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공화국과 동갑임을 무한한 영광으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0월18일 11시05분    조회:122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백세 시대인 요즘엔 칠십나이는 삶의 지혜를 빛내는 황금 시절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두번째 봄이다.

공화국 창립과 동갑인 나의 칠십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어린시절과 그림같은 고향의 풍경이 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에서 칠남매중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6살을 먹던 해 가족을 따라 소발구에 앉아 감자와 조 농사를 짓던 강장골을 떠나 10리 쯤 떨어진 곳에서 어린시절과 청춘시절을 보냈다.

학생들과 함께 있는 필자 김동운.

나는 감자 섞인 조밥과 콩보리밥만 먹다가 11살에 처음 이밥을 먹어보았고 12살에 처음 사탕을 먹어보았으며 14살에 처음 전등불을 보았고 16살에 처음 기차를 타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몰랐지만 자식들에 대한 기대는 남달리 컸다. 간혹 도회지에 갔다가 집에 돌아 올 때면 공책과 고무지우개,연필을 사다가 나의 손에 쥐여주면서 웅심 깊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때를 잘못 만나 공부를 못했는데 너나 공부를 잘하여 나라의 유용한 사람이 되여라.”

“예, 공부를 잘하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깊은 뜻은 잘 몰랐지만 자신 있게 대답하군 했다.

아버지는 가끔 날 데리고 두만강변에 고기 잡으러 갔는데 아버지가 반두질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앞에 우렷이 떠오르군 한다.

“동운아! 반두를 잘 대고 있어라. 아버지가 돌밑에 숨어있는 물고기들을 몰아올테니”

아버지는 바지가랭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고기들이 있음즉한 곳을 찾아 두발로 내가 꼭 잡고 있는 반두 앞까지 물고기들을 몰고 와서는 손짓을 하면서 얼른 반두를 쳐들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는 반두를 쳐드는데 그 때면 아버지가 얼른 다가와서 거들어주셨다. 함께 반두를 들어올리고 물이 빠진 그물 안을 들여다보면 돌종개, 버들치 등 여러가지 고기들이 팔딱거렸다. 그 때마다 나는 환성을 올리군했다.

어린 나한테는 두만강에서의 고기잡이가 즐거운 놀이였지만 농사일에 지친 아버지에게는 많은 식구들에게 맛 있는 한끼를 마련하는 로동이였으리라.

꽤 많이 잡힌 물고기를 다래끼에 담아가면 찬거리로 저녁끼니를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에 함박꽃같은 웃음이 피여났다.

“우리 동운이 이젠 다 컸네. 아버지 도와 고기잡이도 잘하는구나”

“어머니, 올해 겨울엔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하러도 갈게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참 장하구나, 그래 힘 자라는 대로 많이 돕거라.”

어머니는 일손을 재우쳐 고기밸을 따고 맛 있는 물고기탕을 끓였다. 석유등잔불을 켜고 오손도손 밥상에 둘러앉아 맛 있게 물고기탕에 조밥이라도 배불리 먹는 날은 온 집안에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날이여서 실로 시골의 잔치판을 방불케 했다.

나는 집에서 수십리 떨어져있는 남평중학교에 입학하여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1970년 2월 28일, 21살 혈기방장한 청춘시절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진붉은 당기앞에서 장엄하게 선서하던 그 감격적인 시각을 회상하면 가끔 가슴이 울렁거리군 한다. 그해 8월 첫 로농병학원으로 추천받아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하였다. 나는 당의 따사로운 해빛을 한몸에 안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조직의 통일배치에 따라 장춘시 구태에 있는 영성탄광자제중학교에서 정치교원으로 사업의 첫발자국을 뗐다.

그 때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 18개 사업, 기관 단위에서 21번의 직무변동을 거치는 복잡하고도 기나긴 사업려정을 겪어왔다.

