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찬해전》과 김순희 그리고 그의 아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월2일 17시00분    조회:126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김찬해전》을 집필하기 위해 현지답사를 다니던 일화를 들려주는 저자 김순희녀사와 그의 아들 장상권

2019년 한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 연길시에 살고 있는 한 평범한 퇴직교원 김순희녀사(65세)는 연변대학에서 건교 70주년을 맞으면서 갓 출판한 《림민호평전》(한문)과 함께 올해 초 자신이 집필출판했다는 《김찬해전》 (조선문)을 들고 편집실을 찾았다.

항일구국의 선구자이며 조선족교육가, 원 연변대학의 부교장이였던 림민호와 연변부녀련합회 제1대 주석이며 교육가였던 김찬해는 부부였다. 김순희녀사는 김찬해는 자신의 고모라고 소개하면서 연변재정학교 영어교원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뒤 “김찬해전”을 출판하기 위해 6년간 아글타글 분투해 온 과정에 대해 들려주었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고모의 이야기

김순희 녀사의 어머니 박승조(92)는 치매끼로 오락가락 하면서도 제정신이 들 때면 딸에게 한마디씩 하군 하였다.

“문자교원을 했다는 사람이 고모같이 훌륭한 녀성혁명가를 책으로 써내지 못하면 고모 앞에 미안하지도 않은가?”

어쩌면 어머니의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소 어머니와 고모는 자별한 시누이올케사이로서 가담가담 오가며 이왕지사들을 주고 받았다. 어린시절부터 귀동냥으로 영화에서나 볼법한 제1대 조선족녀성혁명가 김찬해 고모의 전기적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김순희녀사는 자신의 고모를 높이 공경하고 흠모해왔던 것이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맞는 2019년 년초에 출판된 《김찬해전》과 년말에 출판된 《림민호평전》

녀자라는 이름으로 60대를 살고있는 지금 다시 한번 전세대 녀성혁명가 김찬해의 파란많은 인생살이를 그려보노라니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이 착잡해졌고 저도 몰래 눈물부터 앞섰다.

1905년 한국 부산에서 출생한 고모는 8살을 잡으면서 다른 애들과 함께 할아버지 서당에 공부하러 들어섰다가 녀자라는 리유로 가차 없이 쫓겨났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 싶어 문턱 밑에 몸을 숨겨가며 몇 해 째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틈새 도적공부를 해냈다.

어느덧 처녀로 성장했을 무렵 부모들 사이에 약정된 혼사를 눈앞에 두고 몰래 가출을 하여 반년동안 걸어서 서울로 올라간 고모, 고학을 하며 학교공부를 마치고 서울동덕녀자학교 교단에 올라섰던 고모, 일제의 식민통치로 국민들은 자기 민족 언어문자를 빼앗기고 이름자마저 빼앗겨야 하는 암흑에 맞서 반일비밀활동을 전개하며 일제헌병들의 추격에 몇번이고 목숨을 잃을 번 하면서도 견결히 혁명의 길로 나아갔던 고모...

1928년 혁명조직의 추천으로 쏘련 모스크바동방대학의 첫 조선인 녀류학생이 되여 맑스레닌주의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견정한 공산주의전사로 되며 녀성해방운동을 세계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녀성혁명가로 성장한다.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 공동한 혁명리상을 품은 북간도(지금의 연변) 청년 림민호와 만나 둘은 사랑을 속삭이고 백년가약을 맺었으며 1931년 아들 '마이'를 보게 된다. 4년간의 학습을 마치고 1932년 9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자국으로 돌아가 로동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는 정당을 건립하기 위해 홍색로동조합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맡고 그들 부부는 모스크바를 떠난다. 고모는 갓 돌이 지난 어린 아들을 젖가슴에서 떼여 내여 쏘련국제고아원에 맡기고 남편 림민호와 함께 흔연히 귀국혁명의 길에 올랐다.

