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김춘희의 미국 이민생활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7월11일 00시00분    조회:144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꼬치마루>식당을 운영하는 김춘희사장

지난해 10월 24일 밤  11시 30분경, 재미 조선족교포 김춘희씨가 운영하는 조지아주 도라빌에 있는 <꼬치마루>식당에 3인조 흑인 무장강도가 침입하였다.

퇴근하면서 <꼬치마루>에 들린 7명의 맛사지 녀성들의 돈을 노리고 추적해 온 무장강도들이 란발한 총에 김춘희사장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였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참변을 당한 김춘희씨는 앰블렌스에 실려가면서도 흘러내리는 산소마스크를 두손으로 꼭 잡고  <범에게 물려가더라도 정신만은 놓치 않는> 인내와 용기로 위기를 간신히 극복했다.

천명이라고 할까?  담당수술의사는 미세한 차이로 김춘희가 영구성 척추마비를 면하였고 다리도 불구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면서 기적이라고 하였다.

미국 련방정부에서는 김춘희에게 무료로 최고의 의료설비혜택을 제공해 주었고 지금까지도 담당의사가 따로 있어 정기적으로 체크하고 수시로 심리상담도 받을수 있게 했다.

이국타향에서 가장 힘들때 고마웠던 그 이름- 조선족

사경을 헤매다가 수술을 마치고 마취약에서 깨면서 그가 간신히 혼미상태에서 눈을 떠보니 아틀란타 조선족협회 여러분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김춘희씨가 사경에서 헤여나올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날 밤 협회 어떤분들은 사고소식을 접하기 바쁘게 자정이 지났음에도 한달음에 <꼬치마루>에 달려가 CCTV 모니터를 돌려보며 상황파악을 하였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조선족협회분들은 이민생활의 고된 하루일과를 끝마치기 바쁘게 너도나도 찿아와 밤새도록 곁을 지켜주기도 하고 온정이 담긴 손으로 상처입은 다리를 정성껏 맛사지 해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김춘희와 함께 울어주고 아파하며 위로해주었는데 그중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초면의 분들도 있었다.

김춘희는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그동안 이민생활이 고달프다는 리유로 시간적으로 마음적으로 여유없이 지냈던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되였고 끈끈한 동포애를 베풀어준 조선족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던 한달

수술도 잘되고 한달가량 지내다가 김춘희씨는 좀더 지켜보자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하였다. 그러나 총알이 스쳐지나면서 몸의 신경들을 강하게 자극한 탓으로 극심한 진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허리는 끊어질듯, 창자는 비틀어 짜듯 아팠고 다리는 예리한 송곳으로 연신 찌르는것 같았고 발바닥까지 불로 지지는 듯, 칼로 저며내는듯 아팠다.

신경통에는 특이한 치료방법보다는 시간이 약이라 하였고 진통약을 먹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극심한 통증속에서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눈물을 흘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는 “내 나이 지금 50대인데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였고 목숨을 살려준 의사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며 그때의 처절했던 아픔을 하소연하였다.

한달이 지나가자 아주 미약하게나마 진통이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또 엄연한 새로운 과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꼬치마루>식당을 어이 할것인꼬?

미국이민의 애환과 꿈이 담긴 <꼬치마루>

<훈춘시 로력모범>상까지 수여받으며 김춘희는 훈춘 밀강에서 27살때부터 10여년간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식당을 잘 운영하여왔다.

2002년 2월, 시골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지인의 소개로 미국행에 나선 그는 국경을 넘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이 불법체류자 신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지만 후회막급이였다.

뉴욕일대에서 그는 네일가게, 식당, 사우나 등 업소들에서 궂은 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억척스럽게 일하였다.

2007년에 아틀란타로 자리를 옮긴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로 식당을 꾸려볼 꿈을 지니게 되였고 그 꿈너머에는 중국에 있는 딸을 미국에 데려다가 교육시키려는 더 간절한 꿈이 있었다.

그는 미국 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배워보려고 타지에 갔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무보수로 일만 열심히 해주다가 돈은 돈대로 날린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언어와 문화장벽은 높기만 한데다가 신분문제마저 해결되지 않아 운전면허증은 물론 영업허가증도 받을수 없는 여러가지 서러움과 불편함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변식 식당을 꾸리고저 어렵사리 한국인 비지니스 파트너를 찿아 동업을 하게 되였다.

영업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건물구조부터 뜯어고쳐야 했고 배수처리, 실내 연기처리 등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는데만 무려 7-8개월이나 걸렸다. 그 와중에 고맙게도 건축업에 종사하는 조선족교포분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어서 큰 힘이 되였다.