첫 사업터가 연변지역을 벗어나니 나를 키운 고향과 가족이 마냥 그리웠다. 내가살던 고향에서 청춘의 삶을 빛내보길 바랐으나 개인의 욕망보다 조직의 배치가 더 중요했다. 하여 산 설고 물 설고 낯 선 타고장에서 사업의 첫 악장을 엮어나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꿈을 품고 간절히 기대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니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장춘 지식청년과 교환조동을 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생겼다. 나는 고향인 화룡현 와룡중학교에 전근되여 정치교원 겸 공청단서기로 활약하다가 현당위 조직부의 발령을 받아 용화공사 무장부 부장으로, 1년 후에 공사당위 부서기,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있게 되였다. 1976년 5월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3기 청년간부양성반에 참가하였고 그 해 년말에 공사당위 서기,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등용되였다. 그 뒤 선후로 화룡현 숭선공사 농촌공작대 조장, 공청단 화룡현위 서기, 현당위 위원에 임직, 1983년 공청단 주위로부터 제11차 전국공청단대표대회 대표후선인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1986년 9월,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발탁된 지 1년도 안되여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장의 중책을 짊어지게 되였다.

1990년초 화룡현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받은 후 농촌에서 대문화건설을 틀어쥐여 농민들의 종합 자질을 높여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했다. 반년간의 시간을 들여 조사연구를 하고 론문을 써서 농촌 대문화건설을 지도했다. 그 때 제기한 관점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상사업을 강화해 정치자질을 높이고 법률보급을 잘해 사회안정을 보증하고 도덕교양을 잘해 조화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신원대오건설을 틀어쥐고 통신사업을 추진시켰다. 2년간의 노력을 거쳐 전시 통신원대오를 50명으로 부터 200여명으로 늘였다. 그중 20여명 골간들이 사람마다 100편 이상의 원고를 써서 주와 현 매체에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고 통신원대오 양성훈련을 적극 틀어쥐여 자질을 높였다. 현에서 해마다 한번 내지 두번 강습반을 꾸리고 각 향진에서도 해마다 한차례 이상의 강습반을 꾸려 통신원들의 자질을 높였다. 당시 매체에 발표한 화룡현의 원고의 질과 량이 전 주적으로 앞자리를 차지했다.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장으로 있은 몇년간 나는 새로운 형세에 맞추어 선전사업의 새 길을 열심히 탐색하였다.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거쳐 농촌 대문화건설에 관한 내용과 방법, 견해를 내놓고 착실하게 실행하여 농촌발전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 기간에 나는 길림성 모범선전부장으로 당선되여 표창받기도 했다.

룡정시당위 부서기로 있은 2년 반 동안에는 농촌, 문화교육, 정법사업과 군중단체사업을 맡고 농촌형세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에 뒤따른 문제들을 연구,해결하는 데 모를 박았다. 그리고 ‘새로운 형세하에 어떻게 경제발전을 틀어쥘 것인가’는 과제를 놓고 반년 남짓이 조사연구를 진행한 후 <소성진(小城镇)건설을 강화하고 현역경제 돌파를 적극 추진하자>는 제목으로 조사론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소향진 건설의 의의와 내용, 조치 등 3개 측면의 문제를 보다 깊게 분석하고 끄집어냈다. 특히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룡정시의 향진건설을 3개 층차로 나누어 분별하여 기획, 지도해야 한다고 견해를 내놓음으로써 당시 룡정시의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놀았다.

내가 룡정에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조직에서는 나더러 왕청현 현장 사업을 맡으라고 하였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모순과 곤난이 있을 것인데 왕청으로 가는 게 옳은가? 사업은 투쟁이다. 곤난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사업한단 말인가? ’나는 고민 끝에 조직의 배치에 복종했다.

왕청현 현장으로 있는 기간은 3년 3개월 3일이였다. 왕청에 부임하자 마자 가정에는 둘째 딸애의 공부문제로하여 걱정거리가 생겼다.

언제나 나의 사업을 군말없이 묵묵히 지지해주던 안해였지만 사춘기를 넘기며 공부하는 딸애들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나도 딸애의 공부문제로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나는조리정연한 어조로 말하였다.

“나도 딸애들이 전학을 하면 공부에 지장받을 거라 생각하오. 하지만 왕청인민들이 자식을 공부시키는 학교에서 왜 내 자식은 공부시킬 수 없겠소? 현장인 내가 자식을 데려오지 않으면 왕청인민들에게 뭐라고 교대하겠소? 현장은 전 현의 코기러기이니 모든 면에서 이신작칙해야 하오.”

