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88]농부로 살아온 재미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6월15일 00시00분    조회:157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6)

▩김덕운(장춘)

1966년 민병패장으로 있은 필자(중간줄 왼쪽 첫 사람) 등이 입대하는 청년을 환송하며 남긴 사진

나는 흑룡강성 오상현 향양공사(지금은 향양진) 중원 3대에 살았다. 그 지대는 수전지구로서 아무리 곤난한 년대에도 주식은 입쌀밥이였다. 그래서 시내 월급쟁이들도 흠모하는 곳이였다. 지금도 오상입쌀은 이름이 있다.

때는 1963년, 내가 생산대에서 일을 시작한 해였다. 아버지가 조선으로 나가고 어머니 혼자 우리 일곱식솔을 먹여살리기 힘들었기에 나는 중학교 3학년에서 중퇴하고 농사일에 참가하였다. 원래 대대병원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따라 공급량이였던 나의 호구도 농촌호구로 영원히 정착했다.

당시 우리 민족은 한자가 짧아 저녁에는 한자공부를 하였는데 내가 한족학교를 다녀 한어를 좀 한다고 야학에서 한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열심히 한 데서 이듬해인 64년 봄에는 현 문맹퇴치 적극분자 대회에 감창극 단지부서기와 함께 참가하게 되였다.

그 후부터 나의 열정은 더 높아져 낮에는 생산대 일에, 밤에는 대대 청년단지부에서 조직하는 청년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러니 친구들도 많아지고 수집던 아이가 양기도 늘어나고 대대에선 뜨문뜨문 이 일 저 일 책임지워 보내기까지 하였다.

1963년도 우리 지방엔 엄중한 도열병이 돌아 벼품종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다. 봄에 대대에선 각 대소차를 동원하고 나를 공사 농기참 참장과 같이 우리 마을에서 50여리 떨어진 산하진 중심량고에 가 벼종자를 실어오게 하였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산하에 도착하니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 종자고에선 문을 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 10여명은 마차점에 묵게 되였다. 그런데 사람보다 소들이 문제였다. 사람은 굶어도 소들은 한때도 굶기면 안되였기에 양참장과 토론하고 부근 생산대에 가서 여물과 사료를 얻어오기로 했다. 한 생산대에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니 그들은 썰어놓은 여물을 마대에 가득가득 담아주며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시 사양원들도 고마왔지만 비록 고난의 년대였지만 그 사회 그 풍토 민심이 얼마나 후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날 저녁 나는 각 대에서 온 차부들과 함께 마차점에 묵으며 그들에게 식사를 마련했다. 차부들은 다 40~50대 어르신들이라 술도 사드렸더니 같이 한잔 하자고 하였지만 당시 열아홉살이였던 나는 술 마실 줄 모른다며 내 밥만 먹던 일이 어제 같다.

이튿날 날이 개여 종자창고에서 종자를 싣고 돌아왔다. 그 해부터 옛날 몇십년 심어오던 아오모리 일본벼종자가 종적을 감추기 시작하고 해마다 새로운 벼종자가 논판에 퍼지기 시작했다…

10년 동란 때도 우리 대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량식생산을 위주로 한 농토기본건설, 가정을 단위로 한 부업, 주택건설 등을 틀어쥐여 농사는 해마다 풍작을 거두어 나라에 량식을 많이 바쳤다.

자금이 있게 되니 손잡이뜨락또르, 거기에 련결된 농기계 설비를 마련하고 봄엔 비닐박막모를 키워 건실한 모를 심어 풍작을 보장했다. 화학제초가 보급되니 여유로동력이 있게 되여 더 많은 로동력이 퇴비를 장만할 수 있었다. 하여 42쌍의 면적에 매 3년에 한번씩 전면 퇴비를 깔도록 하니 땅은 걸어지고 수확은 올라갔다.

자금도 올라가고 로동력도 여유로우니 철목공소, 량식가공소, 국수가공소 등 부업장을 만들어 대외돈도 벌고 본 대의 농기계도 수리해 사원들에게 편리를 주었다.

기계는 있다 하여도 소는 그래도 논농사에선 필요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소사양실을 벽돌집으로 크게 지어 여름에 비가 오면 질척질척하던 우사는 배수가 잘되고 차가 들어가 직접 소똥도 실어내게 만들었고 나무 패서 불 때던 부엌을 석탄에 불을 붙여 전기만 누르면 되는 신식 부엌으로 만들었다.

오상현 통신원학습반 기념(앞줄 왼쪽 첫 사람이 필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집체살림은 나날이 불어나고 사원들의 생활도 의식주가 풍요롭게 되였다.

그런데 세상은 더 잘살라는 정책이 왔다.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을 기원하며 몇십년의 집체체제는 해체되였다.