그들 부부는 쏘련, 조선, 중국을 넘나들며 인민대중을 묶어 세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헌병들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림민호는 옹근 7년을, 김찬해는 3년 반 판결을 받고 비인간적인 고문과 혹형 앞에서도 굴함 없는 옥중투쟁을 견지하였다.

1939년 7월, 만기석방되여 가출한지 17년 되는 부산 본가집으로 압송되여 간 김찬해는 헌병들의 눈을 피해가며 인민대중들에게 반일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독립운동으로 이끌었으며 막내동생 김찬천(김순희녀사의 아버지)이도 혁명대오에 가입시켰다.

40년대 중엽 림민호(뒤줄가운데) 김찬해 부부와 김찬해의 두동생

1941년 서울 서대문감옥에 갇혀 적들과 굴함없이 싸우며 영웅으로 떠올랐던 남편 림민호는 만기석방되였고 지하조직의 엄호로 김찬해는 한국 부산에서 중국 '북간도'에 와 남편과 만난다. 이어 부산에서 뒤미처 들어온 동생 김찬천이와 셋은 항일유격대조직을 찾아 돈화림산작업장에까지 들어가 생활하면서 항일선전을 하고 대중들을 동원하며 지하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광복전야에 일제놈들의 최후발악에 걸려 그들 부부는 또 옥고를 치렀다. 일제놈들의 투항과 함께 1945년 8월 16일 감옥문이 열리면서 그들 부부는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해방후 림민호는 돈화민주동맹위원회 위원장, 돈화현인민정부 부현장으로 되고 김찬해는 돈화민주동맹 부녀부 부장으로 당선된다. 그녀는 녀성들을 동원하여 총을 메고 토비들과 피어린 투쟁을 벌렸다. 1946년 11월 김찬해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길림성부녀동맹지도사업을 담당하게 되였으며 1948년 7월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길림시에서 연길로 옮기면서 그녀는 연변부녀사업 제1임 책임자로 된다.

연변대학 부교장이였던 림민호와 연변부녀련합회 제1대 책임자였던 김찬해는 가정에서는 따뜻하고 친절한 고모부이고 고모였다. 그들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살아왔던 김순희는 ‘문화혁명’의 박해를 받아 비참하게 운명한 그들 부부를 상기할 때마다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여생에 고모 김찬해만이라도 꼭 빛을 보게 하고저 사명감을 안고 ‘김찬해전’ 집필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자료수집을 위해 고모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김순희녀사는 우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녀련합회며 당안국 자료실, 도서실을 몇십번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그는 당안국의 한광춘선생이 추천해주는 연변대사기와 해방초기 력사배경을 담은 서류들을 한아름씩 안고 돌아왔다. 하나의 단서를 잡기 위해 열곳도 더 다녀야 했다. 그랬어도 제1대 조선족녀성혁명가, 부녀사업자, 교육자로서의 김찬해의 력사와 인생를 증명할 수 있는 력사자료는 거의 공백이다 싶었다. 훼멸성 〈문화혁명〉의 피해를 또 한번 심절히 느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에서 적극적으로 배합해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시끄럽고 귀찮아 훌훌 던져 주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얻고저 하는 서류를 손에 쥐게 되면 그보다 더 큰 감격이  따로 없었다. 김순희녀사는 자료수집을 위해 아들 장상권과 함께 고모를 안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까지나 찾아 나섰다. 고모의 발자취가 찍힌 연변의 방방곡곡을 샅샅이 누볐고 고모가 생활하였던 한국의 여러 도시와 시골에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한국의 전쟁기념관에도 한국독립기념에도 김찬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고모의 원명인 김필수의 청년시절의 항일지하투쟁행적이 기록되여 있었던 것이다!

