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05]‘7자나무’와 어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16일 00시00분    조회:75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3)

▩김삼철(룡정)

2001년 9월, 손자와 같이 ‘7자나무’ 앞에서.

내 나이 80이 다된 지금에도 ‘7자나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연길시장에 쌀 팔러 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오후에는 돌아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영화의 화면처럼 내 눈앞에 안겨온다.

그 때 우리 집은 연길현 태양구 중흥촌 7대(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 중평촌 7대)에서 살았다. 마을 동쪽에는 연길에서 삼도만으로 통하는 공로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2리 잘되는 공로 옆 광석촌과 중흥촌 경계에 성인의 한아름 거의 되는 비술나무 고목이 한그루 있었다. 그 나무가 7자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 ‘7자나무’라 부르고 있다. 현재 ‘년세’가 200세를 월씬 넘겼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길옆 웅뎅이에 서있는 ‘7자나무’에는 숱한 붉은 천들이 얼기설기 감싸여 지방의 보물로 모셔지고 있다. 두세기를 살아오는 이 ‘7자나무’는 험난한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으며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세세대대로 뜻 깊은 추억을 남기고 있다.

동년시절의 우리 가정은 생활이 너무도 가난하고 처절하였다. 내가 일곱살에 중병에 걸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우리 가정은 어머니 한몸으로 늙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3형제 아들을 거느리였다. 아버지가 사망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벌써 70을 바라보는 년세였고 큰형님이 10여살로 모두 코흘리개 아이들이였다.

농사군 가정인 우리 집은 유일한 일군이였던 연약한 어머니가 밭갈이로부터 파종, 가을걷이에 이르기까지 남의 집 소차를 빌어쓰며 해방을 받아 분배받은 한쌍 남짓한 벼농사를 매일 새벽 별을 이고 나가서는 달을 이고 돌아오며 힘들게 지어왔다. 농사군 남정네들도 하기 힘든 논갈이를 30대의 어머니가 하였으니 그 고생이야말로 하늘땅이 맞붙을 지경이였다. 그래도 다행히 농사는 고마운 이웃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괜찮게 지어왔다.

농사의 모든 환절이 모두 바빴으나 그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겨우내 지어놓은 벼농사를 처리하는 것이였다. 1950년 좌우 우리 나라는 호도거리 농사를 지었는데 국가의 공구량 임무를 완성한 나머지 벼는 모두 쌀로 찧어 연길시장에 가서 팔아 돈을 만들어 가정의 일상 생활용품들을 샀다. 당시 태양구에는 농부산품 교역시장이 없어 중흥촌 일대의 농민들은 모두 연길시장으로 쌀 팔러 다녔다. 연길시장은 우리 마을에서 30리 상거한 곳이다.

소수레가 있는 집들에서는 량식 등 농부산품을 수레에 싣고 사람까지 앉아서 쉽게 다녔지만 소수레가 없는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50~60근 되는 입쌀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리 길을 걸어서 연길시장에 팔러 갔다. 아마도 1년에 10여차는 잘되였을 것이다. 그 때마다 나는 어린 섬약한 힘으로나마 어머니를 도와나섰다.

1948년 여름에 있은 일이다. 아침 일찍 나는 제딴에는 남자라고 10여근 되는 쌀을 등에 메고 앞장에 나섰다. 어머니는 “너는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듣지 않고 ‘7자 나무’ 있는 데까지만 메고 가겠다고 하면서 어머니 앞서 걸었다. 그런데 웬걸 헐치 않았다. ‘7자나무’는 2리 나마 되는 곳에 있는데 2리도 채 오기 전에 10여근 쌀이 천근 무게로 지지누르며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땀을 흘리며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여 ‘7자나무’ 있는 곳에까지 메고 갔다. ‘7자나무’ 밑에서 어머니는 땀벌창이 되여 헐떡거리는 나의 등에서 쌀짐을 내리워 어머니 쌀짐과 합하였다. 그리곤 어머니는 그 무거운 쌀짐을 이고 지고 종주먹을 쥐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어머니의 뒤모습을 지켜만 보며 더는 도와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스러워 말 못할 울분과 설음에 북받쳐 저도 모르게 ‘7자나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7자나무’에 굳어져있는 나를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손짓하였다. 잠자코 있던 ‘7자나무’도 어서 어머니 말씀을 들으라는듯이 고개를 흔들흔들했다.

오후 2시 쯤 되여 나는 또 ‘7자나무’까지 어머니 마중을 갔다. 어머니 오는 양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아예 ‘7자나무’ 우에 올라가 가로타고 앉았다. 마치 키 큰 아버지의 목마를 탄 것 같았다. ‘7자나무’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더없이 초조하고 애절하였다. 이윽하여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량손에 깁고 기운 새하얀 헌 코고무신을 한짝씩 거머쥐고 맨발바람으로 맥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집들에서는 언녕 버렸을 헌 코고무신도 어머니는 아까와서 신지 않은 것이였다.

