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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글짓기응모] 아버지 생각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8월9일 11시09분    조회: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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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미란 -

 

 

  (흑룡강신문=도쿄) 오늘도 예전처럼 일 끝내고 집에 와서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고 작은 아들과 식탁에 마주앉았다.

  무의식에 반찬 하나를 가리키며 아들한테 물었다.

  "이 반찬 누가 제일로 좋아하지?"

  "할아버지..."

  "어떻게 알아???"

  "엄마가 이 반찬 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제일로 좋아하는거라고 몇번이고 말해서 나도 알아요!"

  아들이 나를 힐끔거리면서 대답했다.

  "너 할아버지 얼굴이 기억나니?"

  "글쎄...조금...하지만 엄마한테서 자주 들어서인지 어떤분이셨다는건 알것 같아요. "

  순간 지나온 일들이 필림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딸 사랑은 아버지라고 나는 아버지한테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보배였던것 같다. 내가 출가하는 날 밤에 그렇게 오래 우셨다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가 일본에 처음 오신때는 내가 일본에 온지 5년에. 곧 작은애를 출산하게 되여서였다. 어머니와 함께 엄청 큰 트렁크 두개에 또 비행기에 채 부치지 못한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나의 앞에 나타나셨다. 내가 떡 종류를 좋아한다고 찹쌀을 가루내여 잔뜩 지고 오셨던것이다. 그렇게 꼿꼿하시던 아버지의 어깨가 좀 휘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하여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는시장을 돌아다니시면서 어디에는 채소가 싸고 어디에는 일용품이 싸더라고. 나보다 동네를 더 잘 파악하고 계셨다. 어느새 우리집 시장을 보는 일은 아버지가 도맡게 되였다. 내가 무의식중에 뭐가 먹고싶다고 하면 언제 슬그머니 나가셔서는 손에 들고 오셨다. 항상 얼굴에는 환한 미소 지으시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것은 우유병을 약물로 소독하는데 필요한 맞춤한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사러 나가신 아버지. 그것도 훗날에 어머니한테서 듣고 알게 된 일이였지만 마땅한 용기를 고르느라 적어서 다섯번은 사고 물리고를 반복하셨다는것이다. 예전엔 그런분이 아니셨는데... 나는 억이 막혀 저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일본어를 전혀 못하시는 아버지가 어떻게 해내셨을가는 지금도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이렇게 하루 이틀... 석달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두분이 중국으로 돌아가신후 혼자서 아침에는 큰애 챙겨서 학교 보내고 작은애 끌고 시장 다녀오고 애들 먹이고 씻기고 하면 그냥 하루하루가 기진맥진이였다. 정말이지 첫 한달은 너무나 적응이 안되여 힘들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절로 났다. 좀더 계시지...

  일본이 물가가 비싸서 일본에 계시면 우리한테 오히려 부담이 된다시면서 비자연장을 하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아버지가 두번째로 일본에 오신것은 작은애 첫돐생일 때였다.

  첫번째와 별 다름없이 또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 오셨다. 몇달전보다 어깨가 더 휘신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반가움보다 짜증이 났다. "아버지두 참. 일본에도 다 있는데 뭘 이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십니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일본에서 굶고 사는가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정성보다 아버지가 힘드셨던거보다 체면이 깎일가봐 싫다는 나의 이 말에 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가는듯 하더니 인차 어색한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두번째 대면에도 아버지께 따뜻한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 드리고 말았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이 하는 말. "아버지 얼굴 기색도 많이 못해지셨구려. 래일 우에노 아메요코시장에 가서 자라 한마리 사다가 몸 보신 시켜드렸으면 좋겠소. "

  이튿날. 아침 일찍 아버지를 모시고 우에노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딸과 같이 길 떠나는게 얼마만이냐며 어린애들 마냥 기뻐하셨다. 시장에 가서 곧장 자라 파는곳으로 찾아갔다. 자라 한마리를 사면 그 자리에서 피를 뽑아 술에 타서 마시게 한다던 남편의 말대로 아버지께 몸에 좋으니 마시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애를 어머니께 혼자 맡기고 온것이 불안하여 인차 돌아섰다. 돌아오는 전차안에서 아버지가 흥분하신 말투로 나한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얘야. 아까 마신게 진짜 좋기는 좋은것 같다. 지금 가슴에서부터 온 몸이 훈훈해나면서 막 하늘로 솟아오를것만 같은 기분이다야!"

