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해전》을 집필하기 위해 현지답사를 다니던 일화를 들려주는 저자 김순희녀사와 그의 아들 장상권
2019년 한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 연길시에 살고 있는 한 평범한 퇴직교원 김순희녀사(65세)는 연변대학에서 건교 70주년을 맞으면서 갓 출판한 《림민호평전》(한문)과 함께 올해 초 자신이 집필출판했다는 《김찬해전》 (조선문)을 들고 편집실을 찾았다.
항일구국의 선구자이며 조선족교육가, 원 연변대학의 부교장이였던 림민호와 연변부녀련합회 제1대 주석이며 교육가였던 김찬해는 부부였다. 김순희녀사는 김찬해는 자신의 고모라고 소개하면서 연변재정학교 영어교원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뒤 “김찬해전”을 출판하기 위해 6년간 아글타글 분투해 온 과정에 대해 들려주었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고모의 이야기
김순희 녀사의 어머니 박승조(92)는 치매끼로 오락가락 하면서도 제정신이 들 때면 딸에게 한마디씩 하군 하였다.
“문자교원을 했다는 사람이 고모같이 훌륭한 녀성혁명가를 책으로 써내지 못하면 고모 앞에 미안하지도 않은가?”
어쩌면 어머니의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소 어머니와 고모는 자별한 시누이올케사이로서 가담가담 오가며 이왕지사들을 주고 받았다. 어린시절부터 귀동냥으로 영화에서나 볼법한 제1대 조선족녀성혁명가 김찬해 고모의 전기적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김순희녀사는 자신의 고모를 높이 공경하고 흠모해왔던 것이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맞는 2019년 년초에 출판된 《김찬해전》과 년말에 출판된 《림민호평전》
녀자라는 이름으로 60대를 살고있는 지금 다시 한번 전세대 녀성혁명가 김찬해의 파란많은 인생살이를 그려보노라니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이 착잡해졌고 저도 몰래 눈물부터 앞섰다.
1905년 한국 부산에서 출생한 고모는 8살을 잡으면서 다른 애들과 함께 할아버지 서당에 공부하러 들어섰다가 녀자라는 리유로 가차 없이 쫓겨났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 싶어 문턱 밑에 몸을 숨겨가며 몇 해 째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틈새 도적공부를 해냈다.
어느덧 처녀로 성장했을 무렵 부모들 사이에 약정된 혼사를 눈앞에 두고 몰래 가출을 하여 반년동안 걸어서 서울로 올라간 고모, 고학을 하며 학교공부를 마치고 서울동덕녀자학교 교단에 올라섰던 고모, 일제의 식민통치로 국민들은 자기 민족 언어문자를 빼앗기고 이름자마저 빼앗겨야 하는 암흑에 맞서 반일비밀활동을 전개하며 일제헌병들의 추격에 몇번이고 목숨을 잃을 번 하면서도 견결히 혁명의 길로 나아갔던 고모...
1928년 혁명조직의 추천으로 쏘련 모스크바동방대학의 첫 조선인 녀류학생이 되여 맑스레닌주의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견정한 공산주의전사로 되며 녀성해방운동을 세계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녀성혁명가로 성장한다.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 공동한 혁명리상을 품은 북간도(지금의 연변) 청년 림민호와 만나 둘은 사랑을 속삭이고 백년가약을 맺었으며 1931년 아들 '마이'를 보게 된다. 4년간의 학습을 마치고 1932년 9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자국으로 돌아가 로동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는 정당을 건립하기 위해 홍색로동조합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맡고 그들 부부는 모스크바를 떠난다. 고모는 갓 돌이 지난 어린 아들을 젖가슴에서 떼여 내여 쏘련국제고아원에 맡기고 남편 림민호와 함께 흔연히 귀국혁명의 길에 올랐다.