나는 그 높은 7자나무에서 단숨에 뛰여내려 “어머니!” 하고 소리치며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겼다.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기특했던지 빙그레 웃으시며 나의 어깨를 살며시 도닥여주셨다. 그리곤 인차 치마말기에 감쌌던 개눈깔사탕 두알을 꺼내여 한알은 내 입에 넣어주고 한알은 내 손에 쥐여주었다. 달디단 사탕물이 나의 목구멍을 적실 때 초들초들 말라터진 어머니의 입술에는 피빛이 력력했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오늘도 또 그 몇푼 안되는 돈을 아끼시느라 점심도 사잡숫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재빨리 개눈깔사탕 한알을 어머니 입에 넣어드렸다. 어머니는 “너 먹으라 준 건데…” 하면서 입안에 사탕을 다시 꺼내려 하였다. 나는 날랜 솜씨로 어머니 입을 꼭 막고 놓지 않았다. 어머니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눈물을 흘리시며 “너도 인제 헴이 다 들었구나?” 하시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나도 뜨거운 그 무엇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감촉하였다. 눈물이 확 솟구쳤다.

‘7자나무’ 밑에서 어머니와 나는 개눈깔사탕 한알씩 녹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불시로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몰켜오더니 천둥이 울부짖으며 심술궂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나와 어머니는 재빨리 ‘7자나무’에 붙어서서 빈 쌀자루를 하나씩 뒤집어썼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나를 감싸안으며 쏟아지는 비를 막았다. 억수로 내리는 비였지만 다행히도 ‘7자나무’의 덕택에 우리는 물참봉은 면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베적삼은 다 젖었다. 좀 있더니 하늘은 내가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듯이 쾌청한 날씨에 불볕을 쏟기 시작하였다. 비에 젖어붙은 6승 베천 너머로 어머니의 여윈 등곬이 가날프게 보였다. 37세에 청상과부로 된 나의 어머니는 가정을 위하여, 세 자식을 위해 재가의 좋은 기회도 모두 뿌리치고 자기 한몸을 희생한 것이였다.

나는 여덟살 되는 그 해에 어머니를 도와 봄부터 가을까지 10여차 쌀을 메고 ‘7자나무’ 있는 곳까지 메여다 주고 오후엔 또 어머니 마중을 다녔다. 아홉살부터는 소학교공부를 거쳐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더는 이전과 같이 어머니와 동행할 수 없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서는 어머니와의 조용한 만남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여덟살 되는 해에 어머니를 도와 쌀짐을 메고 ‘7자나무’ 있는 곳까지 동행했던 그 나날들은 내가 세상을 알기 시작해서 어머니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였으며 내가 인생의 참맛을 알고 인생의 철리를 배운 보귀한 기회였으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머니에게 효도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 나날들은 내가 인생의 아리랑 열두고개를 걷기 시작한 좋은 기회였으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의 첫 인간수업이였으며 내가 일찍 헴이 들어 오늘까지 사람답게 살아올 수 있도록 한 어머니의 가르침이였다. 그래서 나는 1948년 그 1년간의 어머니와의 동행을 돈 주고 살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보귀한 나날들이였다고 생각한다. 그 나날들을 통해 나는 행복의 진가를 똑똑히 알았고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터득하게 되였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우리 세 아들은 모두 출세하여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되였다.

