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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굽걸음'으로 엮어낸 생명의 찬가(1)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3월26일 14시49분    조회: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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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지체장애인 서순애 행복 찾아 수십성상—“무엇이든 내 두손으로”

손수 만든‘도르래판'으로  움직이는 서순애(56세),안방에서 차를 내오는 중이다.

마을의 ‘꾀꼴새’

길림성 화룡시 룡성향 춘화촌(지금의 흥륭촌)에서 태여난 서순애(56세)는 척수성마비 1급지체장애인이다. 돐전에 걸음을 뗐다가 돐이 차면서 척수성 소아마비란 전염병에 걸려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지체 발육에 심한 장애를 입었다. 팔굽으로 바닥을 짚고서야 감각이 미약한 하신을 끌어 겨우 이동할 수 있는 신세였다. 서순애의 팔굽은 닳아서 뭉툭해졌고 왼쪽 륵연골에는 뜬뜬한 썩살이 배겼다. 서순애는 여섯 형제 중 막내이다. 병약한 순애는 어려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농사 짓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에 업히워 일밭으로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예닐곱살 때 아버지, 어머니 등에 땀 마를 새 없는 것을 알아 채기 시작한 순애는 차라리 집에 남기 시작한다. 그러나 순애는 심한 고독과 처절함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한여름의 어느날 오후, 순애는 그만 구들에 납작 업드려 통곡쳤다. 바로 이때 일하러 갔던 어머니가 씽하니 집에 들어서더니 손에 쥐였던 호미자루를 팽개치고 방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 우는 것이였다. 영문을 알리 없는 순애는 제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어머니한테로 기여가 고사리 손을 내밀었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밭머리에서 펼쳐진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는 순애 또래들의 재롱 공연을 보는 순간 순애의 신세가 너무나도 가엽고 병치료가 불가능한 한이 치밀어올라 단숨에 일밭에서 집에까지 달려와 버렸던 것이다.

순애는 그날부터 다시는 어머니앞에서, 식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순애도 학교 가야지, 그럼!”

순애는 8살에 아버지의 등에 업혀 소학교에 입학했다.허리 맥도, 오른쪽 팔힘이나 손의 악력도 여의치 않다보니 순애는 몸을 책상에 바싹 들이 대 왼쪽 륵골을 책상언저리에다 걸고 웃몸을 세워 왼손으로 글 쓰는‘요령'을 뼈 갈리도록 익혀낸다. 하여 륵연골에 그런 굳은살이 앉았던 것이다…

순애가 다칠세라, 혹여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을가봐 순애를 학교에 업어다 주고 다시 가서 집으로 업어오는 일은 무조건 순애 아버지가 전담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순애가 15살이 되는 해에 돌연히 사망하게 된다. 바로 사망하는 그날 아버지는 하학길에서 등뒤의 순애한테 대고 “세상은 머리로 살아간단다. 우리 순애는 총명한 머리를 가졌으니 노력하면 얼마든지 팔다리 성한 사람들 못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거야...”라고 말했다. 그날이 순애가 소학교를 마치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망은 가정에, 특히 순애한테는 하늘이 무너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입학철이 오자 순애는 갓 애 아빠가 된 큰오빠한테 업히워 중학교에 입학했다. 때로는 셋째오빠한테 업히워 집으로 올 때도 있었으나 순애를 업고 다니는 일은 거의 큰오빠가 전담하다 싶이 했다. 아버지의 그 등을 떠나 자신이 학교를 더 견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막연했고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당시의 집 사정과 가족의 아픔을 헤아려 주는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한 순애는 그만 몇달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가 3추같이 1년을 고달프게 보냈다. 순애는 학교를 그만둔 후 집 밖으로 나와보지 못했다. 그러다 별이 총총한 시골의 밤하늘 아래 순애네 울바자와 사립문 틈새로 동네사람들의 눈빛이 총총히 매달리기 시작한다. 은하수에서 흘러내리는 듯한 순애 큰오빠의 바이올린 소리와 청계수보다 맑은 순애의 노래소리가 하모니를 이루기 시작했 던 것이다...

순애의 아버지는 20세기 50년대에 화룡현 환성구 춘화편(片, 춘화 등 5개 생산대대 포함)의 당지부 서기로 일한 적 있으며‘문화대혁명'시기에‘주자파'로 몰리우다가 억울한 루명을 벗기 바쁘게 돌아갔다. 순애 큰오빠의 그 바이올린은 순애의 아버지가 생전에 사준 것이다.

“말로 표달할 수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가슴 아픔과 그리움, 용기를 내서 우리는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는 웨침, 발버둥 같은 거였지요. 노래, 음악의 힘이 과연 대단하다는 것을 그 때 나와 우리 식구들은 느꼈어요...”순애의 말이다.

워낙 고운 목소리를 갖고 태여난 순애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다. 오빠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도, 레, 미”...하며 바이올린을 련습할 때 순애도 동네사람의 휘파람소리에도 악보를 척척 갖다 맞출 정도로 악보공부를 익혔다. 순애의 노래 소리에, 오빠의 바이올린 소리에 고생속에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웃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웃으니 온 집안에 웃음꽃이 피여났다.

순애가 19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순애한테 이런 말 한마디 남겼다.

“순애야, 사람은 살면서 높은 데만 바라보지 말고 내려다 볼 줄도 알아야 하니라. 너는 남이 못가진 고운 목소리를 가졌잖아. 노래로 속을 풀면서 살거라...”