1932년도에 쏘련 국제고아원에 두고 온 큰아들 마이(뒤줄 왼쪽)는 1960년도에 가족을 거느리고 연길에 와 부모형제를 만났다

김필수가 서울락원동에서 녀성들의 대중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중앙녀자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는 기록과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하여 독서회와 웅변회를 조직하면서 녀성청년들에게 항일민족독립에 관한 선전활동을 전개한 사적을 발견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외에도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일제경찰들의 총탄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주하기도 하고 신분을 바꿔가며 정보를 수집하고 가는 곳마다에서 민족독립의 불씨를 뿌렸던 사적들도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고모의 항일투쟁력사를 알면 알수록 하루빨리 책자를 펴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의지만 굳세여져 갔다. 김순희녀사는 출판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의 음식점에서 알바일을 뛰기도 하였다. 평생 교단에 섰던 사람이 음식점 주부로 일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고 일에 줄시가 없어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먹어가면서 일하였다.

“난 세상에 욕이 그렇게 많은 줄을 그때에야 알았어요. 그러면서도 고모의 평전을 출판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이 개의치 않게 느껴졌지요.”.

집필을 위해 문학창작학습반에 다니다

김순희 녀사는 평전집필을 위해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문학창작학습반에 다니면서 강사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실은 번연히 알고 있어도 도저히 필이 내려가지 않았어요. 글 쓰는 작업이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하도 힘들어 하니 의사이면서 문학에 흥취를 갖고 많은 독서를 하고 있는 아들이 첫머리를 떼고 제1부를 써내려갔어요. 그제야 뒤를 이어가며 5년동안 겨우 15만자에 달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

1961년 김찬해의 막내동생 김찬천과 안해 박승조 장인을 모시고. 앞줄 오른쪽 첫사람 어린시절의 저자 김순희

문학창작반 교단에 오르셨던 연변대학 문학박사 김호웅 교수는 친히 초고를 심열해주고 귀중한 건의를 제기해 주었다. 교무주임 우광훈선생도 수정의견을 적어주면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은 김순희 녀사는 또 원 연변대학 박문일 교장과 손동식 교장을 일일이 찾아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한어학부 주하 교수님의 열정적인 도움으로 책자 출판을 위한 여러 경로를 열어나갔다. 

하도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지지성원하는 바람에 원고는 또 김병민 교장한테도 전해졌다. 김병민 교장은 “이 원고는 출판가치가 있으니 꼭 출판하기 바랍니다. ”라는 긍정과 함께 기대를 전해왔다.

그 간곡한 기탁에 백배의 신심과 용기를 가진 김순희 녀사는 흔들림 없는 집념으로 책 출판을 다그쳐 나아갔다. 그리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녀련합회 조어금 주석한테도 원고를 전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부주장으로 사업하는 조어금 주석은 너무나 평범하고 틀이 없이 그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워낙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인데 녀사님께서 아드님과 함께 로고를 마다하지 않고 인물취재와 현지답사까지 하면서 녀성사업선구자의 전기를 우리 앞에 생동하게 펼져주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국경 1주년을 맞으며 중공연변지위에서 모주석께 드리는 선물 한복을 연변녀성들과 함께 손수 지은 김찬해(앞줄 오른쪽 세번째) 

조어금 주석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김찬해전》의 출판비용을 해결해 주었고 이 책의 머리말까지 써주었다.

-〈나라에 리롭다면 생사를 가리지 않으리니 어찌 화를 피해 복만 받으려고 애쓰랴.〉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련합회 제1임 책임자로 사업하였던 김찬해녀사의 좌우명이다.

오늘날 이 말을 다시 되뇌여 보노라면 숙연한 마음에 고개가 숙어진다. 로일대혁명가의 대공무사한 봉사정신, 고상한 품격을 이 책을 통하여 되새겨보게 된다…

