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99]기숙사 친구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9월6일 15시14분    조회:153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7)

▩김숙자(길림)

“그 때 한숙사에서 뒹굴던 채화, 정복, 미화, 춘희, 보옥… 항상 보고 싶다.”는 필자 김숙자(앞줄 왼쪽 두번째).

중년의 문턱을 넘어서 그런지 느닷없이 지나간 옛일들이 나를 찾아오군 한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 추억의 물길은 언제나 화룡2중에 이르러서는 사품치고 출렁이며 폭을 넓힌다. 내 청춘을 꽃피우고 내 꿈을 잉태시켜 여유롭고 행복한 오늘의 생활에로 이끌어준 곳이다.

1981년 나는 화룡2중(고중)에 입학했다. 등에는 행색이 초라한 이불짐을 지고 왔지만 가슴에는 대학이라는 벅찬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는 한개 학급에 학생이 50, 60명씩이나 되여 우리는 교단 바로 밑까지 책상을 놓았다. 수업시간이면 선생님들은 한글자라도 더 가르치려고 칠판에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 분필가루 때문에 선생님들이 입고 계셨던 중산복들은 늘 허옇게 얼룩이 갔고 칠판 바로 밑에 앉은 애들은 떡가루처럼 내려앉는 분필가루 때문에 숨 쉬기도 거북했지만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손부채질이라도 하면서 거부감을 보이는 일도 없이 우리는 오로지 선생님이 지우기 전에 한글자라도 놓칠세라 필기를 다 하려고 전념했을 뿐이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먹지 못해 속이 궁해 그랬던지 아니면 공부를 너무 밤늦게까지 한 탓이였던지 그 때 잠은 또 왜 그렇게 쏟아졌던지… 하지만 모이를 쫏는 닭들처럼 끄덕끄덕 고개방아는 찧을지라도 무작정 책상에 엎디여 잔 애는 단 한명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나도 교단에 서서 애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지금의 애들은 잠이 오는 리유도 극복하는 방법도 완연 다르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먹어서 잠이 오는 애들이 많고 저녁 늦게까지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잠을 설쳤기에 수업에 조는 애들이 많다. 잠이 와도 눈치를 봐가며 조는 게 아니고 아예 엎디여 자버리기가 일쑤다. 더 한심한 것은 선생님들이 한글자라도 더 가르치려고 깨우면 도리여 선생님한테 눈을 흘기는 애들도 있다…

그 때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해야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락후한 농촌에서 벗어나 대학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자식을 출세시키려고 로심초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밟혀 더더욱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버티고 이겨내고 견지했다.

교실은 크든 작든 책상을 놓고 앉을 자리만 있으면 되였지만 대학이라는 꿈을 안고 달려온 우리에게 제일 큰 어려움은 잠자리였다. 학교 숙사를 채 짓지 못한 형편이라 많은 학생들은 이곳저곳 하숙집을 찾아서 낯선 외지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단층 숙사가 있기는 했지만 판부족이였다.

그래도 나와 친구 보옥이는 운수 좋게도 마음씨 고운 학급담임인 김수경선생님을 만나서 선생님 녀동생네 집에도 몇달간 하숙했다. 후에는 또 학교에서 서기사업을 하시던 박경선선생님네 집에서도 일년 너머 하숙했었다. 박서기 부인은 우리들에게 수학을 가르치신 마음씨 고운 한신숙선생님이시였다. 그 때 한선생님께서는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있어 가정부담이 컸지만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 우리한테 늘 맛나는 음식도 해주시였고 후더운 박서기께서는 하루도 어김없이 우리가 든 방에 불을 때주시면서 방이 추울세라 살펴주셨다.

기숙사에 나가던 날 선생님네 딸 영화가 그냥 자기 집에 있으라고 울면서 나한테 매달리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 때 선생님들은 참 마음씨도 무던하셨다.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난다.

중년이 되여 생활이 안정된 후 내가 박서기부부를 찾아뵈였더니 두분은 너무너무 반가이 맞아주는 것이였다. 그러나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가슴에 영원히 갚지 못하는 인정빚으로 남아있다. 그저 두분이 만년에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어쩌다 단층집숙사에 든 학생들일지라도 당번을 짜가며 석탄불도 자체로 때고 특히 녀학생들은 문단속도 든든히 해야만 했다. 그런 초라한 숙사에서 석탄불도 땔 줄 모르고 당번으로 온돌을 덥히면서도 석탄가스 중독 같은 것은 이름도 못 들어보고 용케도 넘겼으니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다.