  "아버지두 참. 거기에 술이 들어가서 술기운에 그럴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전차안에서 소리 낮추어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퉁명스레 대꾸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냥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계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께 오늘 좋은걸 마셨으니 장생불로 할거요 하시면서 하루종일 같은 얘기를 자꾸 곱씹는것이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저렇게 기뻐하시니 이제부터라도 좋은걸 많이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이 좀 더 크면 아버지를 모시고 려행도 함께 다니고 몸 보신도 시켜드리고 해야지...) 머리속에서 여러가지 계획이 맴돌아쳤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출근하게 되였다.

  애를 완전히 아버지 어머니께 맡기고 밖에서 하루종일 보내니 홀가분하고 되려 신나기만 하였다. 아침은 대수 챙겨먹고 회사 나갔다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애 속옷까지 깨끗하게 빨아놓은 상태였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상만은 잘 차려야 겠다는 생각에 저녁거리는 내가 사오는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회사근처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전차에서 내리니 아버지가 마중나와 계셨다. 내 손에 들었던 짐을 채여가듯 들더니 (이렇게 무거운걸 들고 오느라 힘들었겠네...)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어정쩡하게 짐을 맡기고 앞에서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등뒤를 보니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였다. (그렇게 웅장하시던 아버지가 언제부터 저렇게 야위였을가...어깨도 점점 구부정하고....) 나는 인츰 달려가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허리에 힘 좀 주시고 어깨를 더 쭉~펴고 걸으세요." 아버지는 멋적게 웃으시기만 하셨다.

  그 이튿날도 아버지는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전날과 다르게 려행용 멜가방을 들고 나오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내 손에서 짐을 빼앗아 가방에 넣더니 어깨에 짊어지는것이였다. 그리고는 힘들었겠다고 한마디 하시고는 내 앞에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이렇게 내가 출근하는 날마다 몇개월동안 아버지는 나의 마중을 나오셨고 앞의 광경이 반복되였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돌아가시기 두주일전까지 ... ...

  그날은 8월초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 였다. 나는 휴일이라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네 내외가 도맡아 하려고 준비중인 가게로 일손 도우러 갔다. 이것 저것 씻고 닦고 하다가 아버지를 보니 구석진곳에 쭈크리고 앉아 계셨다. 여느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라 나는 인츰 아버지한테 달려가 물었다. "아버지.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더니 어디 아프신것 아니예요?" 괜찮다며 손을 내저으시는 아버지. 황급히 아버지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 같았다. "안되겠어요. 병원에 갑시다. " 인차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뒤지니 걸어서 5분거리에 종합병원이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오전 11시까지 접수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다행히 십분가량 시간이 있었다... ...

  싫다는 아버지를 끌다싶이 해서 밖에 나왔다. 병원 방향을 향해 초조한 마음으로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좀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멀리서 따라오시는 것이였다. 아버지한테 도로 뛰여가서 말했다. "좀 더 빨리 걸으실수 없겠습니까? 늦으면 병원이 문을 닫습니다." 아버지를 재촉하고나서 또 혼자서 급한 마음에 종종걸음을 쳤다. 좀 지나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또 멀리 뒤떨어져 계셨다. "아버지. 저기 보이는게 병원입니다. 제가 먼저 갈테니 빨리 따라오세요." 멀리서 이렇게 소리지르고 나는 병원에 뛰여들어갔다. 다행히 접수신청을 마치고 다시 아버지를 마중하여 병원에 들어와 걸상에 주저 앉았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버지를 바라보니 아버지도 땀벌창이 되여 계셨다. 인차 손수건으로 아버지 얼굴의 땀을 닦아드리려고 하니 아버지는 너도 땀투성이라며 나부터 닦으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이렇게 한참을 서로 땀을 닦아주다가 시원한 물 사러 갔다오니 아버지는 걸상에 쪼그리고 누워계셨다. 어쩐지 마음이 쓰려났다.

  한참을 지나 간호사가 와서 묻는것이였다. 의료보험증은 없냐고. 나는 아버지는 중국에서 친척방문비자로 오셨고 이제 열흘뒤면 비자가 끝나서 중국으로 돌아가신다고 알렸다. 그랬더니 간호사가 그럼 혈액검사와 CT만 하자고 하였다. 나는 아무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검사가 끝나고 의사선생님이 내게 하는 말 "간이 많이 나쁘네요. 소염제와 해열제 그리고 진통제를 처방할테니 드시게 하고 중국에 돌아가면 인차 전면검사 받게 하세요."