“하긴 그래요, 남들이 적응하는 학교에 우리 애들이라고 왜 적응하지 못하겠나요? 왕청에 가자요.”

마침내 안해는 나의 말대로 했다. 딸애도 잘 따라주고 학습,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나는 아무리 사업이 다망하여도 학부모 회의에 참가하고 휴일이면 딸애들과 함께 시내돌이도 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지금 박사공부를 마치고 북경 모 대학에서 부교수로 있는 큰딸과 박사학위를 따고 연변병원에서 부주임 의사로 근무하는 둘째 딸을 생각하면 건강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두 딸한테 기특함과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

왕청현 현장으로 갓 부임되였을 때 왕청현은 길림성 5개 현중의 하나, 연변에서 유일한 국가급 빈곤현이였다. 당연히 빈곤탈출이 첫째가는 임무였다.

1997년 현장으로 부임되여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왕청 시가지에서 천교령에 이르는 도로를 닦은 일이였다. 이 공사는 자금이 엄청 많이 드는 공사인데 현정부에는 자금이 없었다. 나는 관련 지도자들과 일부 책임자들을 이끌고 몇달간 10여차례나 주와 성 및 국가 관련 부문을 찾아가 반복적으로 공사 필요성을 간곡히 말하였다. 반년간의 노력 끝에 대상이 락착되고 6,000여만원의 자금도 유치되였다.

근 2년간의 시공 끝에 왕청에서 천교령에 이르는 도로가 완공되였다. 이는 왕청현의 발전 뿐만 아니라 그 후 왕청현 도로건설에서도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되였다. 이 무렵 왕청현은 정부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재정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는 단시일에 해결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참답게 감원건설을 연구하고 틀어쥐여야 한다고 판단한 나는 근 1년간의 시간을 들여 기층에 내려가 조사하는 한편 기회를 잡고 감원체계를 세우는 중요한 과제를 둘러싸고 연구했다. 현당위 리론학습중심조회의에서 <왕청현 감원건설을 가일층 강화할 데 관한 사고>라는 제목으로론문을 내놓았다. 론문에서 제기한 4개 면의 감원건설을 틀어쥐여야 한다는 견해를 지침으로 삼고 사업을 적극 추진시켰는데 당시 현의 감원건설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빈곤현의 현장으로 있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관리는 백성의 질고를 념두에 두고 항상 백성의 리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을 통해 깊이 체득했다.

1998년 8월의 어느 날, 갑자기 대싸리같은 큰비가 쏟아졌다. 불길한 예감이 번개마냥 머리를 쳤다. 그 때 공교롭게도 심장병이 도지고 감기까지 걸린 나다. 현병원에서는 무조건 며칠 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한참 망설이고 있을 때 하마탕향에서 홍수가 져서 위험하다는 급보가 전해왔다. 호주머니에 약을 넣고 병원문을 나서려는 나를 “아니 이러다가 큰일 나겠습니다. 입원치료를 해야 합니다.” 병원 원장이 간곡한 어조로 만류했다.

나는 약을 먹고 해당 일군들을 거느리고 인츰 홍수방지 제1선에서 지휘했다. 그 때 우리는 꼬박 이틀간 싸워 홍수 피해를 막아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감기가 나아진 것이다.

“우리가 홍수와 용감히 싸우니 감기란 놈도 무서워 벌벌 떠는구만.”

내가 롱조로 말하니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퇴직한 후 2012년부터 나는 연변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다. 새세대관심사업에 혼신을 다해온 지도 어언 7년이 되였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지만 나라에서는 나에게 전국 새세대관심사업 선진개인이라는 분에 넘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룡정현당위 부서기, 길림성정부 북경주재 판사처 부처장, 룡정시당위 부서기, 왕청현당위 부서기, 왕청현 현장, 연변주 인대상무위원회 당조 위원, 비서장, 연변주 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 등 여러 직무를 리행한 나로서 실로 생각하면 할수록 감개무량하다.

공화국의 70년과 같이하면서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농경사회에서 태여나 ‘문화대혁명’이란 혼란시기를 거쳐, 학습, 성장하여 사회주의건설에 뛰여들고 개혁개방의 세찬 물결 속에 합류하여 위대한 중국꿈을 이뤄가는 새시기를 맞이하였다.

