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선생님’
박순자
어느 날인가 뜬금없이 누군가로부터 할머니라 불리우는 바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적이 있다. 아마 47살 나던 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호칭이 무척이나 낯설고 귀에 거슬리긴 했어도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였다. 시력이 1.5로 유난히 밝던 눈이 갈수록 침침해져서 드디여 돋보기를 맞춰야 했던 것도 그 즈음이였으니 스스로 거부하고 싶어도 남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영낙없는 할머니였으리라.
17살의 풋풋한 내가 ‘재교육’을 받으러 ‘광활한 천지’-농촌으로 내려갔을 때 우리 또래의 눈에 할머니의 모습으로 비쳐진 농가의 녀인네들도 곰곰히 따져보니 그 나이가 기껏해야 40대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그러니 사람은 나이에 따라 다른 사람을 보는 눈도 그때그때 달라지는가 싶다.
그 날, 남새를 사려고 아침시장에 나갔다가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데 햇감자를 두둑이 담은 바구니를 앞에 놓고 싸구려를 웨치고 있던 한 한족 중년남자가 다가가는 나에게 제법 류창한 우리말로 말을 건네였다.
“아매, 이거 내가 집에서 먹으려고 터밭에 심은 거라서 농약이랑 전혀 치지 않았소. 영 맛 있소.”
나는 저으기 당혹한 얼굴로 수더분한 인상의 그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쭈그리고 앉아 비닐구럭에 감자를 골라 담으면서 시까슬렀다.
“에이, 아침부터 ‘아매’라는 소리가 재수없어서 사지 않으려고 하다가 우리말을 잘하는 게 이뻐서 사준다.”
그 말에 남자는 머쓱하게 웃더니 되물었다.
“어이구, 이거 미안하오. 그러문 뭐라 하문 좋소? 아줌마? 언니?”
“그래, 그 ‘언니’라는 소리가 듣기 좋네. 아니, 그냥 그 쪽 말루 ‘따제(大姐)’라구 해두 괜찮아. 암튼 나중에라두 아무한테나 ‘아매’라구 했다간 장사를 망칠 줄 알아.”
순한 인상을 가진 그 남자를 그렇게 한바탕 훈시하고 나서 자리를 뜬 뒤에도 나는 가끔 어정쩡해하던 그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피씩― 하고 웃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내가 아는 한 언니는 시장에 나갔다가 ‘아매’소리를 듣자 화가 치밀어 펄쩍 뛰면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하긴 ‘아매’소리가 ‘할매’나 ‘할머니’보다 은근히 귀에 거슬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야, 이 놈아! 어디를 봐서 내가 아매냐? 에이, 재수없어서 살 것두 안 산다. 아매라니. 에라, 진짜 아매한테나 콱 팔아먹어라!”
그런 심한 욕설을 늘어놓았는데도 너무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인지 대방은 입을 헤벌리고 멋적게 웃으면서 말대꾸 한마디 않더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눈물이 찔끔 나도록 배를 그러안고 한바탕 웃어제꼈다. 그러고 보면 진작에 어린 손자, 손녀를 치마꼬리에 달고 다니는 할머니들인데도 우리 또래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매’나 ‘할머니’ 소리를 들으면 한결같이 거센 ‘과민반응’을 보이군 한다. 본인이 거부한다고 해서 뿌리칠 수 있는 호칭도 아닌데 말이다.
연변 태생인 나는 흑룡강의 어느 한 오지에 시집 가서 30년간 줄곧 한족동네에서 살다가 할머니 딱지가 붙은 몇년전에야 고향에 아빠트를 장만하고 이사를 왔다. 세월이 흘러 예전에 나만 보면 옛말을 해달라고 졸라대던 어린 조카들도 의젓하게 자라서 여러 사업단위에서 어엿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를 만나면 덕담을 나눈다며 법석을 피워대는데 그게 나로서는 듣기가 여간 민망하지 않았다.
“아재, 건강하게 오래 앉아야 하오.” 그런데 이 ‘오래 앉으라.’는 소리가 ‘아매’ 소리 만치나 아니, 그보다 퍽이나 듣기 거북해서 속이 끓어번졌다.
“야, 오래 앉으라니 차라리 얼른 죽으라고 해라!”라는 말이 하마트면 내 입에서 튕겨나갈 번했다. 허나 귀에 거슬리긴 해도 분명 덕담이니 무작정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나이를 먹었음에 서글퍼할 따름이다.
