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수박할머니,고 리애신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5월29일 00시00분    조회:96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수박할머니 (西瓜奶奶),연변의 1세대 ‘왕훙’이라 칭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모멘트와 미니블로그(微博)가 성행하던 시절, 지금의 ‘왕훙’들만큼 얼굴이 많이 알려진 수박할머니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결코 SNS덕분이 아니였다. 바로 연변축구였기에 가능했다.
 
당시 연변의 온갖 관심은 ‘연변축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던 때였으니 수박할머니의 등장은 각본없는 드라마같은 것이였다. 그런데 얼마전 수박할머니가 쓸쓸히 돌아 가셨다는 가슴아픈 비보를 듣고 6년전 수박할머니를 취재하면서 못다했던 에필로그를 오늘 다시 적어보려 한다.
 
 
 
우리들에게는 리애신이라는 실명보다는 수박할머니라는 별명이 더 익숙하다
 
2015년 6월 24일 《인터넷 길림신문》에 발표된 본사 김룡기자가 쓴 ‘80세 할머니 우리 선수들께 수박이나 사주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수박할머니가 세상에 가장 먼저 알려지게 되였다.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가 무더운 날 땀흘리며 고생하는 선수들에게 수박이나 사먹이라고  1000원을 기부한 할머니의 축구사랑이 곧  파다히 퍼져 나가면서 할머니는 수박할머니로 불리우게 되였다. 할머니의 정체가 하도 궁금하여 나는 이튿날 어떻게든  할머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게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연변은 축구로 대동단결되여 있었고 수백명 축구팬들이 모인 연변축구팬 단톡방에서 할머니 이웃에 산다는 한 축구팬의 제보로 나는 연길 북대에 위치한 연북아빠트단지에 할머니가 살고계신다는 정보를 얻고 무작정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집도, 할머니도 찾을 수가 있었다.

 
2015년 6월 24일 오후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 선수들에게 수박이라도 사주라고 1000원을 내놓는 리애신할머니
 
인턴도 중견도 아닌 입사 5년차 기자였던 나에게 그날의 취재는 기자생애 최대로 힘들었던 ‘푸대접’ 인터뷰였다. 긍정코 좋은 기사감인데도 할머니는 취재를 완강히 거부하셨다. 하여 설득에만 족히 한시간 반이 넘어 걸렸다. 조용한 곳을 찾아 집안으로 들어가려 해도, 근처 휴식터를 찾아 앉자고 해도 너무나 확고했다. 그렇게 아빠트단지를 훨씬 벗어나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 가다보니 길거리 인행도에 멈춰섰다. 도움을 청해 선배기자들이 연변축구소식이 실린 신문을 갖고 달려온것이 큰 작용을 했다.
 
 
수박할머니는 연변축구에 대해 환히 ‘꿰뚫고’ 계셨다

그렇게 완강히도 취재를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거짓말처럼 신문을 반갑게 받아 펼치시더니 큰 소리로 연변축구기사를 읽으시며 즐거워 하셨다. 알고보니 할머니는 유일하게 신문으로 연변축구소식을 접하고 있었고  신문을 ‘코밑치성' 한 보람으로 어렵사리 인터뷰를 시작할수 있게 된것이였다. 할머니의 본명은 리애신이였고 78세 고령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연변축구의 과거와 현재상황, 지어 매 선수들의 신상정보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계셨다. 그러다 알게 된 가족사와 현재 지내는 상황이였는데 할머니는 북대신촌이 파가이주하면서 잠시 세집생활하고 있었다.축구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날 리애신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덤으로 듣게 되였다.

당시 입고 계시던 옷이  20년째라는 단벌 신상 이야기며, 지붕에 물이 새서 대야 수십개를 받쳐 놓고 살던 이야기, 이곳저곳 수십번 이사를 하면서 살아왔다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도 텔레비죤과 집전화가 없다는 소박하고 썰렁한 살림이야기 … 길바닥에 멈춰 선채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세시간을 훌쩍 넘겼다. 확실했던건 연변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80고령임에도 홀로 살고 있고 하얗게 센 백발이 무척 외롭고 애처로와 보였던 기억이다.

할머니에게 드린 길림신문에 나의 전화번호를 함께 적어 드렸다. 나중에 신문이 나오게 되면 핸드폰이 없는 할머니셨기에 이 곳으로 전화를 걸면 꼭 신문을 갖다드리겠다는 약속을 남겨 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야간근무를 해가면서 할머니 기사를 작성했고 지금 모두가 익숙히 알고 있는 그 이름‘수박할머니’는 그 기사에서 가장 처음으로 붙여졌다.그리고 후에 있은 이야기지만 수박할머니 취재기사는 길림신문상 1등상까지 수여 받았다.

《길림신문》에 실린 연변축구 소식을 읽으면서 즐거워 하시는 수박할머니

그 후로 모르는 번호로 번갈아가며 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수박할머니였다. 길가던 행인의 휴대폰을 빌리기도 했고 슈퍼에 들어가서 공용전화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연변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오전부터 경기시작전까지 나에게  몇번이고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이지 당시에는 할머니가 귀찮게만 느껴졌다. 전화를 받아보면 별다른 용무도 없었다. 자꾸만 언제 경기장에 나오냐고 물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그때는 그게 나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솔직히 알면서도 나는 귀찮다는 리유로 모르는척 외면하고 싶었다.

