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6)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 필자 전영실
나는 단위 종업원 운동대회를 비롯해 운동경기에 자주 출전하는 스포츠맨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기적'이다.
나는 소학교 2학년 때 하학길에 부주의로 넘어지면서 다리를 상했는데 설 수도 걸을 수도 없게 되였다. 병원의 진단은 “둔부의 뼈가 썩기 시작하고 한쪽다리는 힘줄이 늘어났다”는 것이였다.
청천벽력이였다. 창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노라니 나의 두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나도 저 애들처럼 자유롭게 뛰논다면 얼마나 좋으랴 !
나는 종신불구로 된다는 의사들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지팽이를 짚고 왼손으로 벽을 붙잡고 두다리에 힘을 주면서 일어서보았다. 순간, 모진 진통으로 그 자리에 폴싹 꼬꾸라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 철없는 것아, 네가 어떻게 일어서서 걸을 수 있다고 그러냐.” 하며 눈굽을 찍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말씀도 나의 결심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좋다는 병원과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니였다. 연길의 223병원, 장춘의 길림성병원, 천진의 골과병원 등등. 중의원에서 그 아픈 침만 해도 왼쪽 다리에 한번에 30여대씩 2700여대나 맞았으며 고통의 피눈물은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나는 빨리 걷고 싶은 욕망으로 무릎걸음부터 시작했다. 점차 설 수 있게 되자 발자국 떼는 련습을 하다가 이마를 구들에 쪼으며 넘어진 적도 있고 아픔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지팽이를 짚고 겨우 바깥구경을 나가면 조무래기들로부터 “삐꼬, 삐꼬! 다리삐꼬!!!” 하며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병원의 치료와 어머니의 정성 그리고 꼭 다시 걷겠다는 나의 불굴의 의지가 하느님을 감동시켰던지 4년 반 만에 끝내 지팽이를 버리고 걸을 수 있게 되였고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였다…
어느 하루 신문에서 전 주 자전거경기가 있다는 소식을 보게 된 나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등록을 해놓은 나는 출근전 새벽에 일어나 밥을 안쳐놓고는 련습으로 모아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갔다. 매일 시계를 보면서 비교해보니 속도가 엄청 빨라졌다.
드디여 1999년 10월 23일 연길시에서 자전거 경기가 진행되였다. 남편과 아들애가 응원하러 가겠다는 것을 나는 “말등하면 어쩌려구. 창피하게… 제발 오지 마세요.” 하면서 말렸다.
남자들 경기가 끝난 후 녀자들 차례였다. 전 주 각지에서 온 선수들이였는데 모두 몸집이 웅장하고 키도 크고 올림픽 선수 같았지만 나는 겨우 155메터 키에 체중 백근이 되나마나해 그들과 비하면 너무나 왜소했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 나는 총알같이 첫 사람으로 페달을 밟았다. 녀자 15키로메터는 흰기를 가지고 페달을 밟아 올리막까지 가서는 붉은기를 바꿔가지고 내려와야 했다. 달리는 도중에 응원하면서 광천수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 몸에 물을 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땀이 좔좔 흘러도 닦을 사이 없는데 언제 그런 걸 돌볼 사이가 있는가. 일분일초 시간과 속도를 다투면서 숨을 할딱거리며 나는 최선을 다했다. 돌아오는 도중 이제 약 20메터 남았는데 자전거 사슬이 벗겨졌다! 돌볼 새가 없다. 뒤사람이 따라온다. 나는 아예 두손으로 자전거를 밀고 죽을둥살둥 모르고 뛰였다. 종점에 이르기 바쁘게 뒤사람이 몇초를 사이두고 들어섰다.
환성이 울렸다. 2등이였다. 나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뜻밖의 좋은 성적에 놀란 남편도 혀를 끌끌 차며 점심에 맛나는 음식을 먹자고 했다. 남편과 아들애가 같이 길에 나와 나를 마중했다.
2등상으로 주체육운동위원회에서 영예증서를 주었고 주통신회사에서 전화비 500원을 입금한 삐삐기 한대를 상으로 주었으며 텔레비죤 뉴스에도 소식이 나왔다.