수년간 흠모해온 녀선생님 한분이 있다. 직장에서 퇴직한 지 20여년이 된, 년세가 지긋한 녀선생님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국내외의 유지인사들과 협력단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자금을 모아 우리 민족 리더양성을 비롯한 여러 공익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나도 그 분이 이끌고 있는 녀성자원봉사팀에 가입했는데 평균년령이 70세인 팀원들은 다들 높은 경력과 자질을 갖춘 퇴직간부들이다.
선생님의 인도하에 우리는 ‘아껴서 나누고, 배워서 나누고, 벌어서 나눈다’는 원칙에 따라 각자 여건과 능력에 따라 해마다 적게는 이삼백원, 많게는 천여원 지어 만여원씩 회비로 내놓아 민족리더양성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와 동시에 옷과 신발을 비롯한 여러가지 생활필수품을 지원하는 등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도 적은 힘이나마 아낌없이 바치고 있다. 또 종종 조직하고 있는 특강 같은 걸 통해 새로운 시기에 자신의 위치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소임 등을 제때에 짚어가면서 자질을 꾸준히 향상시키고 있다. 우리 가운데는 로년대학이나 서법학원 같은 곳에서 활약하는 분들도 여럿인데 한결같이 자질이 높고 후더운 분들이라 여러 수상대에도 자주 오르고 신문, 잡지에도 심심찮게 얼굴이 나가군 한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니 우리 나이에는 아주 반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언니’나 ‘이모’ 같은 호칭도 격에 못 미친다면서 그냥 덮어놓고 서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나 역시 분에 넘치게 이 나이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보게 되였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성품이나 자질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꿀벌을 따르게 되면 늘 아름다운 꽃동산을 노닐 수 있듯이 몇년간 훌륭한 선생님들과 어울리면서 새롭게 터득한 도리가 있다. 호칭이란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여서 싫다고 나무란다고 해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반긴다고 해서 그냥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평소에 훌륭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좋은 일에 열성을 쏟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영예거나 존경이 덤으로 따라올 수 있다.
시내뻐스를 타다 보면 똑같은 로인 무료승차카드임에도 남녀를 구분해 각기 ‘로년카드’와 ‘석양홍카드’로 나눠놓은 걸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다. 그게 궁금해서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공짜로 주는 선물을 챙기려고 여러 광고행사장을 전전하는 할머니들이 자기 몫의 승차카드를 다 써버린 후 할아버지의 몫으로 된 승차카드를 쓰는 사례가 종종 검거되자 그걸 막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내가 살던 칠대하에서는 로인 무료승차카드의 리용차수가 무제한인 데 반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는 일인당 매달 50차로 정해놓고 있었다. 하긴 행사장 같은 데로 뻔질나게 다니지 않는다면 한달에 50차라도 넉근할 테지만 여러 행사장을 전전하다 보면 100차도 시원치 않을 것이니 그런 조치가 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본다.
가장 한심한 건 출근고봉기에 승객들로 법석이는 뻐스에서 간단없이 울려대는 그 ‘석양홍카드’소리이다. 진종일 딱히 바쁜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공짜로 주는 선물을 챙기려고 꼭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과 함께 숨 막히는 뻐스에서 부비적거려야 할가? 거기다가 종일 바삐 보내야 하는 직장인이나 학생들한테서 자리까지 양보받군 하는데 그런 배려를 받고도 미안해한다거나 감사의 답례가 없이 당연한듯 털썩 들어앉는 모습을 보면 렴치가 없다 못해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사실 따져보면 우리 팀의 선생님들과 어슷비슷한 년세들인데 사회인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나 공중도덕을 준수하는 자세에서 보여주는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현저한즉 그런 이들한테 어찌 ‘할머니’ 이외의 다른 호칭이 붙여지거나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으랴.
나라에서 우리 로인들을 배려해서 내준 무료교통카드이니 그 특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되 출퇴근고봉기를 피해 외출하는 아량은 보여주는 게 그에 걸맞는 자세이고 매너가 아닌가 싶다. 우리한테는 괜찮은 그 한시간 쯤을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남겨준다면 자연스레 대접이거나 존경이 뒤따를 것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맹물 할머니로 보이는 처신을 삼가한다면 이제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 얼마든지 기분 좋게 만년‘선생님’으로 불리울 수 있지 않을가.
<로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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