날따라 륭성발전하는 조국은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여보니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만수천산을 다 넘어왔건만 나름 대로 보람찬 삶을 살아온 시대의 행운아라는 긍지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공화국과 동갑인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 김동운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일년중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소서, 왕청현 복흥농장 하니베리재배원은 그야말로 독야청청이다. 태양을 피할 나무 한그루 없이 재배원 주변은 훤하고 전망이 좋았다. 2008년 4무 될가하는 밭에&...
  • 2016-07-19
  • 길림성 룡정시 장애인정양보호원 원장 박해옥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장장 27년간 장애인사업을 해오면서 장애인들의 고통을 가장 잘 헤아리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여주면서 자신의 사랑을 몽땅 쏟아 넣고 있다. 장애인어린이들과 로인들로부터  “즐거움의 사절”로 불리우는 그는 각급 정부로부터 “...
  • 2016-07-04
  •   김복순할머니께 위문금을 전하고있는 연길시화린무역유한회사 리덕봉총경리(우1) 2016년7월1일,중국공산당창건 95주년을 기념하고자 연길시신흥가도민안사회구역 리미화서기의 안내로 연길시정협상무위원이자 연길시 화린무역유한회사 리덕봉총경리는 본 당위지부위원회 서기로서 지부전체 당원(량승만기검위원,한경...
  • 2016-07-03
  • 국제온돌학회, 중국 봉사활동 "우리 전통에 관심 가져줘 감동"   한국의 전통 온돌(구들) 전문가들이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농촌 마을을 찾아 우리나라 방식의 구들에 성공적으로 불을 댕겼다. 사단법인 국제온돌학회(회장 김준봉 우석대 교수)는 지난 13~20일 중국 지린성 투먼시 캉닝춘(康寧村) 한옥마을과 옌지 ...
  • 2016-06-28
  • 지난달 갑작스럽게 골육종 진단을 받고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한 김호진(가명`16) 군. 농구선수가 꿈인 호진이는 어린 시절부터 손에서 농구공을 놓아본 날이 없다. 건강하고 활발했던 호진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있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중학교 3학년인 지금 호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힘든 항암치료보다 ...
  • 2016-06-15
  • 천진시조선족로인협회는 천진시조선족친목회와 상회의 후원하에 진남구 송원 생태 향촌구락부 (津南区国家 农业科技园区 松江生态乡村俱乐部)에서 2016년 단오절 민속 활동을 진행했다. 8시 반부터 륙속 도착하는 전용 버스들에서 내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명절을 맞는듯한 환한 얼굴로 줄지어 대회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 2016-06-12
  • 연길시 조양천진 중평촌의 세 농민이 창업과 치부를 함께 꾀하고있어 주목받고있다. 2일, 중평촌회관 부근에 있는 무우와 수박 종자 육성 하우스에서는 벌들이 꽃을 옮겨다니며 “작업”에 충실...
  • 2016-06-06
  • “노다지농사꾼” 황만성인터뷰   지난5월 20일, 필자는 도문시 석현진수남촌 시선툰 김계월씨(62세)의 추천으로 남봉오동 두개 툰(신선툰, 흥진툰)의 유일한 한족 황만성을 인터뷰를 했다. 김계월은 지난 세기 8, 90년대에 성, 주, 시정부로부터 “축산왕” , “성로동모범”, &ldquo...
  • 2016-06-06
  • 어린이들의 명절인 6.1국제아동절에 즈음해 지난달 29일 주당위 조직부는 연길시 공원가두 원예사회구역과 손잡고 사회구역의 결손가정자녀, 빈곤가정자녀들과 함께 영화관람을 하며 특별한 명절을 보냈다. 이른아침,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사업일군들의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처음 오는 영...