나도 더 잘살아보자고 고향을 떠나 장춘 근교로 와 새로운 개척자의 기분으로 억척같이 일하며 해마다 풍작을 거두었다. 남들이 모두 돈 벌려고 한국행을 할 때도 나는 2012년까지 줄곧 농사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평생을 농사를 지었어도 집체생산대 시절에 사원들과 함께 사시장철 함께 일하며 계절 따라 웃고 떠들며 총화 짓고 하던 때가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기음철엔 노래자랑 하다 싶이 노래 부르며 노래 넘기기도 하고 년말총화 땐 돼지를 잡아놓고 대잔치를 벌리며 춤추고 노래하며 새해를 기약하던 일, 개혁개방 후에는 농호도급제를 실시하였지만 서로 만나 농사계획을 토론하고 서로 방조하면서 만원호를 향해 일하던 그 세월들.

농민은 세상에서 제일 마음이 후하고 또한 자유로운 군체이다. 그 계급투쟁이 심할 때에도 고향사람들은 서로 믿고 지지해주었다. 아버지가 조선에 간 연고로 동생이 중학교에서 교원직을 박탈당하고 집에 왔을 때도 기시하거나 비웃지 않았으며 생산대 회계까지 맡겨주었다. 동생은 반년 후 단위에서 다시 불러갔다. 나도 비록 당원은 아니여도 대장, 회계로 수년간 선거해주어 사회에서 기가 죽지 않고 살았으며 장춘으로 떠날 때에도 대대에서 대장을 선거해놓고 가라고 하여 대장을 선거해놓고 떠났다.