김순희녀사와 그의 아들 장상권(30세)은 《김찬해전》의 출판을 두고 “김찬해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고 우리 가문의 자랑이였습니다. 흔치 않은 녀성혁명가의 평전을 문학가도 작가도 아닌 저희들이 완성해낸 것은 순 마음으로, 혈륙의 정으로 써낸 것입니다. 주위에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셨기에 출판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큰 일을 한것 같아 마음이 뿌듯합니다!”라고 감개를 터놓았다.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 글 / 조련화 -   (흑룡강신문=도쿄) 2018년 5월 20일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우리 노래 대잔치가 도쿄 닛뽀리에서 성황리에 열렸고 나는 짝궁 훈이와 듀엣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였다. 꿈만 같았던 하루, 잊을수 없는 그날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의 계기가 되였다.   노래자랑에 참가하게 된것...
  • 2019-09-20
  • 독서에 심취한 전동빈,조예화부부의 이야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에 뛰여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종종 뉴스로 전해지기도 한다. 허나 월급을 주요 수입원으로 하는 그런 직장을 그만두고 금전적인 수익이 없는 공익사업에 뛰여드는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7년간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공무원직을 내려놓고 &...
  • 2019-09-16
  • 초등학생이 그린 테네시 대학교 로고(왼·로라 스나이더 페이스북)와 실제로 제작된 테네시대 티셔츠(오·테네시대 공식 트위터 계정). 미국의 한 대학교가 초등학교에서 놀림당하던 학생의 그림을 대학교 티셔츠로 제작했습니다. 친구들의 조롱으로 주눅 들어있던 이 아이와 부모는 어른들의 배려에 감동받았다...
  • 2019-09-14
  • 까치소리는 언제나 반갑고 그립다. 까치소리는 내 동년의 아름다운 추억중의 하나로 나의 마음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마을 앞 키 높은 백양나무 우에 둥지를 틀고 알을 까고 새끼를 키우며 가끔 마을의 낮은 지붕우로 “깍깍”거리며 날아지 날 때면 어쩐지 기분이 좋았던 나의 동년시절이다. 필자 홍순...
  • 2019-09-09
  • - 글 / 리연춘 -       (흑룡강신문=도쿄) 지난 가을쯤이였던것 같다.   이른 아침 한주일 먹거리를 장만하려고 우리집 부근의 아침시장으로 나갔다. 부지런한 한족들은 쌀쌀한 늦가을에도 사이사이에 발 들이댈 틈도 없이 일자로 길 한쪽에 난전을 펼치고 싱싱한 풋채소에 상긋한 과일에 고기까지 없는것이...
  • 2019-08-22
  • 련이은 장마로 올해 유난했던 무더위가 주춤하는 말복, 알라디조선족학교 72년 13기 졸업생동창생들이 고향마을-알라디를 찾아 큰소리로 “고향아, 우리가 돌아왔노라.”를 웨쳤다.   드디여 고향마을에 도착한 동창...
  • 2019-08-19
  • ‘인생 70 고래희’ 라고 하던데 내 나이가 벌써 73살 된다. “아이들은 날(日)이 빠르고 해(年)가 늦고 로인들은 날이 늦고 해가 빠르다”는 말과 같이 실로 감짝 사이에 한해가 지나니 말이다.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늙어서는 추억으로 산다더니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지나간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
  • 2019-08-19
  • - 글 / 한경애 -           개미 채바퀴 돌듯 석자 교단에서 달리고 달리다가 멈춰서 되돌아보니 어언간 3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사슴의 눈망울을 가진 꼬마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인간성을 키워주는 시간속에서 수많은 부동한 색갈의 이야기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엮어왔다. 내 기억의 푸르른...
  • 2019-08-16
  • 인생은 미완성 숙제   김 경 희   인생살이 굽이굽이 아리랑 열두 고개, 집집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듯이 나도 살면서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 문제들에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인생 매단계마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참으로 벅차고 억척스레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내 인생의 끝...
  • 2019-08-15
