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해인 93년 봄에 첫 조선족 류학생으로 포항공대 장학생이 된 남편과 나는 주로 손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영상통화는 물론 이메일 전자편지란 이름조차 들어본적 없는 시대였다.
집에 전화선을 가설한다거나 우체국에 가서 국제전화를 한다는것은 감히 엄두조차 낼수 없는 비용이여서 한두달에 한번씩 전화기가 있는 동네 부자집에 미리 부탁을 드리고 남편의 전화를 받군 했었다.
반년, 일년, 시간이 흐를수록 18개월이 된 아들애를 떼놓고 떠난 아빠와 하루가 다르게 말재주가 늘어가는 아들애의 목소리를 자주 들려주고 싶어서 나는 가정용 전화기가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2년뒤에 나는 결국 교원사업에 대한 미련과 모국에 대한 동경심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곁으로 갔다.
1999년에 한국에서 박사후연구원 2년차를 마친 남편은 다시 미국류학을 결심하게 되였다.
몇년후엔 다시 고향에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8살이 된 아들애의 손을 잡고 온 가족이 함께 떠난 미국행이 어느덧 20년 세월이 살같이 흘러 나는 꼬박 24년간 해외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타향살이 쓴맛, 단맛을 맛보아 가면서 아들딸을 키워 가면서 나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그리운 엄마가 계시는 고향의 품에 가끔 안길때마다 영혼 깊이에 까지 스며드는 마음의 안식과 위로를 받군 했었다.
2004년에 고향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건강하시던 엄마가2년뒤 80세가 되던 해에 뇌출혈로 쓰러 지셨다.
2007년 7월에 고향에 달려간 나는 애처롭게 병석에 누워계시는 엄마곂에서 금쪽같은 20여일을 하루 하루 소중하게 보냈다. 쓰라린 눈물로 리별한지 10개월만에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셨다.
무정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토록 허망하게, 허탈하게 엄마를 보내야 했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리움>이란 세글자만 엄마한테 야속하게 남겨놓고 훌쩍 떠나버린채 곁을 지켜드리지 못한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와 세차게 가슴을 때렸다. 애지중지 사랑해온 이 막내딸이 보고 싶어서 우리 엄마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녹아 내렸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해외생활에서 항상 따뜻하고 든든한 귀속처였던 마음의 의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엄마가 없는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라며 등을 돌렸고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의 마지막 길도 배웅해 드리지 못한 이 못난 딸은 더 이상 고향을 방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자책하며 그렇게 나는 한동안 가슴 아프게 고향과 외면했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4- 5년 후부터 그 동안의 아픔이 점차 사라 지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되여 있던 나의 존재의 뿌리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하는 언니들, 친구들이 보고 싶은 마음이 서서히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였다.
가정용전화기에 목말라 있던 시대가 언제였던가 싶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였고 중국 위챗의 방대한 위력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중국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놓았다.
한치 앞을 모르고 무작장 고향을 떠나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초고중 , 대학시절의 동창들과 지인들과 극적으로 연락이 닿기 시작하였다. 시간과 공간을 뛰여 넘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공중파 만남에 마음은 세차게 요동쳤다.
고향에 고속철도가 개통되였다는 등 간간히 굿뉴스를 접할때마다 하루 빨리 고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딸아이가 대학가기를 용케도 기다려 마침내 4월 11일 고향발 티켓을 끊었다.
12년만에 모처럼 떠나는 고향 나들이라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고향음식도 많아서 손꼽아보니 열손가락이 부족했다. 만나고 싶은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낮이면 저도 모르게 코노래가 흘러나왔고 밤이면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을 설쳤다.
고향방문 소식을 지인들한테 알리면서 스케쥴을 짜기도 혹시 미국에서만 구입할수 있는 물건을 부탁할 친구가 있을까 물어보기도 하면서 고향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과정부터가 무척 즐거웠다.
<무사히 오기만 해>, <그냥 얼굴만 갖고 와>, <길 떠나면 눈섭도 짐이란다. 그냥 편하게 와> ...
예상외의 회답문자들을 읽으면서고향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 주고 있다는것이 더없이 행복했다.
떠나기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니 이런 문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세월 가슴속에 샘처럼 고여왔던 그리움만 퍼가지고 오세요. 고향과 모국에 대한 그리움 말입니다…> .
순간, 울컥하고 설음이 북받쳐 오르면서 한가슴 가득차있던 그리움의 샘이 물고를 터뜨리고 눈물샘을 자극하며 스마트폰우에 주체할수 없이 흘러내렸다.
아, 고향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도 큰 그리움을 쌓아놓았을까!
따라서 나는 12년만의 고향나들이의 만남들을 위하여 나름 마음준비도 단단히 하였다.
< 만날때에는 웃는 얼굴, 밝은 모습으로 !> , < 리별할때에는 미련없이 쿨하게!, 그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서!>
40일이란 짧은 시간에 고향과 한국, 일본 방문 일정들을 잘 소화해내기 위하여 특별히 소중한 고향나들이를 알차게 보내기 위하여 나름 스케쥴도 꼼꼼히 짜고 재삼 확인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동안 고향은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구경 어떻게 이루어질까? 나는 설레이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신들메를 단단히 동여맸다.
/길림신문 미국특파원 리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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