텔레비죤을 본 친구들도 야단법석이였다. “영실아, 너 정말 대단하다. 어쩌면 몇년이나 다리를 앓아 누워있던 네가 이런 큰 경기에 참가하여 등수에까지 들 수 있니? 정말 놀랍고도 감격된다.” 그 날은 내 생애에서 정말 기쁨에 벅찬 하루였다.
앉은뱅이가 될 번했던 내가 이런 경기에 참가하여 등수에 오르다니. 생각하면 꿈만 같다.
또 작년 3.8절이였다. 우리 가사협회의 3.8명절 유희 종목에 팔씨름이 있었다. 나는 B조의 팔씨름 대표로 나섰다. 근데 A조의 선수는 나보다 12년 어리고 키가 170센치메터 이상, 체중이 150근 좌우로 보기만 해도 나는 새우에 불과했다.
책상을 중간에 놓고 호각소리에 따라 치렬한 경기가 시작되였다. 나는 대방의 우악진 손을 꽉 붙잡고 안깐힘을 다 썼다. 그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손은 남자손처럼 크고도 넙적하고 억대했다. 나는 입을 옥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그와 겨루었다. 두 소조는 각기 목이 터지게 자기 편을 응원했다.
눈은 무시로 깜빡거렸고 손목은 바들바들 떨렸고 입은 악물다 못해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키가 크고 억대하면 단가? 나는 키 작아도 악으로 해야지, 절대 항복할 수 없다. 있는 힘 끝까지 해봐야지…
그는 우악진 손으로 나의 팔목을 꺾으려 하였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지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손목은 이쪽으로 기울가 하다가는 저쪽으로 기울며 중간에서 긴장히 떨렸다.
몇분간의 치렬한 겨룸 끝에 대방은 끝내 항복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악물'이라고 롱담을 하였다. 우리 조에서는 너도나도 나를 끌어안고 환성을 올렸다.
전 주 민속절 팔씨름 경기에 참가하여서도 나보다 10년이나 어린 왕청에서 온 힘장사군을 척 꺾었다.
또 연집 뾰족산 등산 시합에서도 우정국 녀자들 몇십명이 총소리와 함께 등산을 시작했는데 중도에서 많이 투항했지만 나는 숨이 차서 할딱거리면서도 마지막에는 나무뿌리, 풀뿌리를 붙잡고 기여올라 2등을 하였다.
5.4청년절 단위에서 있은 모아산 등산 경기에서도 6등을 하여 고급이불을 상으로 받았다.
또 한번은 운동회에서 우편마대에 들어가 달리기를 했는데 남들이 퐁퐁 뛰면서 달리다가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나는 챠플린 걸음 동작으로 쭉쭉 속도를 빼면서 걸어나가 한번도 엎어지지 않고 백메터경주에서 일등을 하였다. 내가 경기장에서 퇴장할 때 우리 황색대는 나를 포옹까지 해주면서 축하해주었다.
맡은 바 사업도 열심이 하니 직장에서 동료들이 인정해주었다.
하면 된다. 내 가족과 사회를 위해 나는 내 심신의 건강에 유익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해보리라. 건강은 삶의 밑천이다.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십여년 동안 휴식일에 등산을 견지하였으며 평소에 매일 5000보 내지 만보씩 걷고 특수상황 외에는 택시를 타지 않으며 장거리에 가면 몇원이면 살 수 있는 산나물, 민들레, 달래, 버섯 등 토산물도 직접 산에 가서 뜯기를 즐긴다. 로동도 일종 운동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껏 40여년 동안 이전의 골과병이 재발하지 않았으며 몸도 가볍다. 그리고 항상 머리가 맑아있어 많은 일에 흥취를 가지게 된다. 료리에 대하여, 살림에 대하여, 또한 사회인으로서 글쓰기에 대해서도…
영원한 장애인으로 사회의 부담거리로 될 번했던 나는 19살 고중졸업생으로 사회에 진출한 후 분발 노력해 수많은 영예도 지녔다.
내가 어렸을 때 매일 아픈 타령만 하고 누워만 있었더라면 오늘날까지도 ‘삐꼬'란 별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오늘과 같은 날은 더구나 없었을 것이다.
평범할 수 없었던 나의 인생길, 평범하지 않은 곳에서 평범한 건강인의 생활을 창조한 나는 이 모든 것이 자포자기하지 않고 완강한 의력으로 열심히 살아온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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