새 숙사가 준공되자 우리는 벽이 마를 새도 없이 입주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새 숙사였건만 겨울이면 바깥보다 별로 낫지 않았다. 바람벽엔 하얗게 성에가 끼고 천정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우리는 침대 네 귀에 나무 작대기를 동여매고 비닐을 얻어다가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그 ‘비닐지붕’에 떨어지던 물방울소리는 이 시각도 나의 귀전에 울려오는 듯하다.

저녁자습이 끝난 후 숙사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등허리가 시리고 발이 차서 잠이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실내의를 등허리 밑에 펴고 실바지를 발에 감으면서 추위를 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되면 아예 두 사람이 한침대에서 이불 두채를 덮고 같이 잤다…

또 한가지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학교 식당이다. 그 시절 학교 식당에서 식사하는 학생들은 모두 기숙생들이였다. 농촌 호구인 학생들은 집에서 입쌀을 가져다가 학교 식당에 바치고 도시 호구인 학생들의 식량은 학교 식당에서 통일적으로 량점에 가서 배급 식량을 타왔다. 배급 식량이란 대부분이 옥수수쌀, 좁쌀 등이고 입쌀은 겨우 둬근이나 되나마나했다.

식사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두줄로 나누어 서서 밥을 타군 하였는데 농촌 학생들은 새하얀 이밥을, 도시 호구 학생들은 콩알 만한 옥수수쌀이 우르르한 노란 옥수수밥을 타먹어야 했다. 그 때 그 식사시간이 참 고통스러웠다. 옆줄 애들이 타는 새하얀 이밥을 보면서 군침도 많이 흘렸었다. 그 때 나의 제일 큰 욕망은 새하얀 이밥을 하루 세끼 마음껏 먹어보는 것이였다.

한숙사에 있던 채화는 내가 옥수수밥만 먹는 것이 보기 안스러웠던지 늘 자기 밥그릇의 이밥을 나한테 갈라주군 하였고 어느 해인가 나의 생일날에는 타래떡까지 사주어서 나를 목이 메게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고마운 생각이 많이 든다.

20년이 지난 후 사업에서 성과가 있는 채화가 공무차로 길림에 왔을 때 그가 타래떡을 사주던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면서 자기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담담히 말할 뿐이였다. 올 적마다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끝없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내가 설 쇠러 연길에 갈 적마다 채화는 아무리 바빠도 꼭 시간을 내서 옥실이와 함께 나를 열정적으로 접대하군 했다. 그것도 벌써 십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마음씨 고운 딱친구 선녀도 쩍하면 나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생활개선을 시키군 했다. 그 때 선녀네 집은 여덟식솔이 사는 대가정이였다. 그 때 내가 왜서 렴치도 모르고 몇번이나 선녀네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는지 지금 생각만 해도 얼굴이 저절로 붉어진다.

학교 식당에서는 언제나 가지와 감자로 된 장국을 하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가지가 늘 서걱서걱했다. 우리는 감자와 국물만 대수 먹고 가지는 늘 버리군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나는 시장에 가서도 옥수수나 가지는 보지도 않는다.

지금은 흔한 것이 입쌀이니까 오히려 잡곡이 몸에 좋다면서 많은 집들에서 밥을 지을 때 옥수수쌀을 섞지만 나는 밥이 끓을 때 풍기는 그 이밥 향기를 맡으며 여전히 순 입쌀밥을 고집한다. 전기밥솥에서 갓 뜸이 든 밥을 푸려고 솥뚜껑을 열었을 때 자르르 윤기 흐르는 이밥을 보며 나는 오늘의 행복이 참 감사하다. 아, 뼈속에 심어진 나의 이밥 사랑이여! 그 때 한숙사에서 뒹굴던 채화, 정복, 미화, 춘희, 보옥… 항상 보고 싶다.

고중에 다닐 때 우리 한반 동창들은 남녀간에 서로 말도 별로 건네지 않았다. 기숙사에 있는 우리 반 남학생들 가운데서 제일 인상이 있는 것은 항상 하얀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김명이였다. 중등키에 별로 말도 건네보지 못한 김명이였는데 어느 한해 학교에서 조직한 봄철 야외활동 때 술을 마신 것이 그만 학교 령도 선생님들께 발각되여 학교에서 처분 주고 퇴학시킨다고 야단이였다. 그래도 학급담임인 장기원선생님께서 학급 단지부서기인 나에게 단지부의 명의로 담보서를 쓰게 하여 학교에서는 퇴학을 보류했다.

