로 번 돈을 이렇게 선뜻 낯모를 딸의 병치료에 보태라고 내밀 수 있다는 그 마음과 용기에 너무 존경스러웠고 미안했다.

그 후에야 강철수씨가 어린 시절부터 불구자 부모의 사랑 없이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매우 어렵게 생활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여 매우 감동되였다고 한다.

리복자씨는 《그렇게 힘들고 곤혹스러운 생활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수많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며 살아온 강철수씨가 이렇게 빨리 하늘나라가 떠나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고 흐느끼였다.

고 강철수씨 동생 강철봉씨는 《형님은 어릴 적부터 저의 손을 잡고 다니며 부모의 자리를 대체한 거룩한 존재였다》며 몇년전 부대에서 제대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기차역에서 어린 아들을 안고 돈지갑을 잃은 이름 모를 한 시골 모자에게 기차표를 사주고 로비를 해결하라고 자신의 호주머니를 전부 털어준 사연을 전했다.

추도식에서 연길희망복지원 류영애 부원장이 비통을 머금고 아이들이 보낸 10여통의 편지를 대독하고 있다.

현재 화룡시 숭선진에서 살고 있는 고인의 소시적 친구 최승일씨에 따르면 강철수씨는 어린 시절 매우 힘들게 자랐지만 항상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씨 착한 애였다고 한다. 강철수씨가 돌아간 후 동생 강철봉씨가 고인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보니 한국에서 돈을 모아 집 사고 장가를 가겠다던 형님의 남은 재산이란 몇권의 책과 생전에 남긴 3천여페지에 달하는 필기, 평소 착용했던 몇벌의 낡은 옷가지외 후사모에 애심봉사를 위해 송금하려고 준비해두었던 10여만원 한화가 전부였다고 한다.

연변후사모 김태국 회장은 《향후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 전체 애심봉사원 회원들과 함께 불우이웃을 도와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한몫을 기여하는 단체가 되련다》고 말했다.