나는 최근년간에 ‘7자나무’가 그리울 때면 손자녀석을 데리고 7자나무를 찾아 사진을 찍고 온다. 그런데 ‘7자나무’도 인제는 늙었는가 본다. 름름하던 당년의 몸매는 몇아름 되는 뚱뚱한 고목으로 되였고 구부정한 허리와 꺼칠꺼칠한 껍질에 메마른 가지들만 늘어가고 있다. 그제날 여덟살 코흘리개 남자애가 지금 80고개에 오르고 있으니깐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70년 전에 어머니가 연길시장에 쌀 팔러 갔다가 눅거리 국밥도 사잡숫지 않고 아껴서 사온 그 개눈깔사탕 맛은 지금도 내 입에서 감돌고 있다. 그 사탕 두알은 잘사는 집들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감로수로 되여 내 인생에 흘러들며 나를 바르게 성장시켜주었다. 그 사탕에서 나는 어머니의 참사랑을 느꼈고 삶의 진가를 알았으며 어려운 인생사를 알기 시작하였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추억의 돛배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싣고 무정한 세월의 흐름 속에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외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활상황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설을 쇨 때에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음력설기간 기자는 외지에서 사업하고 학습하는 안도현의 4명 귀향인원을 만나 이들이 고향에 대한 기대와 정감을 느껴보았다.   시민 마우붕은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후...
  • 2018-02-27
  • [백성이야기71]수집인생의 “화분”으로 빚어내는 “황금꿀” 연변장백산우취협회 리사 김영일선생의 수집인생 이야기 들어본다 모아왔던 수집품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일선생 “언제든지 시간 나면 놀러오슈…” 매주 주말이면 장이 서는 연길의 한 골동품...
  • 2018-02-26
  •       음력설을 맞아 위챗 채팅그룹마다 따뜻한 새해덕담과 명절인사로 가득찼다. 이 가운데 16일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자체 채팅그룹에서 ‘온정’을 주제로한 사진교류활동을 벌렸다. 회원들이 채팅그룹에 적극 공유한 가족사진, 설날밥상사진을 투표에 따라 1, 2, 3등을 ...
  • 2018-02-24
  • 북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일본회사에서 8년간 일하다가 작은 집도 사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 생활에 대한 격정과 자극이 없었고 더 발전이 없을것 같은 따분한 현재가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현실을 타개하는 길을 선택한것이 바로 일본류학이였다.   일본 도쿄...
  • 2018-02-23
  •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한 윤화씨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은행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나한테 일본류학을 소개해준 것은 같은 은행을 퇴직하고 일본류학을 떠난 후배였다. 그 당시에는 류학신청에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모와 회사를 속이고 일본류학 신청을 시작했다.그런데 예산...
  • 2018-02-22
  •      ‘미(美)+청(青)’ 사진관 4년만에 9개 가맹점 거느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당신에게 다가서는 김개강 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정명자 기자=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했던 90년대, 스튜디오이자 사진 현상소(照片冲洗店)였던 사진관은 어디서든 쉽게 볼수 있었다.   하지...
  • 2018-02-12
  • 일본에 온 지 어느덧 17년, 내 인생의 거의 절반, 그것도 제일 찬란한 20대와 30대를 일본에서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힘든 적도 있었고 슬픈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거같다. 누구나 다 있는 20대와 30대를 많은 이야기로 수놓았으니 지나온 날들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연변대학...
  • 2018-02-09
  • 내가 일본에 와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넌 일본에 살아서 참 좋겠다.”  일본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외로운데, 서러울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그러나 끝내는 무거운 미소로 묵인하고 만다.  “그래, 나 너무 좋아. 찢어지게 가난하던 촌년이 일본에 와서 출세했으니...
  • 2018-02-05
  • 남영권씨 가족 “세월이 류수”라는 말이 지금은 리해가 간다. 일본에 온지 벌써 20년이 되였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바로 그 시기를 나는 일본땅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덕분에 사이타마켄(埼玉県)에 있는 일본어학교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나는 부모님이 챙겨준 일...
  • 2018-02-05
  •     (흑룡강신문=하얼빈)1932년 4월 조상봉씨의 셋째 아들로 태여난 나는 다섯살때 어머니를 잃고 12살때 기둥같이 믿던 아버지마저 급성장염으로 돌아가셨다. 동년시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지주의 머슴질도 해보고 학도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나는 조직의 배양으로 1952년 10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입당을 하...
  • 2018-02-05
  • 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
  • 2018-02-01
  • 편집자의 말: “일본생활수기”시리즈를 내면서 1983년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운 후 세계로 향한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이 열렸다. 80년대 국비류학, 사비류학으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에로의 이동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정착의 시대를 넘어...
  • 2018-02-01
  • "기층 당지부서기로서 군중과 한마음이 되여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련다." 이는 촌에 내려가 제1서기 직무를 맡고 있는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당지부서기 박선렬의 심중 고백이다. 금년에 39살에 나는 박선렬은 지난해 5월, 현 조직부문의 배치에 따라 십사도구진 망천아신촌에 내려가 촌당지부 제1서기 직무...
  • 2018-01-22
  •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에 들어서는 길목은 버드나무로 즐비하다. 마을 입구에서 우정국까지 나무가 500-600미터쯤 줄지어선 모습은 동불사회구역로인협회 회원들이 '마을가꾸기'의 일환으로 일궈낸 풍경이다.   그들이 마을을 ...
  • 2018-01-1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1) ◇한해동(장춘)   필자 한해동  벌써 80고개를 훨씬 넘은 나는 늘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게 된다. 후회되는 일도 많고 자랑스런 일도 적지 않다. 인생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도 같아 장애물에 부딪쳐도 멈추지 않고 에돌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끝내 머나먼 큰 바다...
  • 2018-01-17
  • 섬나라 사람들인 일본인들은 나무 한그루, 벌레 한마리에도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힐링의 명소로 찾는 일본정원, 늪을 중심으로 정원석과 자연의 나무, 풀로 꾸며진 그 곳에 가면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짙게 느끼게 된다. 자연을 가까이에 하려는 일본...
  • 2018-01-17
  • 한국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안녕? 사랑하는 내 딸 지월아,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나 보고 싶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우리 딸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커줘서 엄마는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여러 방면에서 모두 우수해서 엄마는 너무나 기쁘고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우리 딸이 가장 필...
  • 2018-01-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
  • 2018-01-0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9) ◇리송규(훈춘) 학생시절 대련 바다가에서의 필자 소중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 할가? 그것도 내가 가장 즐기는 바다에서 얻은 것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물 몇살 젊은 시절 장춘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대련에 간 적이 있었다. 대...
  • 2018-01-09
‹처음  이전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