마침내 미국에 온지 10년만인 2012년에 김춘희는 양고기 뀀을 위주로 감자밴새, 옥수수 국수 , 순대, 양탕, 여러가지 무침 … 등 연변음식을 위주로 한 특색있는 <꼬치마루> 식당을 버젓하게 오픈하였다.

딸에게 미국류학의 길을 개척해주다

자녀교육에 대한 우리민족의 관심과 열정은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같고 눈물겹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마련되자 그는 자나깨나 소원이였던 딸을 미국에서 공부시킬수 있는 꿈을 실현할수 있게 되였다.

조지아주 대학에 입학한 딸은 처음에는 언어관을 넘지 못해 매우 힘들어 했지만 모녀간에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한 보람으로 지난해 5월에 훌륭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

조지아대학을 졸업한 딸과 사위와 함께한 김춘희

그동안 딸의 학비마련을 위하여 김춘희는 무려 5년동안이나 땀방울을 쏟아가며 일년 365일 날마다 식당문을 열었다.

꼬치마루는 날이 갈수록 많은 손님들의 발길을 끌어모았으며 인터넷에도 칭찬의 리뷰들로 가득차 있다.

그는 “모든 연변 음식들은 여기 손님들의 입맛에 맞추어 재개발하였고 준비해놓은 음식이 혹시라도 제맛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버린다” 고 하였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딸이 고생하는 엄마에게 수차례 강권하여 작년 3월부터 겨우 월요일을 휴식일로 정하게 되였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난 여강자

김춘희의 꿈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꼬치마루>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뒤 종업원들이 뿔뿔히 도망갔고 두달이 넘도록 문을 닫을수 밖에 없었다.

12월 27일, 그는 더 이상 아플수가 없어 자리를 털고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그러나 식당문앞에 이르기도 전에 마음에 앞서 온 몸이 먼저 전률을 일으키며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는 일주일간이나 그렇게 공포에 떨면서 매일 식당문앞에서 배회하다가는 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더 이상 흔들릴순 없어! 죽음도 이겨냈으니 모든걸 이겨낼수 있어! > 김춘희는 다시 한번 강하게 마음을 추스리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용감하게 식당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사이에 손두께만큼 들어앉은 책상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상처받은 허리를 바로 펴지도 못한채 아픈 다리를 끌면서 빡빡 문지르고 닦아내고 쓸어내면서 하루에 서너시간씩 며칠에 걸쳐서 대청소를 하였다 .

조선족협회 설날 잔치에 참석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는 김춘희

2018년 희망찬 새해를 맞아 1월 9일, 김춘희씨는 사고를 당한지 두달반만에 비록 몸이 완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졌다기도 다시 일서서는 오뚜기인양 꼬치마루를 다시 오픈하였다.

<아틀란타 168 >중국인 정보넷에서는 김춘희씨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하였고 조선족협회 담당자도 위챗에 소식을 알리면서 뜨거운 성원을 부탁하였다.

올해 2월달에 있은 미주동남부 조선족협회 설날맞이 대잔치에 김춘희씨는 언제 사고를 당했던가 싶게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참석하였다. 그는 웃음꽃을 피워가며 덕담을 나누고 흥겨운 노래와 춤을 선물하여 조선족동포들과 더불어 여강자의 인간승리의 기쁨과 감동을 뜨겁게 나누었다.

김춘희는 아직도 흐리고 비오는 날씨면 신경통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새롭게 찿은 보귀한 생명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건강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터득하며 파란곡절 많은 이민생활의 여정을 힘차게 활보하고 있다.