나는 지금도 당시 대장을 하면서 사원들을 굶기지 않았고 그리 풍부하지는 못하여도 국가 ‘전시량’을 먹이지 않았으며 해마다 꼭꼭 국가에 공량 임무를 초과완성해 바쳤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어디에서든 자기를 이 사회에 융합시키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오늘까지 평생 농부로 어머님 모시고 동생 넷, 아들 삼형제 모두 공부시켜 성가시켰으니 마음의 부자라 할가! 그간 로고가 있다 해도 농부의 한생 무한 일이 좋았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윤주임이 아니였더라면 어찌 오늘의 태흥촌이 있겠습니까? 윤주임이 진날 마른날 가리지 않고 진심으로 촌민들을 위해 동분서주한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기와집에서 살고 마을의 길도 다 닦았...
  • 2016-03-08
  • 좋은 일을 하는데는 남녀로소 너나할것없다.오늘은 3월 5일 “뢰봉 따라배우기 날”이다.신흥소학교 2학년 4반 학생들은 최미화 담임교원의 지도하에 은하양로원을 방문해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양...
  • 2016-03-05
  • 시아버님 사랑 태명숙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이다.”란 말이 있다. 시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로서는 이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다. 내가 23살 꽃나이에 꽃너울 쓰고 박씨가문에 시집 온지도 어언 2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옛날부터 한동네 혼사는 힘들다고 했건만 나는 복받은 녀자인지 한동...
  • 2016-03-03
  •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선뜻 나서야죠. 이후에도 이런 일에 부딪치면 서슴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겁니다. 다만 이번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는 더욱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택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2일, “내 고장 훌륭한이 ” 영예를 수여받은 주신흥공업집중구 사업일군인 서염봉(38세)을...
  • 2016-03-03
  • 소고기명세장에 깃든 이야기 백순천   전야에 황금오곡 무르익고 산등성이마다 단풍이 빨갛게 불타던 맑은 가을날 나는 오랜만에 내가 나서 자란 그립던 옛 고향을 찾아가 고향사람들을 만나보려고 서둘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은 촌로인협회에서는 대형뻐스를 세내여 훈춘 방천으로 관광을 떠나는 날이였다....
  • 2016-03-02
  •   * 음악과 함께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어요 모든 사람의 축복에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죠 세월이 흘러서 병들고 지칠때 지금처럼 내 곁에서 서로 위로해줄수 있나요 함께 걸어가야 할 수많은 시간 앞에서 우리들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없다는것을 믿나요 힘든 날도 있겠죠 하지만 후...
  • 2016-03-02
  • 결혼전엔 몰랐던 남편의 모습 미정    련애시절 남편은 생일이나 기념일에 꼭꼭 생화를 한묶음씩 안겨주면서 근사한 식당에도 자주 데려가 맛 있는 음식도 사주었다. 난 그의 자상함에 반했다. “결혼하면 너만을 바라보며 밥도 빨래도 청소도 육아도 다 도와줄게.”라던 그가 결혼후 달라졌다. 물론 결...
  • 2016-03-01
  • 한국인도 반한 중국식 정통 양꼬치의 맛 ‘북경양꼬치’ 북경양꼬치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중국식 정통 양꼬치 요리 인기 [디트뉴스24] 고기 마니아들 사이에서 요즘 떠오르는 음식 중 하나가 양고기다.최근 양고기 요리가 대중화되면서 양꼬치 업소가 늘고 있다.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양고기는 꼬치라...
  • 2016-03-01
  • 일본 도쿄에서 '샘물 한글학교'를 이끌고 있는 전정선(60) 교장. 그는 2008년 이 학교를 세우고 재일 조선족 2 세인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일본 내 조선족 2세에 한국어 교육   "한중일 3국 잇는 '코리안' 키울 것"   "새 친구들 환영합니다! 입학생, 재교생 다같이...
  • 2016-02-29
  • 아빠의 빈자리 청목   나의 직업은 의사이다. 그것도 하루에도 몇번씩 수술실을 드나들어야 하는 외과의사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참 매력적인 직업일지는 모른다.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수입도 괜찮고 참 이처럼 완벽한 직업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고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매력뒤...
  • 2016-02-29
  • 선인장의 웃음 김화 “그동안 수고했다. 참 예쁘구나!” 색갈이 선명하고 깔끔한 세개의 봉오리가 자기를 보라는듯 의기양양하게 행복한 웃음을 보내고있다. 그동안 거의 방치하다시피 돌보지도 않았는데 선인장은 잘 견뎌내고 고운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너무 예뻐 허리를 굽혀 입을 바짝 대고 칭찬을 해주었다....
  • 2016-02-26
  • 숨 차게 달려온 나날   박영옥 장백산아래 안도현에는18년동안 이름을 떨쳐온 한 민간단체가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안도현백두산아동문학협회”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인 1997년 1월의 어느날, 리룡득선생이 날보고 지금 연변에 아동문학협회가 공백인데 안도에 이 협회를 설립할 계획이니 김동철씨가 ...
  • 2016-02-25
  • 시력을 잃은 안해에게 꽃향기를 선물하기 위해 수천송이의 꽃을 집주변에 심은 한 일본인 남편의 지극정성이 화제를 모으고있다. 미야자키현 신토미초에 사는 구로유키 쿠로키와 그 안해 야스코 쿠로키는 매일 60마리의 소를 돌보아가며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지난 1956년에 결혼한 이래 슬하에 두 자녀를 둔 부부의 꿈은...
  • 2016-02-24
  • 아버지와 술 문 호    늘 한결같은  친구가 나에게 고급술 한병을 선물하였다. 왠지 술병을 마주하니 눈앞이 흐릿해진다. 친구와의 소중한 우정도 그렇지만 문뜩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아버지는 애주가였다. 어쩌면 술은 아버지에게 어쩌면 밥같은것이였다. 아마도 밥과 술중에서 선택하라면 아버지는...
  • 2016-02-24
  • [경남맛집]창원 양덕동 '어린양양꼬치' 왁자한 선술집 느낌이다. 화려하게 꾸며져 있지 않아서 부담 없이 색다른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어린양양꼬치'다. 양꼬치집이라고 듣고 들렀더니, 중국 요리 메뉴가 빼곡하다. 중국어로 쓰인 메뉴판도 있다. 조선족 출신의 박순화...
  • 2016-02-23
  • [더 나은 미래] "결혼 이주 여성이라면 모국어 살린 통역사 어때요?" 소셜벤처 '온아시아'의 도전 이상선(37)씨는 열한 살 아이의 엄마이자, 중국이 고향인 결혼 이주 여성이다. 10여년 전, 한국인 남편을 따라 서울에 터를 잡은 후 5년은 '육아'에 올인했다. "애가 좀 자라서 취직하려고 보니 나이가 30대...
  • 2016-02-23
  • 300원의 가치 조홍매                                       대학교를 졸업한지도 어느덧 올해로 강산이 한번 변할만큼의...
  • 2016-02-23
  • 세뱃돈을 고향도 아닌 이국타향에서 값지게 사용하는 이가 있다. 그는 다름 아닌 한국 인천남동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장상훈 군이다. '타인에게 베푼다는 것은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도 행복해지는법이다.'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장상훈 군도 약세군체에 후원의...
  • 2016-02-20
  • 추억의 손목시계 리기춘 어느날 나는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서랍구석에서 22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스란히 잠들어있던 《상해표》손목시계를 꺼냈다.입김을 홀홀 발라가면서 하얀 손수건으로 먼지를 살살 닦으니 깨끗한 모양새가 그대로 깔끔하게 들어났다.어찌보면 보잘것없이 평범한 손목시계이지만 나에게는 애뜻한 감회...
  • 2016-02-18
  • 그래도 다홍치마가 더 곱지 않을까? 맹영수   지난1년남짓한 기간에 친척, 친우 그리고 지인들의 부름을 받고 20번의 결혼식에 참가했다. 결혼식은 평생의 연분을 맺는것으로써 응당 즐거운 맘으로 축하하여 주고 술잔을 들어야 했다. 허나 번마다 그런 즐거운 기분만은 아니였다. 왠지 어떤 결혼식에 참가하고 귀로에...
  • 2016-02-17
‹처음  이전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