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랑만(최화)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월19일 08시20분    조회:195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청춘노트]

문학임을 알고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갓 상해에 도착했을 때의 나의 모습은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찌는듯 한 8월의 오후, 나는 40여시간의 여정을 마치고 상해역에 내렸다. 출구를 빠져나오면서 나의 시야에 들어온 건 사면이 빼곡히 들어 앉은 고층건물과 그 아래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차량들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해의 방언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고 머리 바로 위에서 내리 꽂히는 듯한 더위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땀이 나를 착잡하게 했다. 이 도시에 유일하게 믿고 온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날 따라 하숙집의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했던 그의 룸메이트 때문에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나는 기차역 출구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다.

20대의 햇내기에게 삶의 고민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가장 절박했던 건 생존본능이였다. 대도시는 화려하나 그만큼 또한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집에서 가지고 왔던 밑천은 금방 바닥이 났고, 나는 월세마저 지급할 수 없을 정도의 궁지에 몰렸다. 취업이 안되던 날들, 머리속에서 한끼의 단가를 계산하며 먹었던 날이 있었고 교통비가 없어서 먼 거리를 걸어 다녔던 시간도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면접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빗속을 뛰였고 결국 속옷까지 다 젖은 상태로 면접실에 들어가 면접관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고 길에서 애 셋 데리고 길을 묻는 아줌마에게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리며 가르쳐 줬다가 그날 받은 한달급여를 탈탈 다 털린 적도 있었다. 터널을 지나는 같은 막막했던 순간이 있었고 그걸 극복을 하게 해준 따뜻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찾았던 와이탄, 검푸른 강 너머로 맞은편 꺼질 줄 모르는 빌딩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강에 뛰여 들어 죽겠노라고 하던 한 여자를 만난적도 있다. 몸의 반쯤 나가 있었고 정작 뛰여 들 용기는 없었던 건지 란간을 잡은 채로 그녀는 엉엉 울면서 후회하게 해줄 거라며 욕 비스무레한 걸 내뱉고 있었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끌어당겨 겨우 내려오게 했더니 스무살 쯤 되는 여자가 바닥에 퍼더리고 앉은 채 통곡을 했다. 대개 회사에서 억울함을 당했고 세상이 두렵고 고향에는 가지 못하겠고 그런 넉두리였던 거로 기억한다. 다들 그녀의 청승에 웃고 있었지만 어쩌면 씁쓸한 이방인의 입장은 똑같이 경험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평범한 80후의 모습이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80후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장경제하에 자기만의 불안감과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부모님의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빠른 절주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압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이 도시에서 16년을 살았다. 화려한 도시의 외관에 혹했던 콩깍지가 벗겨지는 데는 불과 반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현실의 벽과 거기에 부딪쳤을 때의 아픔.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 그리고 그걸 극복해가는 긴 시간의 성장통이었다. 의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긴 밤을 잠 못 이룰 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만났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들을 적었고 인상깊었던 순간들을 기록하였으며 내가 희망하는 상황과 세상들을 글에 담았다. 내세울 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으며 상당히 개인주의였고 거침이 없었다. 나는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했고 또 소통을 하고 싶었다. 그 때쯤 나는 날것 그대로의 내 생각을 온라인에 적어 내려갔다. 지금도 내 글에 달린 첫번째 리플을 기억한다. 딱 한구절이었다. “이것도 글이라고..” 피드백이 왔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 사람부터 붙잡고 설득해보고 싶었다.

운 좋게도 나는 나랑 비슷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잡지사의 프리랜서로 기사를 써주는 친구가 있었고 아이 둘을 키우며 무역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연구생 공부를 하는 학생도 있었고 알바를 하던 유학생도 있었다. 회사직원도 있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도 있었다. 온라인 창작의 활성화가 인터넷 문학을 형성하고 있었고 우리는 본명을 숨긴 채 아이디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각자 현실에서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고 밤이면 글을 썼다. 누군가가 글을 올리면 밑에는 독자들의 리플이 수두룩하게 달린다. 잘 읽었다는 감사의 메세지일 때도 있고 가끔 따끔한 혹평일 때도 있었으며 간혹 가다가 제대로 된 수준급 글평이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상이 안될 정도의 교감이 이루어졌다. 원고료 한푼 안나오는 일에 다들 열정을 불사르며 글을 썼고 짧게는 몇천자 길게는 20만자 이상의 글을 적어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인터넷 저 켠의 사람이 익숙해지고 위로가 되였다.