대학입시가 끝난 후 길에서 한반에 있던 위수를 만나 시간이 있으면 우리 집에 놀러 오라 했더니 어느 날인가 김명이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 그 세월 닭알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던 때인데 우리 어머니는 통 크게 그 애들한테 닭을 잡아주셨다. 후에 어머니가 하는 말씀이 그 애들 가운데서 혹시 사위라도 될 사람이 있겠는가 해서 닭을 잡았다는 것이였다. 지금은 그 애들과 만날 때마다 우리 집 닭 값을 내라고 우스개로 넘어가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후에 김명이와 만나서 고중시절 이야기를 해보니 그 때 남자형제만 다섯인 집의 셋째인 그로서는 집이 하도 곤난하여 값이 제일 눅은 고무신 밖에 신지 못했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여름철이면 앵두를 팔아서 각전을 모아 아들한테 생활비를 가져다주었는데 땀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면서 자기가 출세하면 꼭 어머니를 호강시켜야지 윽별렸다고 한다.

경찰학교를 나온 김명이는 지금은 당당한 정법위원회 서기 사업을 하고 있고 셋째아들이지만 언녕 어머니를 신변에 모셔다 호강시키고 있다 한다. 그는 근년에 사업이 아주 바쁜 와중에도 일부러 우리 부모를 뵈러 간 적도 있고 우리 집 일이라면 두말없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있어서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파릇파릇했던 청춘시절은 이미 지나서 우리는 이미 오십이 넘는 중년으로 둔갑을 했지만 만날 적마다 반갑다. 곱게 나이 들었든지 거칠게 나이 들어보이든지 어디에서 어떤 자리에서 지금은 무엇을 하든지간에를 막론하고 우리의 가슴 속에는 그 때 그 시절 뜨거웠던 심장이 그대로 남아있고 우리의 머리 속에는 그 때 그 교실이며 식당이며 숙사, 선생님들이 그 모습 그대로 각인되여있다. 그리고 한없이 출렁이는 우리 추억의 강물 우에는 화룡2중이라는 쪽배가 한결같이 돛을 올리고 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먹을 것도 많이 모자랐던 가난한 세월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 때 그 시절이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 했거늘 그런 세월을 함께 겪었기에 우리 서로가 오늘의 여유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운 기숙사 친구들아, 오늘 복잡한 인간세상에서도 옛날 기숙사 시절의 순진한 마음으로 계속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어가면서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자.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ㅡ룡정온천사우나의 ‘때밀이박사’ 김철수도 아빠트 두채에 자가용 갖춘 부자 지금은 목용탕에서 때밀이를 하는 사람들중 조선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밀이를‘천’한 일로 여기기때문이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17년 째 해오고 있는...
  • 2018-05-16
  • - 아들의 프로 데뷔를 보고 싶은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 지난 10일 만난 정명호(46세)씨는 수심이 가득했다. 부모가 돼서 자식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목에 튜브를 낀 정명호씨는 이틀에 한번씩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뇨독증 환자이다. 당뇨합병증을 10여년 앓던 그...
  • 2018-05-14
  • 5월 10일 오전, 연길시 신흥가 민창사회구역에서 점심준비가 한창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인 어머니날은 미국에서 유래된 기념일(5월 두번째 일요일)로 연변에서는 ‘3.8’부녀절이나 ‘8.15’로인절 등에 비해 작은 규모의 비교적 생소한 명절에 불과하나 독거로인을 비롯한 로인...
  • 2018-05-12
  • 4월 22일, 일본국제문화원 정걸씨의 초청으로 메지로대학“스즈키선생과 장연선생을 모시는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날 모임의 현장 ㅡ 동경 닛포리 HOTEL LUNGWOOD으로 가는 길은 연변의“진달래꽃 축제”를 마중해 언녕 핀듯한 울긋불긋한 철쭉꽃들로 필자의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하였다. 이날 모임은...
  • 2018-05-10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1) ▩양상태(길림) 필자부부가 당시 두손으로 지은 기와집 내가 결혼할 당시(1967년 겨울)에 우로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이가 계셨는데 누이는 출가했고 형님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제대하여 흑룡강성 대경시에 배치받았다. 아래로는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
  • 2018-05-09
  • 왕청진후대관심사업위원회 전금선 주임의 사적   (흑룡강신문=하얼빈)리강춘 특약기자= 10년을 하루와 같이 왕청현 왕청진 동진소학교의 학교, 유치원어린이들에게 새 이불, 솜신, 솜옷, 교복, 운동복을 보내주고 생활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 온갖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는 공산당원이 있다. 그가 바로 왕청진 후...
