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집은 5층으로 된 아빠트인데 내가 엄마 집에 간다고 하면 엄마는 아래층에서 날 기다리실 때가 많다.
엄마가 이렇게 내려오신 것은 내 다리가 걱정되였기 때문이다. 번마다 함께 올라갈 때면 엄마가 내 앞에 등을 내밀면서 말씀하신다.
“너 그 다리로 오르기 힘들 텐데 어서 내 등에 업혀.”
그럴 때면 나는 코마루가 쩡해난다.
두만강변에서 엄마와 함께.
인제는 88세의 고령인 엄마는 지난해 봄에 심장병이 도져 열흘 동안 입원치료를 받으신 후부터 매일 약을 달고 있는 상황이다.
젊은 사람도 5층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데 고령이고 심장병이 있는 엄마가 숨이 찬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
엄마 자신도 계단을 오르시기 무척 숨이 찬 데 번마다 날 업으려는 엄마를 볼 때면 나는 목구멍에서 그 무엇이 울컥하고 올리밀면서 인차 눈시울이 젖어난다.
내가 여직껏 엄마 등에 얼마나 업혔댔는 데…그렇게 많이 업어주시고도 싫증이 나지 않아서 륙십이 넘은 이 딸을 아직도 업고 싶어하시는 엄마!
뒤에서 엄마 뒤를 따라 수걱수걱 올라가는 나는 휘여든 엄마 등을 바라보면서 아리송한 꿈 한자락이 살푸시 눈 감고 내 마음에 자리함을 느끼군 한다.
소학교 다닐 때의 어느 비오는 날,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의 등에 얼굴을 파묻으면 엄마의 등에서 은은한 향이 풍겨나왔다.
찬바람 몰아치는 어느 겨울날, 엄마의 등에 얼굴을 파묻으면 대뜸 따스해났다. 엄마의 등은 정말 난로였고 바람막이였고 나의 큰 보호산이였다.
엄마의 등에는 또한 힘든 인생살이가 적혀있다. 자식 여섯을 등으로 업어키우셨고 봄이면 산에 가서 산나물을 등에 지고 돌아오셨고 여름이면 자식을 업고 강에서 빨래하셨고 가을이면 이삭주이, 산열매들을 등에 지고 집에 오셨다.
엄마 등에 업히워 우리 집에까지 오게 된 감자이삭, 벼이삭, 옥수수이삭으로해서 살림에 큰 보탬이 되였다.
번마다 음식을 맛 나게 먹는 우리를 보시며 엄마는 가을해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해진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 때 철부지였던 우리들은 자식들을 굶기지 않겠다고 등으로 그 무거운 이삭들과 산열매들을 지고 다니시던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가하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한번은 감자이삭을 주으러 뒤산으로 가신 엄마가 세시간 넘어서야 돌아오셨는데 마당에 들어서기 바쁘게 등에 진 감자이삭 주머니를 마당에 확 메치고는 저쪽에 가서 나지막이 우시는 것이였다. 자식들에게 눈물 안보이려고 구석진 곳에서 삶의 설음을 토해내셨다.
동생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맏딸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날 엄마는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이삭주머니를 등에 업긴했지만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한번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내려놓은 이삭주머니를 다시 등에 멜 수 없기 때문에 엄마는 허리를 마구 내리 누르는 무게로 해서 아픔을 감내시면서 집까지 겨우 오셨을 것이다.
그 날 저녁 자식들이 그 감자를 삶아서 맛 나게 먹는 걸 보시는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실 줄 몰랐다. 언제 봐도 불평의 목록 쏟지 않고 감사의 일람표만 공개하시는 엄마는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좀 힘들긴 했지만 그러나 너희들 잘 먹어주고 잘 커줘서 감사해!”
자식들의 기쁨을 등으로 바꿔온 엄마의 그 모성애는 오늘도 잊혀지지 않는 눈물겨운 이야기다. 엄마의 표정은 언제나 기쁨으로 군불을 지핀듯 얼굴색이 화사한 봄날이였다.
그 때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모든 걸 견뎌내는 그 속에서 무럭무럭 커가는 자식들로 해서 심령이 세척되셨을 것이다.
