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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민들레꽃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월29일 10시21분    조회: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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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일본 김미란


 
김미란: 遼東大学 생물학부 졸업, 도문시 제1고급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현재 일본 金澤企画国際株式会社에 재직중

 
애들 학교 때문에 도쿄로 이사해 오던 때가 이른 봄이었는데 벌써 늦가을에 들어서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세월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하지만 시간 앞에서는 그 누구도 막을 길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오늘은 작은애가 공부하고 있는 학원 선생님과의 개별상담이 있어서 거기에 갔다가 나도 모르게 집근처의 강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늦가을의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높아 보인다. 2년전 망막 박리 수술을 받은 후부터 조그마한 자극에도 눈앞이 새물거리며 눈물이 자꾸 나서 나는 저 유난히 예쁜 하늘을 오래 바라볼수가 없었다. 그래도 육안으로 이만큼 자연을 보며 감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는 행복한 나머지 저도모르게 흐뭇한 표정으로 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문뜩 저쪽에 노랗게 피어 있는 한 송이의 민들레 꽃이 보였다. 그 옆에는 씨앗들이 모여 만들어진 솜털이 보송보송한 구球모양의 열매도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쭈크리고 앉아 민들레 꽃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봄이나 여름에나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 꽃이 이런 늦가을에 이렇게 한적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나를 기다려주기라도 한것 같아 설레이는 마음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민들레는 줄기가 없이 뿌리에서 바로 깃털모양으로 갈라진 잎이 모여나와 퍼진다. 그래서 “앉은뱅이”라는 별명도 있는것 같다. 민들레는 해열, 소염, 이뇨 등 효능도 있다고 하고 또 어린 잎은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던 작년까지만 해도 봄이면 어머니가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공원이나 강둑에 나가서 민들레를 캐 오셔서 우리는 쌈장에 생나물을 찍어 먹거나 무쳐 먹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중국으로 돌아가신 후로는 민들레를 아예 잊고 산 듯싶다. 그렇게 민들레를 바라보노라니 머릿속에 어머니의 모습이 노랗게 떠올랐다.
 
우리 어머니는 자그마한 키에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야무진 분이다. 그 그윽한 눈빛만 보아도 체구와는 달리 강직한 분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릴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성적은 항상 학교에서 으뜸이였다고 한다. 평범하게 살던 어머니의 가족에 폭풍우가 쏟아진것은 외할아버지의 형이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사촌형제 다섯이나 불시로 어머니의 집에 얹혀살게 된 때 부터이다. 외할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여자애인 어머니가 학교에 가는 것을 은근히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반대를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했고 보란듯이 중앙민족학원 입학통지서를 받았는데 결국 할아버지 때문에 함께 대학입시 시험을 본 사촌오빠만 대학에 가고 어머니는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 어머니가 많이 우셨다는 이야기를 외할머니 한테서 들은적이 있다.
 
