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은실(李银实)
필명 몽실(梦实). 1984년출생
2009년 연변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 취득. 현재 북경민족출판사 근무
최근에 글을 왜 쓰냐는 질문을 몇번 받았다. 글쎄다. 나는 글을 왜 쓸가? 언제나 먹기보단 잠자기를 우선시하는, 잠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라 생각하는 ‘잠보’가 잠을 포기하고 새벽까지 컴퓨터앞에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이 행위를 뭐라고 해석할 수 있을가?
아무래도 나는 내 안에 생각들을, 내 맘속 이야기들을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듯 싶다.
어려서는 주로 입으로 재잘거려서 부모님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는동시에 ‘대꾸질’도 많이 한다고 해서 혼나기도 했고 지금은 글로 끝없이 주절거려서 독자들에게 조금의 즐거움도 주지만‘쓸데없이 나서서 한마디해야 직성이 풀리는’ 좀 시끄러운 아줌마로 되였다.
아직 치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 모든 것에 초연할 수 가 없다. 박수를 쳐주면 한량없이 즐겁다가 한소리를 들으면 우울해지고 화가 나고 분해지기도 한다. 이 시끄러운 감정의 오르내림을 겪지 않으려면 입을 닫아매면, 글을 안쓰면 세상 편할텐데 그럴수는 없어서 이 고생을 사서 한다.
“편하고 여유가 있는 모양이다. 글 자주 쓰는거 보니.”라고 간만에 말 걸어 오는 친구도 있다. 글이라는 걸 쓸 물리적인 시간이 아예 없었으면야 이런 끄적임을 할 여유도 없기야 할테지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육아기간에 제일 글 쓸 욕구를 많이 느꼈고 또 제일 많이 글을 썼던 걸 보면 꼭 편안하고 여유있어서 글을 쓴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바로 거기에 리유가 있지 않았을가 한다. 남 다하는 육아를 뭐 대단하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안고 병원에 다니면서 나는 꽤 피페해져 있었다. 모든 것을 시니컬하게 넘기는 엄마는 그게 다 손발이 너무 편안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일갈했지만 정작 나 본인은 손발 힘든 것만큼 외롭고 힘든 시간이였다.
내 시간이 없다는 것, 사회생활을 단절하고 내 안에 고이기만하는 말들을 쏟을 데가 없다는 것이 꽤 나를 힘들게 했다. 더 고이면 마음 전체가 썩을 것같아서, 그 말들을 쏟아내기 위해, 나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전에도 가끔 글을 발표하긴 했지만 그렇게 절박하진 않았다. 멋져보이는 구절들의 라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외롭고 힘든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나는 진심으로 내 마음과 마주한 글쓰기를 해야 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글쓰기’가 주는 마음치유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중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채널이 많지도 않았는데 각 방송국에서 다투어 <천룡팔부>를 방영하고 있었다. 얼마전 작고한 무협소설 대부인 김용의 작품이다.
학교만 가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지난 밤 방영한 그 드라마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군 했다. 뭐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휴식시간 10분내내 떠들어 놓고도 수업종이 울리면 자못 아쉬워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가는 그 다음 휴식시간이 되면 약속이나한듯 또 몰려서서 그 드라마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한 사람은 아예 축에도 낄 수 없을 지경이였다.
나는 그때 타방송국의 별로 인기없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대만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제목은 <爱在暴风里的日子里>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시끌벅적 떠드는 와중에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게 되였다. 서로 눈빛을 주고 받았고 나는 그 아이도 그 드라마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다들 <천룡팔부>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 그 아이와 나는 우리만의 드라마로 조용히 이야기꽃을 피워가군 했다.
어느 주말에는 전날 본 그 드라마를 너무 나누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그 아이를 찾아나섰다. 이웃 마을이라 십여분은 자전거를 타고 가야 했던 것이다. 자전거를 창고에서 내오는데 엄마가 어디가느냐고 물으셨다. 친구네를 드라마 본 이야기하러 간다고 하니 엄마가 “다 본 드라마를 다시 곱씹어 말하는건 무슨 재미냐?”며 혀를 끌끌 차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칼바람을 무릅 쓰고 눈섭을 날리며 그애의 집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어떻게 말할가? 걔는 어떻게 봤을가? 머리속으로 말 할 것들을 떠올리며 신나게…
엄마가 하신“무슨 재미냐?”의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것이 꼭“글을 왜 쓰느냐?” 하는 질문과 일맥상통한 것 같다. 량볼과 귀를 다 얼구며 그 찬날씨에 자전거 타고 친구네 집에 간밤 방영한 드라마 얘기하러가는 것은 대체 무슨‘재미’였을가? 나도 보고 그 아이도 본것을, 구태여 다시 떠올려 말하는 것은 대체 어떤‘재미’였을가?
밤잠을 설치고, 새우자세로 몇시간동안 글을 쓴탓에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픈데도 이 행위를 계속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리유일가?
감히‘소통’, ‘공감’을 나누는 미였다고 해보고 싶다. 처음에는 내가 가진 생각들을, 이 느낌들을 나랑 통할 것만같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며 공감을 얻고 싶었다. 그러다가는 나랑 안통하는 사람에게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 공감을 이끌어낸다면 참 보람있는 일이겠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통의 즐거움과 뿌듯함은 날로 커졌다.
그러다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최종 비결은 화려한 말발이나 어떤 기술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내 마음을, 내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 당대 작가 리패복(李佩甫)이 자신의 저서 <생명책>에서 “가진게 아무것도 없을 때‘성실함’이 가장 큰 무기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소통에서의 가장 큰 무기도 어쩌면‘성실함’일 것이다.
불필요한 장치를 걷어내고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 담백하게 꺼내보이려면 먼저 나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여야만 했다.
좋은 글은 독자와의‘소통’이 잘된 글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의 우에 군림하지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자세를 낮춘것도 아닌, 독자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마음속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나누며, 그리하여 독자 스스로가 행간을 읽게 만들고 질문을 품게 만들며 같이 느끼고 고민하게 하는 그런 글 말이다.
내 머리속에 생각들이 꽉 차서 넘쳐흐르고,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저절로 흘러나와 그 생각과 느낌들이 독자를 만났을 때, 제대로 된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아직 길우에 있다. 먼먼길을 향해 갓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한 초보이다.
어제 본 내용을 어떻게 친구에게 재미있게 전할가, 친구는 내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가?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한걸가? 즐겁게 그런 생각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부지런히 페달을 밟고 있는과정. 나는 아마 꽤 오래동안 길우에서 페달을 밟고 있을 것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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