가난했고 힘들었던 삶의 무게는 엄마의 등을 무던히도 짓눌렀고 엄마에게 쉴 틈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어려움이 가슴에 말라붙을 지경이였지만 아침이슬 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희망으로 어두운 가슴에 화사한 정원을 가꾸셨다. 엄마는 등으로 일년 내내 우리 집의 곤혹을 무마해주셨고 온 집안에 웃음꽃을 피우셨고 희망의 노래를 엮으셨고 가난을 한뜸한뜸씩 기워내셨다.
엄마의 등에서 나는 동심의 향기를 찾아냈고 엄마의 등에서 동심의 꿈을 디자인했고 세상을 알기도 했다. 기실 엄마의 등에서 도란도란 오가는 이야기는 하나의 아롱진 무지개 꿈이였다. 뿐만 아니라 때론 장애란 설음을 엄마의 등에 엎디여 토해냈고 얼룩진 운명을 적어놓기도 했다. 엄마의 등은 이렇게 한권의 내 인생의 책이였고 나만의 작은 세상이기도 했다.
차차 나이들면서 엄마의 등과 멀리하게 되였지만 그러나 엄마의 등은 조금씩조금씩 휘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휘여든 등마저 쉴 틈을 주지 못했다.
스무네살 먹던 해 중병에 걸린 내가 향진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효과가 없어서 연변병원에 갈 때 나는 엄마 등에 업히워 진찰부에 갔고 서른 여덟살 때 다리 교정수술을 하느라 엄마 등에 업히워 병원의 계단을 오르내렸고 마흔두살 때 임신중절수술을 할 때에도 난 엄마 등에 업히워 수술실에 들어갔다.
어디 이뿐이랴, 내가 서른네살 때의 어느 한번 점심시간에 엄마 집에 가서 엄마와 함께 창고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난데없는 바람이 훅 불면서 창고지붕의 널판자가 날리더니 기와장 한장이 창고 안에 떨어졌다. 바로 내 머리 우로 내려오는 걸 어느 새 보아낸 엄마가 나를 확 밀쳐냈다. 난 무사했지만 그 기와장이 엄마의 등에 떨어졌다. 그 후로 엄마는 며칠간 허리를 잘 쓰지 못하셨지만 그래도 날 보실 때면 얼굴에 웃음을 짓군 했다.
아, 난 이렇게도 엄마의 등을 무던히도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나를 그냥 업으시려하시는 엄마! 휘여든 엄마의 등을 볼 때면 내가 엄마의 등을 휘여놓은 것 같다. 엄마의 등에는 엄마가 나에게 기울이신 사랑이야기가 몽땅 기록되여있다. 엄마는 그토록 힘들어도 삶 속에서 무지개를 찾기 위해 먼저 비를 맞으면서 견디는 련습을 많이 했으리라.
엄마는 어느 순간이라도 날 내려놓으려하지 않는다. 인제는 힘이 없으니 마음의 등으로 업으려하신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동네에 나서면 늘 날 자랑하신다고 한다.
그것은 자식자랑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장애자에 대한 편견과 멸시를 줄이기 위한 모지름이 아닐가 싶다. 장애자 딸을 둔 엄마는 늘 남들의 눈치를 보시군 한다. 그 누가 날 얕잡아보지나 않을가?
홀로 사는 엄마는 재작년까지 물통을 등에 업고 사흘에 한번씩 샘터로 다니셨다.
구부정한 허리로 물통을 업고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 내가 달마다 물값을 대여드릴테니까 물을 사면 되는 데 괜히 자식이 팔릴 짓이라고 책망한 적이 한두번 아니였 건만 엄마는 엄마로서의 쟁쟁한 대답이 있었다. 뭐, 운동삼아 물을 긷는다고. 늙었다고 성쌓고 남은 돌이 아니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란다. 비록 보기는 안쓰러웠지만 그러나 고령에 물통을 메고 다니시는 정도라 우리 여섯형제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식들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이며 자식한테 부담이 안되 게 살아가시려는 엄마가 참 감사했다.
한손으로 층계 란간을 잡으시면서 한걸음한걸음 올라가시는 엄마의 등을 바라볼 때면 세월은 엄마 등을 왜소하게 만들었지만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엄마 등은 영원히 따스하고 포근할 것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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