사정을 아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어머니는 소학교에 민반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출근하면서 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기어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끝까지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어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시름시름 앓는 할머니 때문에 아버지네 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때 입덧이 심한 어머니가 안타까워 할머니가 어머니께 해주신 물만두속이 시래기에 된장과 설탕을 섞은 것이었다. 지금같아서는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다. 임신 반응이 심해 임신중독증까지 와서 어머니는 끝내 조산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 몹시 허약해서 하루가 멀다시피 병원에 다녀야 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영양을 따져가며 음식에 신경을 써주셨고 몸에 좋다는 보약까지 나에게 많이도 먹였다. 지금도 시간에 맞추어 약을 챙겨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의 몸이 점점 튼튼해 갔을 무렵 나는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내가 앞자리에 앉아서도 흑판의 글을 잘 보지 못한는다는 사실은 어머니에게 또 하나의 청천벽력이었다. 병원에 가서 안경을 맞추는데 아무리 도수를 높여도 0.7이나 0.8정도밖에 교정이 되지를 않았다. 내가 엄마 배속에서 영양부족 상태로 자란 것이 원인일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어머니한테는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처음으로 안경을 낀 내가 많이 잘 보인다며 좋아서 야단법석을 떠는데도 어머니는 한쪽에서 눈물을 머금고  “에그. 내 눈이라도 떼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 말이 어머니의 입버릇이 되었지만 그때 나는 아직 어머니의 그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로부터 어머니는 눈에 좋다는 것은 나에게 많이 해주셨다. 그 중에서도 신선한 개간이 눈에 좋다고 하여 어머니는 동네방네에서 개를 잡는다는 소식만 들으면 체면을 무릅쓰고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개간을 받아오시곤 하였다. 막무가내로 나에게 그걸 먹이는 어머니의 눈빛이 평시와 달리 너무나도 간절하고 처연해 보여서 울며겨자먹기로 간신히 억지로 삼키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2년전. 급작스레 생긴 망막박리때문에 나는 왼쪽눈을 두번이나 수술을 받게 되였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우리집에 함께 살고 계셨는데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같이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병문안을 오셨다. 멀미가 심하여 차 타기 엄청 싫어하는 어머니였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매일 같은 얘기만을 반복하시었다. “얘야. 아무걱정 말고 치료에 전념해. 혹 니 눈이 잘못되면 내가 이 두눈을 너에게 줄게. 내사 이제는 살만큼 살았으니 앞을 못 본들 뭔 대수겠니?! 지금은 심장까지 이식을 한다는데 눈이야 더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엄마가 널 지켜줄 거야.” 그러시는 어머니의 두눈은 왜서인지 수술을 받은 나의 눈보다 더 부어있었다.
 
후에 우리 애들이 그러는데 외할머니가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몇 달 후, 이번에는 후유증까지 생겨 다시 두눈을 수술하게 되었다. 수술후 나는 기적적으로 오히려 시력이 많이 회복되어 지금은 안경을 벗고 운전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마지막검사를 마치고 이소식을 들으신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엉엉 우셨다. 어머니의 예전의 강인한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나의 시력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다소 이해를 할 것 같았다.
 
내가 유치원 고급반이었을 때라고 기억한다.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일가게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노란 바나나가 보였다. 그때만해도 동북지역에서 바나나는 아주 비싼 과일중의 하나였고 바나나를 먹는것은 큰 사치였다. 나는 냉큼 바나나를 사 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는 두말없이 바나나 한개를 사서 나에게 주었다. “엄마는 안 잡수세요?”하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는 “나는 바나나를 싫어해”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종종 바나나를 잘 사 주셨는데 언제나 본인은 잡숫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는 정말로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줄로만 알았다. 20여년이 지나 손주들과 바나나를 맛있게 잡수시는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때에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나도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 새끼가 귀한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어머니가 그때 바나나를 나에게만 먹인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과일 중에서도 바나나를 제일로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바나나를 맘껏 드시게 할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몸이 약해서인지 밖에서 애들과 잘 뛰놀지도 못했고 그때문에 소심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다. 그러한 나에게 어머니는 짬짬이 시를 많이 읊어 주셨고 또 직접 지도해 주셨으며 각종 시 낭송대회에 나를 내보내 주셨다. 처음으로 나간 시낭송대회에서 나는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겨우 낭독을 마쳤지만 초급중학교에 가서는 학교 시낭송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을 만큼 실력도 늘었고 자신감도 늘었다. 고급중학교에서는 학생회 간부로 있었고 꽤나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이것 또한 어머니가 노심초사하신 덕분인 것이다.
 