  • - 글 / 김미란 -       (흑룡강신문=도쿄) 오늘도 예전처럼 일 끝내고 집에 와서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고 작은 아들과 식탁에 마주앉았다.   무의식에 반찬 하나를 가리키며 아들한테 물었다.   "이 반찬 누가 제일로 좋아하지?"   "할아버지..."   "어떻게 알아???"   "엄마가 이 반찬 할 때마...
  • 2019-08-09
  • 코리아패션의 손향(좌1) 사장 연변지체장애인협회 리춘자(가운데) 회장에게 운동복을 전하고 있다. 연길 코리아패션의 손향 사장은 지난  8월 5일, 총동문회 회장단 일행과 함께 연변지체장애인협회를 방문, 운동복 20벌을 후원했다. 지체장애인협회 활동실에는 다가오는 연변주장애인좌식배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선...
  • 2019-08-08
  •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생활이 제일 구차한 촌민 기와집에 먼저 지난세기 70년대에 건설된 부흥촌 주택구 “이제 당의 지시에 따라 우리가 악전고투한다면 고향사람들이 저런 오두막에서 번신할 날도 멀지 않겠지” 제대하던 날 렴경창은 기와집 한채 보이지 않던 부흥마을을 ...
  • 2019-08-07
  •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기억속에 담아놓은 연길공항 오늘날 세상은 5G 시대에 들어섰고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고 있다. 나한테 가정용전화기가 절실했던 시대는 불과 25년전의 일에 지나지 않지만 먼 옛날 얘기처럼 고리타분하게 들린다. 를 맞이한 고향의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중국 연변에서 모바일의 혁신적인 변...
  • 2019-08-06
  •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연길 아들 집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렴경창옹. (사진설명: 렴경창부부(안로인 지난해 85세로 병고)는 슬하에 네 오누이를 두었는데 딸을 일찍 잃었고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대군인, 지금 세 아들은 다 외국에서 로무에 종사하고 있다. 렴...
  • 2019-08-05
  • 친구들과 함께(왼쪽 두번째가 리화옥씨). 꿈같은 고향나들이 마지막 일정으로 오늘은 두만강하류일대를 따라 중국대지의 제일 동쪽에 있는 ‘동방제일촌’훈춘시 경신진 방천 관광길에 나섰다. 5월 1일 아침 여섯시 정각, 큰 언니가 새벽부터 정성껏 말아준 김밥을 넉넉히 싸가지고 약속된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
  • 2019-08-02
  •   - 글/ 박영옥 -    오늘은 토요일이라 애들이 작문배우러 오는 날이여서 여느때보다 일찍이 일어나서 아침 먹고 이쁘게 화장을 하고는 반시간 앞두고 림시로 빌려쓰고 있는 로인대학2층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몇몇 애들이 벌써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본 애들은 쫑그르 달려와서 저마다 나한테 인사를 했...
  • 2019-07-31
  •              하늘아래 빈자리에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 수 없는 내가 서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가? 그리고 또 어디로 갈것인가? 이 물음에 답안을 작성해 본다면 조금은 식상하지만 절때로 흠을 잡을 수 없는 답이 나온다. 나는 주련화이고 엄마의 배속으로 부터 왔으며그...
  • 2019-07-30
  • "생명의 강, 만남의 강, 희망의 강"으로 마음속 깊이 여울치는 강   두만강가의 중조국경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리화옥(가운데 사람)특파원 기다리던 4월 30일, 아파트문앞에서부터 도문까지 택시타고 가는데 40분 밖에 안 걸린다고 했지만 나는 부득부득 30분동안 공공뻐스를 타고 연길서역으로 향하였다. 고향에...
  • 2019-07-29
  • 진달래축제 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오른쪽 두번째가 리화옥특파원) 십여년만의 고향방문길에 마침 화룡에서 열리는 장백산진달래국제 문화관광축제에 참여할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였다. 27일 아침 6시 30분, 축제에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여 부랴부랴 아파트밑에 내려갔더니 중학교시절의 친구가 새까만 윤기가 흐르...
  • 2019-07-26
  • - 글 / 김영숙 -   (흑룡강신문=하얼빈) 오늘은 사촌녀동생이 백년가약을 맺는 날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사촌녀동생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내 눈앞에는 꽃너울을 곱게 쓰고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우리 김씨 가문에 들어선 올케의 예쁜 얼굴이 선히 떠올...
  • 2019-07-25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13 1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