“무엇이든 내 두손으로”

순애의 큰언니(오른쪽)가 기자에게 순애와 순애 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모의 가르침을 아로새긴 순애는 “난 절대 남이 떠주는 밥 먹고 살수만 없다. 무엇이든 내 두손으로 해야 겠다!”는 의지를 굳히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

어느 하루, 순애 어머니(당시 67세)가 밖에서 탁아‘일감’정보를 가지고 돌아와 순애와 의논한다. 순애는 결연히 어머니더러 그‘일감'을 당겨오게 한다. 어머니한테는 순애의 손이 필요할 지경으로 아쉬운 집안 사정이기도 했지만 순애가 어느새 마음속의 의지가 돼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간 순애의 둘째언니가 지병으로 요절해 어머니한테 남은 건 40여평방메터되는 살림집에 막내딸 순애와 가셔지지 않는 가난이였다. 실은 1989년 가을 어머니가 해외 친정집으로 가기 전 순애는 어머니를 도와 조카(오빠네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친정집으로 간 3개월간 조카를 돌보는 일은 순애가 도맡았다.

그렇게 조카들로부터 시작해 탁아 일을 8년, 순애는 어머니를 도와 아기 12명을 돌보았다.

놀라운 것은 그 숱한 애들 중 순애한테서 이마 한번 벗겨지거나 손 한번 긁힌 아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순애게 맡겨지는 아기들은 보통 돐은 지나고 세돐 미만기의 아기들이였다. 순애는 이동이 어려운 대신 아기들의 눈움직임, 표정 하나라도 놓칠세라 지켜보고는 그 심리를 꿰뚫어 아기들이 겨냥하는 방향, 목표물을 향해 앞질러 기여가군 했다.

순애는 또 어머니와 상의해 집 위치가 화룡시제2중학교와 가까운 점을 리용해 웃방에 하숙생도 받아들였다. 1998년까지 6년사이에 순애네 집에서 하숙한 학생이 24명이나 되였다.

“그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나로 하여금 생활의 보람을 느끼게 했고 앞날의 희망을 내다보게 했다. ”

하숙생들이 들기 시작할 때 순애 큰오빠네는 텔레비죤수상기를 사서 순애한테 선물했다. 외출을 못하는 순애한테는 세상을 읽는 창구가 생긴 거지만 그는 낮에는 아기 보느라 텔레비죤을 켜지 않았고 저녁에는 하숙생들의 공부에 지장이 된다고 조종기를‘벙어리 모드'로 설정해 놓고 텔레비죤을 보았다.

해외 친정집으로 떠나는 그해에 순애 어머니는 떠나기전에 입쌀 15근을 사놓고 갔다. 입쌀이 귀한 집사정이여서 순애는 그 쌀을 어머니가 오면 같이 먹자고 그동안 한줌도 다치지 않았다. 순애는 그동안 애간장을 태우며 조카를 돌보면서 불편한 그 두손으로 어머니가 웃방에 무져놓은 이삭 옥수수 알을 다 빻았는데 그 덜 여문 옥수수알을 통째로 쪄먹고 견디였던 것이다...

“존재감을 찾다”

해맑은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는 서순애, 당년에 방송되였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있다.

1998년 대학시험을 마치고 떠나는 한 하숙생이 순애한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기가 듣던 미니 반도체를 기념으로 주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런 반도체를 손에 쥐고 아무 때나 방송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순애는 너무도 신기하고 고마웠다. 주말 저녁의 밤 9시 경에 주파수를 맞추다가 마침 해외 모 방송매체의〈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코너에 맞추어졌는데 아나운서가 한 연변 조선족 청취자가 편지로 보낸 사연을 읽어주고 있었다...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공중파로 함께 나눌수 있다는 것에 순애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세상의 쪽문이 자기를 향해 열려오는 듯 싶었다. 비로소 종이와 필을 찾아들었다. 밤새에 세상과 소통하는 첫 편지를 써놓았다. 그런데 이튿날에 해외에 편지를 붙이자고 하니 우편료가 3원 40전이란다. 1전 한푼이 그리운 집형편이였기에 순애는 그 돈을 빼낼 수 없었다. 마침 웃동네의 로동장갑가공집을 통해 장갑 손가락 끝을 코바늘로 마무리는 일감을 받았다. 낮에 아이가 잠자는 짬과 아침,저녁으로 하숙생들의 때시걱을 준비하는 짬을 타 밤늦게까지, 때론 엎뜨려 팔굽으로 상체를 지탱해가며... 일주일 만에 3원 40전을 벌어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과연 어느 하루에는 그 손바닥만한 반도체에서 서순애의 편지사연이 방송되고 신청곡이 흘러나왔다. 순애의 마음은 몹시 설레이였다.

“울바자안에 갇혀 사는 내가 그 방송에서 존재감을 찾은 것 같고 친구를 찾은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은 순애는 1999년 봄에 상점경영을 도전해나섰다.그후에 있은 방송인터뷰에서 순애는 전화로 노래〈북경의 금산에서(北京的金山上)〉까지 불러 중국의 소리를 해외에 전파했다. 순애는 “그 해외 방송프로와의 교류는 자립의 꿈을 쫓던 청춘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였다고 감량조로 말한다.

 /길림신문 기자 김영자

주:〈‘팔굽걸음’으로 엮어낸 생명의 찬가 (2)〉는 며칠 후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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