슬픔 속에서 추도사를 읽고 있는 연변후사모 김태국 회장

별찌와도 같은 짧은 생애에 불우한 사람들에게 애심을 베푸는 것을 락으로 간주했던 고 강철수씨의 아름다운 삶, 비록 그는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우리 곁은 떠났지만 애심을 천직으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해온 그의 고귀한 정신은 우리 사회의 본보기가 되여 영원히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길림신문 강동춘 특파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ㅡ룡정온천사우나의 ‘때밀이박사’ 김철수도 아빠트 두채에 자가용 갖춘 부자 지금은 목용탕에서 때밀이를 하는 사람들중 조선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밀이를‘천’한 일로 여기기때문이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17년 째 해오고 있는...
  • 2018-05-16
  • - 아들의 프로 데뷔를 보고 싶은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 지난 10일 만난 정명호(46세)씨는 수심이 가득했다. 부모가 돼서 자식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목에 튜브를 낀 정명호씨는 이틀에 한번씩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뇨독증 환자이다. 당뇨합병증을 10여년 앓던 그...
  • 2018-05-14
  • 5월 10일 오전, 연길시 신흥가 민창사회구역에서 점심준비가 한창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인 어머니날은 미국에서 유래된 기념일(5월 두번째 일요일)로 연변에서는 ‘3.8’부녀절이나 ‘8.15’로인절 등에 비해 작은 규모의 비교적 생소한 명절에 불과하나 독거로인을 비롯한 로인...
  • 2018-05-12
  • 4월 22일, 일본국제문화원 정걸씨의 초청으로 메지로대학“스즈키선생과 장연선생을 모시는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날 모임의 현장 ㅡ 동경 닛포리 HOTEL LUNGWOOD으로 가는 길은 연변의“진달래꽃 축제”를 마중해 언녕 핀듯한 울긋불긋한 철쭉꽃들로 필자의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하였다. 이날 모임은...
  • 2018-05-10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1) ▩양상태(길림) 필자부부가 당시 두손으로 지은 기와집 내가 결혼할 당시(1967년 겨울)에 우로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이가 계셨는데 누이는 출가했고 형님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제대하여 흑룡강성 대경시에 배치받았다. 아래로는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
  • 2018-05-09
  • 왕청진후대관심사업위원회 전금선 주임의 사적   (흑룡강신문=하얼빈)리강춘 특약기자= 10년을 하루와 같이 왕청현 왕청진 동진소학교의 학교, 유치원어린이들에게 새 이불, 솜신, 솜옷, 교복, 운동복을 보내주고 생활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 온갖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는 공산당원이 있다. 그가 바로 왕청진 후...
  • 2018-05-08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0) ▩김삼철(룡정) 1968년 11월 7일, 맏딸 홍화의 돌생일날에 남긴 기념사진 지금도 우리 부부가 처음 엄마 아빠로 되던 날을 생각하면 나는 기쁨보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처음 맞게 되는 큰애의 출생이 안해의 난산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줄을 누가 알았으랴. &lsqu...
  • 2018-05-04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9) ▩김성숙(장춘) 앞줄 왼쪽부터 필자의 올케, 어머니, 오빠. 뒤줄 왼쪽부터 필자의 동생부부, 언니, 필자 김성숙.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네 형제자매를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키우기에 힘썼다. 후에 아들을 장가 보내 며느리를 삼은 후에는 화목한 가...
  • 2018-04-25
  • 료녕성 무순시에서 해방전쟁시기 전투영웅 리형선 로인을 만나 취재중인 김광현. 출판기념모임에서《백년실록》교육편의 주필인 허청선 교수와 담소하고 있는 김창석. (지난 기에 이어) 김광현과 김창석은 아예 우리 지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부터 취재를 시작하기로 기획을 하고 일시불로 동영상카메라 4대를 샀다...
  • 2018-04-20
  • -10여년간 불우이웃에 따뜻한 애심손길 보내준 김선희씨 이야기 휴빈스의 애심천사 “영채꽃”은 누구? “불우이웃을 돕는데 전혀 사심이 없고 항상 앞장선다” 는 짤막한 기사제보를 보내준 사람은 화룡시 팔가자진에서 옹기된장기업을 운영하고있는 장청옥, 김경남씨 부부였다. 함께 애심활동을...
  • 2018-04-16
  • 연변주봉체육양성쎈터 양매 외지에 오래 있다 보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창업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줄곧 외지에서 사업했던 연길시주봉체육양성쎈터 교장 양매(43세)도 그중 한 사람이다.   “창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줄곧 장춘, 심양 등지에서 기업관리에 종사했습니다. 외지에 나간 시간이...
  • 2018-04-13
  •     광둥 후이저우에 조선족 노인협회가 탄생되기까지   (흑룡강신문=하얼빈) 자녀따라 광둥에 진출한 노인들은 악착같이 버텼다. 적응기는 빡셌고 슬펐다.   친구도, 말 동무도 없었던 노인들은 정착 과정에서 문화적응, 언어장벽, 여가생활의 부족, 병원 등 사회 공공 기관  사용의 불편은...
  • 2018-04-11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 ◈김철우(위해) 40여년전 유치원 문예공연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중간 필자) 오늘 나는 책상서랍을 뒤지다 우연히 흑백사진 한장을 땅에 떨구었다. 허리를 굽혀 손에 쥐여들고 보다가 나는 세월 속에 깊숙이 묻힌 추억의 바다 속에 저도 몰래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 2018-04-11
  • 일본에 온 지가 어느덧 18년이 돼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두번이나 변할 정도의 기나긴 세월이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다. 일본은 나에게 희망도, 행복도, 저주도, 슬픔도 배워준 희로애락의 인생교과서이다 . 나는 처음부터 그 어떤 웅대한 포부나 꿈을 가지고 일본류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
  • 2018-04-10
  • 5일 새벽, 깊은 산속에서 54년간 묵묵히 렬사기념비를 지켜온 리은기 로인이 지팡이를 짚고 오솔길을 따라 마을에서 그닥 멀지 않은 산속을 향해 걷는다. 길의 저 끝에는 혁명렬사기념비 하나가 조용히 서있었다. 기념비에 도착한 로인은 손으로 기념비 우에 앉은 먼지를 살살 닦아내고는 기념비 앞에 두 발 모아 바로 선 ...
  • 2018-04-09
  • 일본전통씨름대회인 오오즈모 현장 지난 4월 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 (舞鶴) 시에서 있은 봄철 오오즈모(大相撲:일본전통씨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던 시장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다. 긴급한 상황에서 관객석에 있었던 두 녀성(간호사)이 도효(土俵:경기장)에 올라 구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잇따라 다른 두명...
  • 2018-04-09
  • [편집자의 말] 을 펴내면서 북경 등 전국 각지 네티즌들 뿐만 아닌 한국 네티즌까지 아낌없는 고무격려와 응원의 박수에 감사를 드린다. 에서는 서로 떨어져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그리움, 원망으로부터 서로 리해해주고 서로 응원해주는 가족사랑을 담은 내용이였다면 (3)에서는 부모와 자식간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가면서...
  • 2018-04-08
  •    든든한 "무송서기"로 불리우는 룡정시 석문촌 김무승 제1서기   (흑룡강신문=하얼빈)류설화 렴청화 연변특파원= "우리 무송서기한테 토닭알하고 된장을 좀 줘야겠는데, 우리 아바이는 매일 저녁만 되면 날이 추워져서 무송서기가 잠을 못잘가봐 '우리 집으로 데려올까'하고 물어보오. 어디 그뿐이오...
  • 2018-03-2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 ◈김삼철(룡정) 당년의 ‘땅소나기’ 김병인로인(84세). 당시 조선에 사는 한 친척 화가가 놀러 왔다가 그렸다고 함.
  • 2018-03-29
‹처음  이전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