리화옥/길림신문 미국특파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외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활상황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설을 쇨 때에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음력설기간 기자는 외지에서 사업하고 학습하는 안도현의 4명 귀향인원을 만나 이들이 고향에 대한 기대와 정감을 느껴보았다.   시민 마우붕은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후...
  • 2018-02-27
  • [백성이야기71]수집인생의 “화분”으로 빚어내는 “황금꿀” 연변장백산우취협회 리사 김영일선생의 수집인생 이야기 들어본다 모아왔던 수집품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일선생 “언제든지 시간 나면 놀러오슈…” 매주 주말이면 장이 서는 연길의 한 골동품...
  • 2018-02-26
  •       음력설을 맞아 위챗 채팅그룹마다 따뜻한 새해덕담과 명절인사로 가득찼다. 이 가운데 16일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자체 채팅그룹에서 ‘온정’을 주제로한 사진교류활동을 벌렸다. 회원들이 채팅그룹에 적극 공유한 가족사진, 설날밥상사진을 투표에 따라 1, 2, 3등을 ...
  • 2018-02-24
  • 북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일본회사에서 8년간 일하다가 작은 집도 사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 생활에 대한 격정과 자극이 없었고 더 발전이 없을것 같은 따분한 현재가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현실을 타개하는 길을 선택한것이 바로 일본류학이였다.   일본 도쿄...
  • 2018-02-23
  •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한 윤화씨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은행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나한테 일본류학을 소개해준 것은 같은 은행을 퇴직하고 일본류학을 떠난 후배였다. 그 당시에는 류학신청에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모와 회사를 속이고 일본류학 신청을 시작했다.그런데 예산...
  • 2018-02-22
  •      ‘미(美)+청(青)’ 사진관 4년만에 9개 가맹점 거느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당신에게 다가서는 김개강 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정명자 기자=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했던 90년대, 스튜디오이자 사진 현상소(照片冲洗店)였던 사진관은 어디서든 쉽게 볼수 있었다.   하지...
  • 2018-02-12
  • 일본에 온 지 어느덧 17년, 내 인생의 거의 절반, 그것도 제일 찬란한 20대와 30대를 일본에서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힘든 적도 있었고 슬픈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거같다. 누구나 다 있는 20대와 30대를 많은 이야기로 수놓았으니 지나온 날들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연변대학...
  • 2018-02-09
  • 내가 일본에 와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넌 일본에 살아서 참 좋겠다.”  일본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외로운데, 서러울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그러나 끝내는 무거운 미소로 묵인하고 만다.  “그래, 나 너무 좋아. 찢어지게 가난하던 촌년이 일본에 와서 출세했으니...
  • 2018-02-05
  • 남영권씨 가족 “세월이 류수”라는 말이 지금은 리해가 간다. 일본에 온지 벌써 20년이 되였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바로 그 시기를 나는 일본땅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덕분에 사이타마켄(埼玉県)에 있는 일본어학교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나는 부모님이 챙겨준 일...
  • 2018-02-05
  •     (흑룡강신문=하얼빈)1932년 4월 조상봉씨의 셋째 아들로 태여난 나는 다섯살때 어머니를 잃고 12살때 기둥같이 믿던 아버지마저 급성장염으로 돌아가셨다. 동년시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지주의 머슴질도 해보고 학도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나는 조직의 배양으로 1952년 10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입당을 하...
  • 2018-02-05
  • 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
  • 2018-02-01
  • 편집자의 말: “일본생활수기”시리즈를 내면서 1983년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운 후 세계로 향한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이 열렸다. 80년대 국비류학, 사비류학으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에로의 이동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정착의 시대를 넘어...
  • 2018-02-01
  • "기층 당지부서기로서 군중과 한마음이 되여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련다." 이는 촌에 내려가 제1서기 직무를 맡고 있는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당지부서기 박선렬의 심중 고백이다. 금년에 39살에 나는 박선렬은 지난해 5월, 현 조직부문의 배치에 따라 십사도구진 망천아신촌에 내려가 촌당지부 제1서기 직무...
  • 2018-01-22
  •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에 들어서는 길목은 버드나무로 즐비하다. 마을 입구에서 우정국까지 나무가 500-600미터쯤 줄지어선 모습은 동불사회구역로인협회 회원들이 '마을가꾸기'의 일환으로 일궈낸 풍경이다.   그들이 마을을 ...
  • 2018-01-1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1) ◇한해동(장춘)   필자 한해동  벌써 80고개를 훨씬 넘은 나는 늘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게 된다. 후회되는 일도 많고 자랑스런 일도 적지 않다. 인생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도 같아 장애물에 부딪쳐도 멈추지 않고 에돌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끝내 머나먼 큰 바다...
  • 2018-01-17
  • 섬나라 사람들인 일본인들은 나무 한그루, 벌레 한마리에도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힐링의 명소로 찾는 일본정원, 늪을 중심으로 정원석과 자연의 나무, 풀로 꾸며진 그 곳에 가면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짙게 느끼게 된다. 자연을 가까이에 하려는 일본...
  • 2018-01-17
  • 한국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안녕? 사랑하는 내 딸 지월아,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나 보고 싶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우리 딸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커줘서 엄마는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여러 방면에서 모두 우수해서 엄마는 너무나 기쁘고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우리 딸이 가장 필...
  • 2018-01-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
  • 2018-01-0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9) ◇리송규(훈춘) 학생시절 대련 바다가에서의 필자 소중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 할가? 그것도 내가 가장 즐기는 바다에서 얻은 것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물 몇살 젊은 시절 장춘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대련에 간 적이 있었다. 대...
  • 2018-01-09
‹처음  이전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