그들 부부는 쏘련, 조선, 중국을 넘나들며 인민대중을 묶어 세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헌병들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림민호는 옹근 7년을, 김찬해는 3년 반 판결을 받고 비인간적인 고문과 혹형 앞에서도 굴함 없는 옥중투쟁을 견지하였다.
1939년 7월, 만기석방되여 가출한지 17년 되는 부산 본가집으로 압송되여 간 김찬해는 헌병들의 눈을 피해가며 인민대중들에게 반일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독립운동으로 이끌었으며 막내동생 김찬천(김순희녀사의 아버지)이도 혁명대오에 가입시켰다.
40년대 중엽 림민호(뒤줄가운데) 김찬해 부부와 김찬해의 두동생
1941년 서울 서대문감옥에 갇혀 적들과 굴함없이 싸우며 영웅으로 떠올랐던 남편 림민호는 만기석방되였고 지하조직의 엄호로 김찬해는 한국 부산에서 중국 '북간도'에 와 남편과 만난다. 이어 부산에서 뒤미처 들어온 동생 김찬천이와 셋은 항일유격대조직을 찾아 돈화림산작업장에까지 들어가 생활하면서 항일선전을 하고 대중들을 동원하며 지하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광복전야에 일제놈들의 최후발악에 걸려 그들 부부는 또 옥고를 치렀다. 일제놈들의 투항과 함께 1945년 8월 16일 감옥문이 열리면서 그들 부부는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해방후 림민호는 돈화민주동맹위원회 위원장, 돈화현인민정부 부현장으로 되고 김찬해는 돈화민주동맹 부녀부 부장으로 당선된다. 그녀는 녀성들을 동원하여 총을 메고 토비들과 피어린 투쟁을 벌렸다. 1946년 11월 김찬해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길림성부녀동맹지도사업을 담당하게 되였으며 1948년 7월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길림시에서 연길로 옮기면서 그녀는 연변부녀사업 제1임 책임자로 된다.
연변대학 부교장이였던 림민호와 연변부녀련합회 제1대 책임자였던 김찬해는 가정에서는 따뜻하고 친절한 고모부이고 고모였다. 그들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살아왔던 김순희는 ‘문화혁명’의 박해를 받아 비참하게 운명한 그들 부부를 상기할 때마다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여생에 고모 김찬해만이라도 꼭 빛을 보게 하고저 사명감을 안고 ‘김찬해전’ 집필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자료수집을 위해 고모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김순희녀사는 우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녀련합회며 당안국 자료실, 도서실을 몇십번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그는 당안국의 한광춘선생이 추천해주는 연변대사기와 해방초기 력사배경을 담은 서류들을 한아름씩 안고 돌아왔다. 하나의 단서를 잡기 위해 열곳도 더 다녀야 했다. 그랬어도 제1대 조선족녀성혁명가, 부녀사업자, 교육자로서의 김찬해의 력사와 인생를 증명할 수 있는 력사자료는 거의 공백이다 싶었다. 훼멸성 〈문화혁명〉의 피해를 또 한번 심절히 느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에서 적극적으로 배합해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시끄럽고 귀찮아 훌훌 던져 주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얻고저 하는 서류를 손에 쥐게 되면 그보다 더 큰 감격이 따로 없었다. 김순희녀사는 자료수집을 위해 아들 장상권과 함께 고모를 안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까지나 찾아 나섰다. 고모의 발자취가 찍힌 연변의 방방곡곡을 샅샅이 누볐고 고모가 생활하였던 한국의 여러 도시와 시골에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한국의 전쟁기념관에도 한국독립기념에도 김찬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고모의 원명인 김필수의 청년시절의 항일지하투쟁행적이 기록되여 있었던 것이다!
