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생활이 제일 구차한 촌민 기와집에 먼저
지난세기 70년대에 건설된 부흥촌 주택구
“이제 당의 지시에 따라 우리가 악전고투한다면 고향사람들이 저런 오두막에서 번신할 날도 멀지 않겠지”
제대하던 날 렴경창은 기와집 한채 보이지 않던 부흥마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로부터 렴경창은 부흥사람들을 이끌고 15년만에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통일규격(90평방메터/2가구)으로 설계, 건설한 산뜻하고 아담한 주택구에 100가구가 보란듯이 입주했다.
때는 1973년-1974년이였다. 100가구가 들 벽돌기와집을 세운 후 부흥촌에서는 ‘먼저 군중들이 들고, 후에 당원들이 주택에 든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일단은 오보호에 무상으로 주택을 분배해 준 다음 개인이 최저 기본료금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군중들에게 우선 선택권을 주고 당원들은 나중에 분배 받았다.
김지택로인
부흥촌의 ‘토배기’ 김지택(73세)로인은 자기네는 당시 제일 먼저 주택구에 입주한 10여가구 중의 한집이라면서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40년전에 지금 내 나이 때에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날 때가 많아요.
그때는 부모님이 년로하고 오래동안 병환에 계셨기에 우리집은 빈곤호에 속했어요...생활이 구차한 집들에서 먼저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였지요. 내가 첫 자전거를 중고품으로 산 때가 우리 애들이 중학교에 간 지난 세기 80년대 초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촌의 혜택이 아니였더면 그 세월에 우리가 언제 그런 집을 엄두나 냈겠어요? 렴서기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그때로부터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왔지요...생산로동 일공 단가도 10부 표준으로 다른 촌에서 0.80원, 0.90원씩 할 때 우리는 1.20원, 1.30원 정도로 받았다니깐요”
로당원 리철수(76세)로인은 주택구 얘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촌의 당원간부들과 촌민들한테 떠밀려서 제일 마지막으로 주택구에 든 렴서기네는 우리 마을 구역에 있는 송화평탄광의 종업원 주택에서 20여평방메터 되는 외양간을 헐값으로 사서 손질해 든 대로 여섯 식구가 17년을 그 자리에서 살았네. 부흥의 당원들은 렴서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언제나 집체나 군중들을 위하는 고달픈 일에서 앞장서고 향수는 무조건 뒤로 했네. 그렇게 많은 집체 기업소들을 일궈내고 촌민들의 주택을 해결해 주면서도 당원간부들은 술 한잔 공 먹은 일 없었네...”
촌에서 석탄을 통일적으로 대주다
부흥사람들은 근 20년동안 땔나무 걱정 없이 촌에서 제공하는 석탄을 때고 산 세월을 잊지 않는다.
리철수로인은 계속해 말했다.
“원래는 렴경창 서기가 렬군속, 오보호의 화목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목적으로 송화평탄광지도부를 찾아갔네. 촌민들을 생각하는 20대의 나젊은 촌서기의 갸륵한 마음에 감복된 탄광지도부에서는 그 탄광내에 탄갱을 별도로 지정해 우리촌에서 채굴해가도록 허락해주었네. 렴서기는 당원들을 이끌고 점심밥을 싸들고 다니면서 앞장서 석탄을 캤지요. 나중엔 촌에서 전문 석탄채굴팀을 무었네. 이렇게 전 촌민의 화목걱정, 촌부사무실 등 시설의 난방문제와 벽돌공장의 연료문제까지 해결했네.”
렴경창은 말그대로 평생 청빈하게 살았다. 현재 복원군인대우와 20년이상 촌간부경력인 보조비를 발급받는 외에 아무런 재산도 없다.
합작의료의 덕분으로 촌민들 병 보이기 편리해
부흥의 로촌민들은 지난 세기 60년대 초기부터 촌의 힘으로 웬간한 병은 촌위생소에서 치료받던 그때의 ‘합작의료’를 잊지 않고 있다.
렴경창은 촌민들이 더는 병을 보이지 못하는 일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 1963년 화룡진 위생원을 통해 전동희(당시 30대 후반)란 연변의학원 졸업 출신, 성급병원 주임 경력을 가진 ‘몸값’이 높은 전문의(서의)를 부흥에로 모셔오던 이야기를 기자에게 들려준다.
“전문의가 온 그때로부터 약사, 간호사까지 배합한 위생소를 운영했는데 위생소 건물도 새로 세웠고 두 간호사의 로임대우 및 촌민들의 기본의료비 등은 촌에서 부담했지요. 촌민들은 처음엔 5전씩 냈고 나중엔 10전씩 내면 진찰 받고 기본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요...”
“로일대가 남겨놓은 정신, 물질적 재부는 새시기 발전의 토대 ”
‘초심’담에 격정 넘치는 렴경창로인
부흥촌에는 300여헥타르되는 림지가 있다. 1980년에 촌서기직을 사임한 렴경창은 림지관리원으로 일했다. 책임심이 강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렴경창은 털끌만한 허실도 없이 림지를 12년간이나 용케도 지켜냈다.
촌사무감독위원인 심재필(71세)은 “솔직히 촌에서 림지의 재목을 욕심낸 적도 있었지만 렴서기 관을 못 넘어 목재 한대도 쓰지 못했다”고 혀를 찬다.
“왜놈들의 손에서 되찾은 우리의 강산에서 나라의 재산인 림지를 우리가 다시 푸르게 가꾸고 잘 지켜내라고 하는데 내가 소홀할 수야 없지 않소! ”렴경창은 12년사이에 한차례의 도난, 안전사고도 빚어내지 않은 것으로 해 자부감을 느꼈다.
요즘 렴경창은 지난해에 부흥촌이 빈곤촌 대렬에서 해탈된 소식을 자주 떠올리며 기쁨에 겨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원간부들이 계속하여 초심을 리행해나간다면‘첫번째 100년의 목표’의 실현에 이어‘두번째 100년 목표’도 기필코 실현되리라고 확신한다.
부흥촌 당지부 서기 김송춘
부흥촌 촌부 사무실
부흥촌 현임 촌당지부 서기 김송춘은 “력대 촌 지도부와 로일대 당원간부들 그리고 고향사람들이 물려준 정신적, 물질적 재부는 부흥촌의 빈곤해탈과 새시기 발전의 근본 토대로 된다”고 말하면서 정부 및 협력 부축 단위와 손잡고 건설한 새로운 산업 대상들이 조혈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위험주택 개조가 완성되였으며 위생환경, 촌도도 포장 개진 및 급수시설 개진, 가로등 가설 등 기초시설 개진 공사를 전격 추진해 부흥촌은 발전의 새로운 스타트를 뗏다고 소개한다. (끝)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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