  • 2018-05-08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0) ▩김삼철(룡정) 1968년 11월 7일, 맏딸 홍화의 돌생일날에 남긴 기념사진 지금도 우리 부부가 처음 엄마 아빠로 되던 날을 생각하면 나는 기쁨보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처음 맞게 되는 큰애의 출생이 안해의 난산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줄을 누가 알았으랴. &lsqu...
  • 2018-05-04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9) ▩김성숙(장춘) 앞줄 왼쪽부터 필자의 올케, 어머니, 오빠. 뒤줄 왼쪽부터 필자의 동생부부, 언니, 필자 김성숙.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네 형제자매를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키우기에 힘썼다. 후에 아들을 장가 보내 며느리를 삼은 후에는 화목한 가...
  • 2018-04-25
  • 료녕성 무순시에서 해방전쟁시기 전투영웅 리형선 로인을 만나 취재중인 김광현. 출판기념모임에서《백년실록》교육편의 주필인 허청선 교수와 담소하고 있는 김창석. (지난 기에 이어) 김광현과 김창석은 아예 우리 지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부터 취재를 시작하기로 기획을 하고 일시불로 동영상카메라 4대를 샀다...
  • 2018-04-20
  • -10여년간 불우이웃에 따뜻한 애심손길 보내준 김선희씨 이야기 휴빈스의 애심천사 “영채꽃”은 누구? “불우이웃을 돕는데 전혀 사심이 없고 항상 앞장선다” 는 짤막한 기사제보를 보내준 사람은 화룡시 팔가자진에서 옹기된장기업을 운영하고있는 장청옥, 김경남씨 부부였다. 함께 애심활동을...
  • 2018-04-16
  • 연변주봉체육양성쎈터 양매 외지에 오래 있다 보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창업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줄곧 외지에서 사업했던 연길시주봉체육양성쎈터 교장 양매(43세)도 그중 한 사람이다.   “창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줄곧 장춘, 심양 등지에서 기업관리에 종사했습니다. 외지에 나간 시간이...
  • 2018-04-13
  •     광둥 후이저우에 조선족 노인협회가 탄생되기까지   (흑룡강신문=하얼빈) 자녀따라 광둥에 진출한 노인들은 악착같이 버텼다. 적응기는 빡셌고 슬펐다.   친구도, 말 동무도 없었던 노인들은 정착 과정에서 문화적응, 언어장벽, 여가생활의 부족, 병원 등 사회 공공 기관  사용의 불편은...
  • 2018-04-11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 ◈김철우(위해) 40여년전 유치원 문예공연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중간 필자) 오늘 나는 책상서랍을 뒤지다 우연히 흑백사진 한장을 땅에 떨구었다. 허리를 굽혀 손에 쥐여들고 보다가 나는 세월 속에 깊숙이 묻힌 추억의 바다 속에 저도 몰래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 2018-04-11
  • 일본에 온 지가 어느덧 18년이 돼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두번이나 변할 정도의 기나긴 세월이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다. 일본은 나에게 희망도, 행복도, 저주도, 슬픔도 배워준 희로애락의 인생교과서이다 . 나는 처음부터 그 어떤 웅대한 포부나 꿈을 가지고 일본류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
  • 2018-04-10
  • 5일 새벽, 깊은 산속에서 54년간 묵묵히 렬사기념비를 지켜온 리은기 로인이 지팡이를 짚고 오솔길을 따라 마을에서 그닥 멀지 않은 산속을 향해 걷는다. 길의 저 끝에는 혁명렬사기념비 하나가 조용히 서있었다. 기념비에 도착한 로인은 손으로 기념비 우에 앉은 먼지를 살살 닦아내고는 기념비 앞에 두 발 모아 바로 선 ...
  • 2018-04-09
  • 일본전통씨름대회인 오오즈모 현장 지난 4월 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 (舞鶴) 시에서 있은 봄철 오오즈모(大相撲:일본전통씨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던 시장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다. 긴급한 상황에서 관객석에 있었던 두 녀성(간호사)이 도효(土俵:경기장)에 올라 구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잇따라 다른 두명...
  • 2018-04-09
  • [편집자의 말] 을 펴내면서 북경 등 전국 각지 네티즌들 뿐만 아닌 한국 네티즌까지 아낌없는 고무격려와 응원의 박수에 감사를 드린다. 에서는 서로 떨어져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그리움, 원망으로부터 서로 리해해주고 서로 응원해주는 가족사랑을 담은 내용이였다면 (3)에서는 부모와 자식간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가면서...
  • 2018-04-08
  •    든든한 "무송서기"로 불리우는 룡정시 석문촌 김무승 제1서기   (흑룡강신문=하얼빈)류설화 렴청화 연변특파원= "우리 무송서기한테 토닭알하고 된장을 좀 줘야겠는데, 우리 아바이는 매일 저녁만 되면 날이 추워져서 무송서기가 잠을 못잘가봐 '우리 집으로 데려올까'하고 물어보오. 어디 그뿐이오...
  • 2018-03-2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 ◈김삼철(룡정) 당년의 ‘땅소나기’ 김병인로인(84세). 당시 조선에 사는 한 친척 화가가 놀러 왔다가 그렸다고 함.
  • 2018-03-29
‹처음  이전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