  • 2016-06-01
  • “손자”“손녀”살피기 연길시 연춘지역사회와 연길시 동광소학교는 자매결연단위이다.4년전부터 지역사회의 6명 ”5로”들이 이 학교 6명 불우아이의 “대리할머니” ,“대리할아버지”로 나섰다.    28일,  “대리할머니” ,“대리할...
  • 2016-05-30
  •   新文化延边讯日前,珲春法院首次采用云会议系统审理了一起特殊的离婚案。丈夫到法院起诉离婚,妻子远在外地不肯回珲春参加离婚庭审,怎么办?   主审法官使用云会议系统采取视频开庭的方式,让原、被告和法官三方同时在电脑屏幕上进行庭审,困扰了双方七年的问题,30分钟内在网上解决了。   7年不见妻子 丈夫欲诉离...
  • 2016-05-28
  • ▲ 청주한국병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조선족 심장내과 전문의 김용철씨. 청주한국병원 제공 “최첨단 장비와 의료진들의 뛰어난 의술을 겸비한 청주한국병원에서 심장시술 등 여러 가지 선진의술을 많이 배우고 갑니다.”  지난 달 26일부터 한달동안 청주한국병원(이사장 송재승) 심장내과에서 연...
  • 2016-05-27
  • ▲ 한국 생활 9년차인 백승아씨가 청계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 아직은 ‘조선족’이라고 말하기가 두려운 김명숙씨가 서울시청광장을 돌아보고 있다(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다문화 편견에 마음 아프죠' 결혼이주 여성의 한국생활 한국 발전에 이바지 하고파 [천지일보=강은...
  • 2016-05-23
  • 28년전 세종병원서 심장수술로 새 생명 얻은 강수월씨가 지난 달 세종병원서 아이를 출산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박찬금 간호본부장, 문경원 행정부원장,권정복 간호1부장,강수월씨, 박진식이사장/세종병원 제공 28년전 심장전문병원인 세종병원에서 심장수술로 새 생명 얻은 조선족 강수월씨가 지난 달 세종병원에서 아이 ...
  • 2016-05-21
  • 어머니학교 12기 수료생들과 함께  연길 가정 행복협회 (회장 전웅렬, 부회장 김란영)에서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으며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데 초점을 두고 5월 12일,19일 이틀간 메가스터5층 (원 신흥 파출소5층)에서 아버지학교14기와 어머니학교 12기 수료식을 거행했다. 5월에 수료한 71명 원생들은 "비...
  • 2016-05-20
  • 지난 9일 오후에 우연히 만난 연길시중로년깃털제기협회 초대회장 김해룡로인(74세)은 매일 연길시 모아산 부근 민속촌뻐스정류장동쪽 깃털제기장에서 오전에는 바드민톤을, 오후에는 깃털제기를 즐긴다고 한다. 겉...
  • 2016-05-17
  • 2016년 4월 중순, 기자는 광동성 조선민족 련합회 사무국이 위치한 심수시 보안구 미란빌딩(美兰大厦)에서 서재봉(徐在峰 67세)로인과 김정덕(金正德 73세)로인을 만났다.  하루종일 축축하게 내리는 매우(梅雨)도 마다하고 먼곳에서 온 두 어르신의 몸에서 중년 못지 않은 름름함 풍채가 엿보였다. 이 두분은 현임 광...
  • 2016-05-15
  • 안녕하실줄을 믿고 인사말씀 생략하오니 리해바랍니다. 오늘 저 김용복은 무척 행복하고 기쁜 날입니다. 오늘 저는 저의 인생 3단계의 마지막 세번째로 사재 현금 33억원을 출원해서 “월정어린이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사회 각 계층에서 존경을 받는 일곱분들로 “월정어린이문화재단 준비위원회” ...
  • 2016-05-10
  • “조선족이 남방에 오면 조선말 하나 아는것이 큰 우세입니다. 거기다가 대학전업 하나 잘 쥐면 잘 나갑니다. 어지간하면 관리직에서 일할수있습니다.” “협회 하나 만들자, 서로 교제를 하고 서로 도우면서 지낼수있는 조선족협회를 만들자고했습니다.” 녕파조선족협회의 형성 녕파 호혜영성무역유...
  • 2016-05-10
  • 옌볜 허룽시 봄 진달래꽃 축제 조선족 마을 ‘진달래촌’ 7일간 축제  기와집·비빔밥 등 전통 관광상품화 옌볜의 봄은 한국보다 한 걸음 늦게 왔습니다. 가지만 휑하던 모노톤의 나무들 사이로 분홍, 빨강, 하얀 ‘색’이 피어납니다. 6개 시와 2개 현이 있는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면...
  • 2016-05-09
‹처음  이전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