어머니는 남동생도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키우셨다. 내가 소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이 되던 해였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온 남동생이 급기야 열이 펄펄 끓으며 얼굴도 파랗게 질려 갔다. 부랴부랴 병원에 다시 가서 받은 진단이 주사기에 의한 바이러스 오염이었다. 지금 같으면 큰 의료사고인 것이다. 거의 죽어가던 남동생은 2년이나 병원생활을 했고 그사이 네번의 큰 수술을 거쳐 겨우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두번째 수술후에도 동생은 가슴으로부터 발끝까지 마비상태 였다. 어머니는 낮이고 밤이고 정해진 시간이면 동생의 몸을 맛사지 하셨다. 그때 겨우 4살이였던 동생은 다른 애들이 뛰노는것을 보면 자기도 일어나 걷겠다고 떼를 썼다. 그래서 어머니가 양말과 신을 신겨주어도 감각이 없는 동생은 빨리 신을 신겨달라고 조른다. 어머니가 두개의 거울을 마주해서 동생한테 이미 신까지 신었다고 보여주자 동생은 울음보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우는 동생을 달래고 나서 병원복도에 나와 한참을 울다가 또다시 병실로 들어가 동생의 다리를 주물러 주셨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이었기에 그런 광경을 볼때마다 나는 커서 의사가 되리라 다짐하기도 하였다. 동생이 세번째 수술후 처음으로 양말을 신고 감각이 있다고 하자 어머니는 옆에 있던 나를 부둥켜안고 병실이라는 것도 잊은 채 울다가 웃고 또 웃다가 울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정성은 헛되지 않았다. 동생은 그 후로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랐으며 지금은 아들과 딸을 키우는 멋진 아빠로, 또한 직원 몇십명을 거느린 회사 사장으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동생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우리집은 동생의 병원비 때문에 빚더미가 쌓이게 되였다. 어머니는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부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밤낮이 따로없이 보내시던 어머니가 과로로 쓰러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버텨내셨다.
 
그렇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어머니는 빚을 청산하였고 우리집의 생활도 꽃피기 시작하였다. 이런 어머니의 피 타는 노력때문에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남 부러운 것 없이 자랐고 항상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시는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간암 진단을 받았다. 나도 잠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병 간호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들 학교때문에 부득이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귀국을 한주일쯤 앞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오른쪽 가슴이 자꾸 쿡 쿡 찌르는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신경통일거라고 하는 어머니를 억지로 끌다시피 병원에 모시고 갔다.
 
유방암 3기 란다.
 
나는 그만 머리속이 하얗게 되는것 같았다. 그 이튿날로 수술날자를 잡고 입원수속을 마쳤다. 그래도 어머니가 수술을 받으실 때 만이라도 내가 곁에 있을 수 있고 또 며칠이라도 병원에서 간호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이튿날 수술준비로 각종 혈액검사를 한 결과 어머니는 혈당수치가 너무 높아 당장 수술을 받을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아픈 아버지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어머니의 몸 상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혈당수치를 낮추는 치료부터 해야하니 수술날자는 언제가 될지 결론이 나지를 않았다. 다급하고 초조한 나를 어머니는 되려 위안해 주셨다. “얘야. 내걱정은 말거라. 네가 곁에 있다고 수술이 더 잘 되는것도 아니고 내가 덜 아픈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정한 날자 대로 일본으로 가거라. 너도 자식을 둔 엄마니까 너의 애들을 챙겨야지. “
 
결국 나는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수술을 받는 날 아침에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어머니를 보지도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비행장으로 떠나기전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병원문을 나서는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아 병원문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비행기가 하늘로 올라가 어머니가 수술중이라고 생각되는 시각에 나는 구름너머 푸른 하늘을 향해 어머니의 수술성공을 빌고 또 빌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애를 써도 눈물은 두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또 이겨내셨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퇴원하자마자 어머니는 아프신 몸으로 아버지의 간호를 혼자 하셨고 어머니의 지극정성 끝에 아버지는 수명이 길어야 반년이라고 했던 의사의 진단과 달리 2년을 더 어머니와 함께 보내셨다.
 
어머니는 요즘 매일 가까운 곳으로 등산도 다니시고 좋아하는 책도 실컷 읽으시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계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찬 서리 속에서도 꿋꿋이 핀 민들레 꽃같이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머리를 날려 내 얼굴을 만지며 나를 깨운다. 언제부터 내 손이 민들레 꽃잎을 쓰다듬고 있었다.
 
민들레는 겨울이면 잎사귀가 시들어 죽지만 이듬해 봄이면 또다시 뿌리로부터 새 이파리가 돋아난다. 민들레는 밟히고 짓눌려도 다시 살아나며 아무리 척박한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민들레꽃의 꽃말은 “내 사랑 그대에게 드려요”이다.
 
그러고 보니 민들레 꽃은 어머니를 닮은 꽃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이 민들레 꽃이 유난히 더 예뻐 보인다.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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