  병원을 나서는데 마음이 좀 놓였다. 약도 받아놓았으니 인츰 나으실테지... 아버지가 간염이 있으신것은 꽤 오래된 일이고 우리 가족이 다 알고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 ...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우시는것이였다. 약과 물을 챙겨가지고 아버지 한테로 가져가는데 아버지가 힘겨운 목소리로 어머니한테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까 아파서 쟤를 따라 병원에 가는데 걷기가 힘들어 죽는줄 알았소. 5분거리라고 하더니만 십리는 더 되는것 같습데..."

  순간 뭔가가 내 머리를 무겁게 내리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그때 택시라도 탈 생각을 못했을까? 걸어서 5분거리라니까 쉽게만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정말로 많이 아프셨나 보구나. 정말 아직도 이렇게 생각이 짧으니까 참... ...)이렇게 처음으로 아버지께 큰 잘못을 한것 같아 후회가 되였다.

  하지만!

  나는 더 큰 후회를 하게 될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약을 드시고 며칠 쉬니까 아버지는 열도 내리고 몸이 거의 좋아진듯 싶었다. 날자가 되여 중국으로 돌아가시는 날이 돌아왔다. "이젠 다 나았으니 근심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내 마음을 헤아리는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에 나도 좀 시름이 놓이는것 같았다. 그러자 머리속은 아버지 어머니가 가신뒤 또 혼자서 애들 뒤치닥거리 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어머니께 잊지않고 당부하였다. 중국에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를 인차 전면검사 받게 하시라고.

  며칠뒤 저녁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기다렸던 전화라 다급히 물었다.

  "아버지 전면검사 받으셨습니까? 어떻습니까? 괜찮지 예???"

  나의 조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조금은 떨리는듯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 오자마자 니가 시키는대로 병원에 갔다왔다. 아버지는 너희들하고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식이니까 알려야 할것 같아서 전화한다. 아버지 간암이란다. .........그것도 말기........."

  어머니는 뒷말을 잇지 못하셨고 나는 순간 머리에 된 방망이를 맞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 그럴수 없습니다. 제대로 검사 받았습니까?"

  "오. 전번날 지방병원에서 진단받고 오늘 연변병원에 가서도 재차 검사했다. 남은 수명이 반년정도라네... 흑...흑..."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청천벽력이...

  눈앞에는 역까지 마중나와 내 짐을 가로채여 멜가방에 지고 앞서 걸어가시던 아버지 뒷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힘드셨을가?! 아마도 손에 들기보다 어깨에 지면 덜 힘들어서 그렇게 메고 다니셨구나. 내가 얼마든지 들고 갈수 있는 짐이였는데 ...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아무 생각없이 받기만 하였구나. 아버지께 아무것도 해드린게 없고 계획만 가득 한들 이제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그만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을때도 아버지께 속옷 한벌 사드린적 없고 남편따라 일본에 올 때에도 아무 부끄러움 없이 큰 애를 아버지 어머니께 맡겼었고... 외국에서 산다는 구실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을뿐만 아니라 일본구경 시킨다고 일본에 모셔온것도 오직 내가 필요해서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내가 사드린 긴 외투가 너무나 맘에 드신다며 돌아가실때는 꼭 그옷을 입혀서 보내달라고 어머니께 당부하시더란다.

  아버지...아버지...

  항상 저한테 그러셨지요.

  좋은 일이나 행복한 일은 남과 나누면 배로 되여 돌아오는 법이니 꼭 많은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거라. 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것은 제 몫이니 절로 이겨내고 절로 마음을 다스리는게 어른이 되는거란다. 네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이 다른 어떤이한테는 아무일도 아닐수 있기에 힘들다 고통스럽다 라는것들은 자기 생각하기 나름이니 그런것들을 느낄새도 없게 항상 많은 사람들과 좋은것만 나누면서 살거라. 모든 일이 무른땅에 말뚝박기와 같이 쉬운 일은 아니니 하고자 하는 일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거라. 또 세상엔 우연이란 없고 모든일이 필연적이니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항상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느니라.

  저에게 생명을 주시고 인생관까지 심어주신 아버지. 오래오래 저의 옆에 계실줄로만 알았던 제 자신이 너무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이튿날. 대충 주변을 정리하고 나는 큰애는 남편한테 맡기고 작은애만 데리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더는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그날로부터 일년반후에 아버지는 영영 나의 곁을 떠나셨다.

  "엄마. 또 울어요? 밥은 안 먹어요?"

  작은애가 소리질렀다.

  "오. 너 혼자 먼저 먹어라. 엄마는 할머니께 전화드리고 먹을께."

  나는 전화기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었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려야지.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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