인터넷 문학의 형식은 자유롭고 특별한 구애를 받지 않는다.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가끔은 서로 끌리는 글쟁이들끼리 듀엣으로 작업을 할 때도 있었다. “냉정과 열정사이” 처럼 주인공의 다른 시선으로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했고 한사람의 글에 각자 다른 캐릭터로 답글을 쓰기도 했으며 그게 밑거름이 되여 나중에는 열몇명이 모여서 하나의 릴레이를 완성하기도 했다. 앞사람이 글을 쓰다가 어느 쯔음에서 끊어주면 뒷사람이 그걸 이어서 쓰는 고난이도의 팀웍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였다.

우리는 그렇게 20대를 보냈고 30대를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일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 할수밖에 없는 일 가운데 하고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왕이면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문학은 내게 그런거였다. 좋아서 하는 일.

우리는 여전히 글을 쓴다. 인터넷 위챗의 발전과 더불어 뜻이 같은 친구들이 모여 새로운 방식으로 글 동아리를 만들어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 문학의 단점을 보완하고 선배들의 노하우와 장점을 살려서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다들 여전히 갈고닦고 있다. 꾸준히 글을 쓰고 발표를 하며 삶의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 누군가 내게 글을 왜 쓰냐고 했다. 나는 여전히 문학의 참뜻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글을 쓰는 순간이 즐거워 꽤 오래동안 계속 써내려 갈것 같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거라 생각한다.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근사한 랑만이다. 그리고 그 랑만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와 생활과 삶을 마주한다.

최화(崔花),필명: 작도   1981.5월 조양천 출생. 현재 상해 거주. 연변 작가협회 회원. 자유 기고인. 창작노트: 삶의 모든 순간을 격하게 공감하고 싶다. 그리고 기록해 간다.