1932년도에 쏘련 국제고아원에 두고 온 큰아들 마이(뒤줄 왼쪽)는 1960년도에 가족을 거느리고 연길에 와 부모형제를 만났다
김필수가 서울락원동에서 녀성들의 대중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중앙녀자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는 기록과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하여 독서회와 웅변회를 조직하면서 녀성청년들에게 항일민족독립에 관한 선전활동을 전개한 사적을 발견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외에도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일제경찰들의 총탄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주하기도 하고 신분을 바꿔가며 정보를 수집하고 가는 곳마다에서 민족독립의 불씨를 뿌렸던 사적들도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고모의 항일투쟁력사를 알면 알수록 하루빨리 책자를 펴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의지만 굳세여져 갔다. 김순희녀사는 출판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의 음식점에서 알바일을 뛰기도 하였다. 평생 교단에 섰던 사람이 음식점 주부로 일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고 일에 줄시가 없어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먹어가면서 일하였다.
“난 세상에 욕이 그렇게 많은 줄을 그때에야 알았어요. 그러면서도 고모의 평전을 출판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이 개의치 않게 느껴졌지요.”.
집필을 위해 문학창작학습반에 다니다
김순희 녀사는 평전집필을 위해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문학창작학습반에 다니면서 강사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실은 번연히 알고 있어도 도저히 필이 내려가지 않았어요. 글 쓰는 작업이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하도 힘들어 하니 의사이면서 문학에 흥취를 갖고 많은 독서를 하고 있는 아들이 첫머리를 떼고 제1부를 써내려갔어요. 그제야 뒤를 이어가며 5년동안 겨우 15만자에 달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
1961년 김찬해의 막내동생 김찬천과 안해 박승조 장인을 모시고. 앞줄 오른쪽 첫사람 어린시절의 저자 김순희
문학창작반 교단에 오르셨던 연변대학 문학박사 김호웅 교수는 친히 초고를 심열해주고 귀중한 건의를 제기해 주었다. 교무주임 우광훈선생도 수정의견을 적어주면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은 김순희 녀사는 또 원 연변대학 박문일 교장과 손동식 교장을 일일이 찾아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한어학부 주하 교수님의 열정적인 도움으로 책자 출판을 위한 여러 경로를 열어나갔다.
하도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지지성원하는 바람에 원고는 또 김병민 교장한테도 전해졌다. 김병민 교장은 “이 원고는 출판가치가 있으니 꼭 출판하기 바랍니다. ”라는 긍정과 함께 기대를 전해왔다.
그 간곡한 기탁에 백배의 신심과 용기를 가진 김순희 녀사는 흔들림 없는 집념으로 책 출판을 다그쳐 나아갔다. 그리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녀련합회 조어금 주석한테도 원고를 전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부주장으로 사업하는 조어금 주석은 너무나 평범하고 틀이 없이 그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워낙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인데 녀사님께서 아드님과 함께 로고를 마다하지 않고 인물취재와 현지답사까지 하면서 녀성사업선구자의 전기를 우리 앞에 생동하게 펼져주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국경 1주년을 맞으며 중공연변지위에서 모주석께 드리는 선물 한복을 연변녀성들과 함께 손수 지은 김찬해(앞줄 오른쪽 세번째)
조어금 주석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김찬해전》의 출판비용을 해결해 주었고 이 책의 머리말까지 써주었다.
-〈나라에 리롭다면 생사를 가리지 않으리니 어찌 화를 피해 복만 받으려고 애쓰랴.〉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련합회 제1임 책임자로 사업하였던 김찬해녀사의 좌우명이다.
오늘날 이 말을 다시 되뇌여 보노라면 숙연한 마음에 고개가 숙어진다. 로일대혁명가의 대공무사한 봉사정신, 고상한 품격을 이 책을 통하여 되새겨보게 된다…
김순희녀사와 그의 아들 장상권(30세)은 《김찬해전》의 출판을 두고 “김찬해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고 우리 가문의 자랑이였습니다. 흔치 않은 녀성혁명가의 평전을 문학가도 작가도 아닌 저희들이 완성해낸 것은 순 마음으로, 혈륙의 정으로 써낸 것입니다. 주위에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셨기에 출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큰 일을 한것 같아 마음이 뿌듯합니다!”라고 감개를 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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