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70년 당령(党龄)의 한춘옥 ‘마지막 공헌'으로 유체 기증을 선언
‘한춘옥 ’이름자와 전국 통일 번호(2785)를 밝혀 발급된 건국 70돐 기념장 소장함.
기자한테 자신이 받은 건국 70돐 기념장을 보여주는 한춘옥로인.
한춘옥로인(88세)은 1948년 3월 도문시 우정국 전화 교환수 직에 모집되여 선후로 도문시 우정국 ,룡정시 우정국에서 전화 교환수, 영업청 영업원, 부서 책임자로 일하다 퇴직한 분이며 1949년 12월에 당조직에 가입한 오랜 당원이다.
건국 70돐을 맞으며 로인은 건국 전에 혁명사업에 참가한 오랜 혁명로동자로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발급하는‘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 기념장'을 퇴직단위인 룡정시우정국을 통해 전달받았다.
룡정시우정국 한룡호 국장이 한춘옥로인에게 기념장을 달아드리고 찍은 기념사진./사진 류립민
룡정시우정국 지도부에서는 국경절 전 한춘옥로인을 방문하여‘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 기념장'과 함께 단위 위문금을 전달했다. /사진 류립민
“얘들아, 너희들은 당과 나라의 은혜를 갚아라.”
한춘옥은 매일 그 기념장을 보면서 격동을 가라앉힐 수 없어한다. 일전에 기자는 한춘옥을 찾았다. 허리 지병으로 행동하는데 불편해져 로인은 3년째 복리원에 옮겨와 만년을 보내고 있지만 정신력만은 좋아 신문 보기, 책 보기를 즐긴다.
“이 기념장을 받은 날 나는 밤새 잠 들 수 없었네. 이 늙은이를 당과 나라에서는‘성 쌓고 남은 돌’취급을 아니했다네. 무엇으로 이 깊은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한춘옥은 평생토록 당에 대한 신념, 나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저버린 적 없었고 세월과 더불어 더 절절해졌다고 말한다.
화룡의 한 시골에서 태여난 한춘옥은 유년에 부모 따라 살길 찾아 흑룡강성 목단강지역에까지 갔다가 광복을 맞이하고 15살 나는 해에 도문시에 와 정착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아버지와 오빠는 원한 속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남은 자식(한춘옥과 그의 두 남동생)을 먹여 살리고 공부 시켜보려고 갖은 고생을 다 했다. 한춘옥은 한번은 학비를 낼 수 없어서, 한번은 토비들의 기습에 못이겨 이리저리 피난다니다나니 퇴학을 반복하며 결국 고급소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도문시우정국의 로동자 모집에 응해 취직한 한춘옥은 “첫날부터 맡은 바 일을 잘하고 당을 따라 생명이 다하는 때까지 분투하리라 다짐했다.”는 자기의 낙언을 실천에 옮겼다.
“배운 지식도 없고 철 없는 나를 당조직에서 교육, 양성시켜 도문시우정국 화무반의 교환수로 일할 수 있게 하였고 당조직에 가입해 나중에는 반장직에 부임할 수 있었네.”
한춘옥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정국 화무반은 꽤 오랜 시기 전시 대응 태세로 통신 통도 접속 임무를 감당했다. 특히 항미원조전쟁시기 변강도시인 도문시에서는 방공 통금령이 무시로 하달 되군 했다. 전화 교환 접속 소통을 보장해야 하는 우리 화무반에서 반장인 나한테 유일하게‘특별통행증'이 발급되였는데 그건 내가 수시로 화무반으로 달려갈 수 있는 통행증이였다. 그 시기 사이렌소리 속에서 일터를 지키던 당년 우리 화무반의 정경을 잊을 수 없다...
한춘옥은 “당년 새 중국을 맞지 못했다면 남은 우리 가족들의 살길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취직해서부터 병약한 어머니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었고 두 동생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사범학교까지 나와 나중에 훌륭한 직장인으로 될 수 있었다.”며 당년에 어머니가 남기신 훈시를 되새긴다.
“얘들아 , 너희들 모두 듣거라. 참 좋은 세상(주: 새 중국)이 왔구나. 지금 같은 좋은 세상이 빨리 왔다면 니네 아버지도, 형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을...니들은 꼭 일 잘해서 당과 나라의 은혜를 갚아라!”
룡정시우정국 주관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당년에 한춘옥이 조직에 바친 자서전에도 이 말이 적혀있었다.
공안계통에서 사업하던 남편이 룡정으로 조동하게 되자 한춘옥도 1963년에 룡정시우정국으로 조동했다. 직접적으로 고객을 상대하는 영업실에서 한춘옥은 한 우정(邮政)종업원으로서, 한 공산당원으로서 봉사, 공헌하는 직업정신을 더한층 확고하게 실천했다.
한춘옥은 한생을 당과 나라에 대한 감은의 마음으로 ,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분투해왔지만 아직도 그 기여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기자가 지난날의 성적과 영예에 대해 물으니 한춘옥은 “뭇지도 쓰지도 말라”며 영예증서도, 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룡정시우정국의 소개에 의하면 그는 다년간 단위의 선진생산자 및 기준병이였고 연변 우정계통 영업원대오의‘전면능수'였으며 1964년, 1965년에 련속 길림성우정계통선진생산자(사업일군)기준병으로 표창받았다. 하여 한춘옥은 당년 전국향촌우편배달원 기준병이며 영화 《기러기》의 원형인물인 리호천과 함께 본보기 벽보란에 이름을 나란히 올린 기억을 남기기도 했다.
의학원에 편지를 쓰고...유체 기증 념원과 신청 사실 공개 리유
연길시의 모 복리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한춘옥은 불가항력적인 실락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새 시대정신을 학습하고 터득해오면서, 복리원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찾게 되였다. 로인은 퇴직 후에도 당학습, 조직생활을 견지해왔고 복리원에 와서는 줄곧 당간행물을 손에서 놓은 적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복리원 임직원들로부터 신문, 잡지, 책자들을 꼭꼭 챙겨받는‘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무엇으로 당과 나라에 보답해야 하겠는가? ”
심사숙고끝에 로인은 ‘유체 기증’념원을 가지게 되였다. “죽은 후 유체가 죽은 사람이나 가족한테는 의미는 없다고 보네. 그러나 난 나의 유체는 의학원 해부학 교수에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2017년 9월 15일, 한춘옥은 복리원의 침상에서 연변대학 의학원 원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의료사업에 쓸모 있다면 나중에 유체를 선듯이 공헌하겠습니다.”라고 씌여있었다. 그 편지는 곧 연변대학의학원유체기증접수쎈터 김범학 주임한테로 전달되였다. 하여 한춘옥로인은 자녀의 동의를 받는 등 절차를 밟아 2017년 9월 20일에 연변대학의학원유체기증접수쎈터에 유체 기증 신청인으로 등록되였다. 로인의 남편은 이미 돌아갔고 지금 로인슬하에는 아들 둘에 딸 하나 있다.
‘건국 70돐 기념장'과 함께 한춘옥은 깊이 간수해 두었던 유체 기증 신청 등록서를 기자한테 꺼내 보이면서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말했다.
“나의 유체 기증 등록 사실을 뒤늦게라도 공개하는 것은 그것도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로 인식되였기 때문이네. 의학 교수 연구에 유체 기증이 많이 부족하다고 하니 이 몸을 바쳐 기증자 한사람이라도 늘어난다면 그 역시 공헌이 아니겠나?”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3)이 다음 날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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