《도라지》 ‘80후’시선 2019년 제3호 발표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지난 8월 23일 오전, 북경에 자리 잡고 있는 랑시주식유한회사(동사장 신동일)가 오상 조선족 수재민들에게 100만원 물자를 기증했다. 이날 수재물자 기증식은 오상시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렸는데 랑시주식유한회사 신동억 가족대표와 신동철 동사장조리 등 4명이 신동일 동사장의 위탁을 받고 오상시에 와서 수재물자를 기증...
  • 2023-08-24
  • 5월 13일 아침 일찍 짐을 챙겼다. 두 밤을 지내며 홀랑 마음을 앗아간 보금자리를 떠나기 아쉬웠다. 하지만 더 좋은 호텔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볍게 문지방을 넘을 수 있었으니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우리가 투숙한 두번째 호텔의 이름은 림바란포레스트리조트(金巴兰森林度假酒店)이다. 발리는 이름이 길수록 호텔...
  • 2023-06-01
  • 아버지의 배웅 허향순   12년전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낼 때 아버지는 너무나 억이 막혀 아무런 말씀도 못하고 그저 내내 손만 저으셨다. 나는 그 외롭고 허무한 손짓에서 슬픔과 아픔을 읽었다. 그 해 아버지는 81세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고독을 견디...
  • 2023-03-20
  •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2022 총화대회 및 3.8절 행사 성황    이른 봄 피여나는 진래의 성미는 부지런한 연변녀성 우리들을 닮았다네 만산위의 허물 덮고 아름답게 피는 꽃 똘똘뭉쳐 피여난 진달래의 그 모습 나라 발전 민족 부흥 나눔 실천 앞장서는  거기가 어디냐 연변녀성발전촉진회&he...
  • 2023-03-06
  • 곰과 인연을 맺은 네 아이 엄마 최미화 '녀자'와 '곰', 두 단어는 원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한데 네 아이를 둔 가냘픈 엄마가 육중한 곰 45마리를 거느린다고 하면 더욱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그저 나온 말이 아니였음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저 한다. &...
  • 2023-01-08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기념 기획보도   2008년 북경올림픽 대학생 지원자로 근무하면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함께 대학생 지원자로 근무하는 조선족 총각을 만나서 사랑을 속삭일 때까지만 해도 저는 조선족 그리고 연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013년 봄에 그 총각을 따라 예비 시부모님을 뵈러...
  • 2022-08-29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기념 특별기획 박철원 선생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60돐을 경축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세월이 빨리도 흘러 어느덧 자치주성립70돐을 곧 맞이하게 되였다. 어언 10년세월이 흘렀어도 자치주성립60돐 경축행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로인 선전 봉사자'로 뛰여다니던 자랑과 긍지는 줄곧 내 ...
  • 2022-08-16
  • 다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황재형, 한수남 로부부가 청화대학생 둘을 양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상해의 조선족 응시생 김군림 학생이 상해시 3위의 우수한 성적으로 청화대학에 입학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김군림  학생은 어려서부터 자률적인 학습습관을 양성해왔고 품행도 단정하며 피아노 ...
  • 2022-08-11
  • 편집자의 말: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돐을 맞으면서 본사 편집부에서는‘나와 연변’타이틀의 기획보도를 륙속 펴내게 된다. 외부 시각에서 바라본 백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연변의 이모저모를 조명해보고 아름다운 연변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한다. /길림신문사 편집부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
  • 2022-07-25
  • 나에게는 누나가 없다. 그래서 청년시절까지는 누나가 있는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누나가 있으면 상냥하면서 부드러운 누나 사랑을 한껏 느끼면서 관심도 듬뿍 받고 응석을 부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팔자에도 없는 ‘누나타령’을 하면서 아무나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
  • 2022-07-24
  • 며칠전 동생이 이쁜 장갑을 끼고 엄마집에 왔다. 엄마는 그 장갑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 오른손에 껴보시는 것이였다.    “엄마, 욕심나시면 끼세요. 수박색이여서 환하지도 않아 엄마 얼마든지 낄 수 있어요”   동생의 말에 엄마가 급히 거절하셨다. “내가 이런 장갑 어떻게 낀다고 그...
  • 2022-07-20
  • 고희를 넘긴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 서면서 나는 자꾸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 보게 된다. 이중에서도 소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나의 꿈을 펼쳐주고 지식의 낟가리를 쌓아 주었으며 더우기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1954년 7월 나는 길림성 왕청현 동광진 동림소학교에 입...
  • 2022-07-14
  • 베네치아 려행을 끝내자마자 뻐스에 올랐는데 밤이 썩 깊어서야 로마에 도착했다. 이튿날,날씨부터 체크했다. 온도도 적당하고 해빛도 좋고 바람도 맞춤하고 게다가 도보려행이라니 얼씨구 신났다. 로마 일각 그런데 희한하게도 로마려행은 다른 나라 바티칸시국(梵蒂冈)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로마시내에 박힌 자그마한...
  • 2022-06-18
  • 5월 20일 이른 아침 독일 퓌센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꽤 먼길을 달려 이딸리아 베네치아(威尼斯)에 도착했다. 수상도시 베네치아 (水城 威尼斯) 국내 일반인들이 알고있는 베네치아는 그저 물우에 떠있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도시지만 연극인들에게는 좀 더 특별하고 신성한 도시로 다가온다. 그것은 베네치아가 세계적 ...
  • 2022-06-07
  •   작자 최청숙 우리 동네 삼꽃거리는 나에게 깊은 추억이 있는 거리입니다. 주덕해, 전인영, 요흔 등 분들이 살던 동네이고요 . 어린 시절 청년늪을 만드느라 땅을 파고 부르하통하의 물을 끌어올리는 것도 봤고요. 홍수에 제방뚝이 무너져 삼꽃거리가 강이 되여 파도 치던 일, 그래서 울 동네에서는 보따리...
  • 2022-06-05
  • 6년 전 이맘 때인 2016년 5월 19일 아침이였다. 독일 려행 준비를 마치고 스위스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역시 인간은 군거(群居)동물임이 틀림없다. 련 며칠 동행하면서 친절해진 동행들, 따뜻한 인사를 나누는 아침 얼굴이 화사하다. 버스 안, 처음과는 조금 달라져 간다. 여기저기 새 친구들 끼리끼리의 다...
  • 2022-06-05
  • 세계에서 제일 좋은 시계를 만드는 나라로만 알고 있던 스위스, 려행을 앞두고 지리 위치와 투어코스를 찾아봤다. 부유하고 평화롭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인심까지 넉넉하다는 스위스, 우리의 려행지는 루체른이란 작은 도시지만 본국 인들도 밀월을 즐길 때 자주 찾는 곳으로서 밀월마을 (蜜月小镇)이라는 별칭...
  • 2022-06-02
  • 나의 아버지는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2살, 삼촌은 7살, 고모가 3살로 한창 어머니품에서 응석 부릴 때였다. 개구쟁이로 뒹굴며 놀음에 빠질 나이였지만 아버지는 여념없이 밭일을 해야 했고 가무일까지 도와야 했다. 아버지는 손재간도 많았고 일솜씨도 좋았다. ...
  • 2022-06-02
  • 한국생활 체험기   동북지역의 편벽한 조선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해온지 28년이 된다. 90년대초부터 한국열이 불면서 나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전문 한국드라마, 뉴스를 시청하였다. 한국인 못지않게 드라마내용도 줄줄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취업비자 h-2를 따낸지 3년이 되였지...
  • 2022-05-26
  • 80고개에 들어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화려하고 가슴이 부풀며 랑만적으로 보낸 시절이 아마도 지난 세기 60년대 농촌에서 농업 생산로동에 참가하면서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소학교 3학년 때부터 맏형님이 사다주는 《조선아동》문학잡지를 열독하면서 글쓰기를 좋아했...
  • 2022-05-25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