“연화야, 연화야…” 내 이름은 영화라고 시정해주는데도 자꾸만 연화라고 불렀고 할머니는 영화라는 이름보다는 연화라고 부르는게 더 편했나 보다. 지금도 “연화야, 연화야…” 하는 할머니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짠해난다.

수박할머니의 연변축구를 위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이 길림신문을 시작으로 중앙매체들에서까지 널이 보도되면서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이슈 인물’로 되였다. 할머니의 축구사랑에 감동된 연변축구구락부에서도 할머니를 찾고 싶어했다. 할머니와 련락할 방도가 없어 길림신문사 기자에게 련락을 취해달라는 청탁이 왔다.

2015년 7월 18일, 연변팀 경기가 끝난 뒤 박태하 감독이 수박할머니에게 감사의 꽃다발 증정의식을 진행할 예정이니 할머니를 꼭 경기장에 모셔달라는 청탁이였다. 전화도 없는 수박할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나는 할머니집을 열번도 넘게 찾아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갈때마다 문이 잠궈져 있어  궁여지책으로  집문고리에 쪽지를 끼워놓고 경기당일 지정한 위치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경기 당일 할머니는 쪽지의 약속대로 그 장소에 나오셨고 나는 매체 지정석인 옆구역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후반전이 시작해 경기에 정신팔려있는 사이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구락부측에서꼭 할머니를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진땀이 바질바질 났다. 반시간 넘게 경기장을 헤매면서 겨우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수박할머니는 글쎄 화장실에 들렀다가 관람구역 반대쪽에 찾아가 앉으셨던 것이다.

경기가 끝나갈 무렵 할머니를 모시고 대기실로 가야 하는데 안간다고 견결히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의식따윈 필요 없다는 것이였다. 꽃다발을 받으려고 쌈지돈을 내놓은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도 구락부측과의 약속이니 어떻게든 설득해서 모시고 대기실로 내려갔는데 그 와중에 꼴이 터져 할머니는 대기실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덩실덩실 춤추던 그 모습이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경기가 끝나고 약속대로 할머니를 경기장 잔디 한가운데에 모시기로 했는데 엄마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마냥 내품에서 우시는 것이였다. 이런 대단한 대접을 받으려고  돈을 의연했던게 아니라면서 혼자서는 도저히 못나가겠으니 꼭 나와 함께 나가자고 내 손을 잡아 끄시는 것이였다.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엉겹결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 영광스러운 잔디를 밟으며 나 역시 대본에도 없던 ‘배우노릇'을 해야 했다.

수박할머니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박태하감독, 오른쪽이 이날 동행한 김영화 기자

“할머니, 할머니 덕분에 선수들이 힘을 냈습니다.”

박태하 감독은 수박할머니 목에 정중하게 꽃다발을 걸어 드리며 오래도록 꼭 안아 주셨다. 할머니는 박감독의 품에서 또 다시 주체할수 없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꽃다발을 얼른 자신의 목에서 벗겨내여 다시 박감독에게 걸어 주었다. 관중석에서는 축구팬들이 그대로 남아 다 함께  수박할머니(西瓜奶奶)를 목터져라 외쳐주던 그 함성은 감동의 쓰나미로 밀려와 나를 비롯한 많은 축구팬들의 마음에 평생 잊지못할 연변축구의 감동을 남겨 주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렇게나마 수박할머니의 곁을 지켜줬던 나에게 할머니 비보 소식은 참으로 많은 과거를 떠올리고 또 생각해 보게 했다... 한때 축구팬들에게 누구보다 수박할머니 소식을 가장 발빠르게 전해주려고 애쓰던 나였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구보다 뒤늦게 수박할머니의 작고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미안한 마음에 괴로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구보다 가슴 뜨겁게 연변축구를 열애하던 그 백발이 성성했던  모습, 전국 축구팬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을 담아 연변축구를 알리는 빛나는 명함장같은 분이셨던 ‘수박할머니’, 그이의 모습은 나의 기억속에도, 우리의 기억속에도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연변축구가 프로리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수박할머니는 알고 가셨을가?

어느 네티즌이 할머니를 추모하며 남긴 댓글이 가장 눈에 띄였다. 연변축구가 바로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던 수박할머니가 그동안 부진했던 연변축구의 힘든 나날을 어떻게 보냈을지 정말 궁금하다. 돋아나는 희망처럼 연변축구의 프로리그 귀환을 수박할머니는 살아생전 분명히 학수고대하셨을것이다. 수박할머니는 이미 떠나 가셨지만 할머니가 남겨준 연변축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열정의 메세지는 영원히 연변축구팬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박할머니, 고 리애신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길림신문 김영화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한때 내게는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내놓고 별다른 취미가 따로 없었다. 같잖은 글이라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곡차곡 글로 표현해내고 나면 모종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군 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요즘은 글을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여버렸다. 졸업을 하고 출판사의 편집이 되고 나서, 또 지금은...
  • 2019-11-25
  • 건국 70돐 기념 특별기획: 〈일대일로의 조선족 개척자들〉(1) 글 사진/서정옥 올해 휴가는 어디로 떠날가 고민하는 나에게 남편은 지중해 남쪽 해안 나라 튀니지로 가자고 한다. 튀니지가 도대체 지구촌 어딘데?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우리와 거의 지구 반대쪽에 있는 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한 튀니지, 사하라사막이 있는...
  • 2019-11-16
  • [수기] 엄마가  준  두번째 생명 림율아 나는 우리나라 3년 자연재해시기였던 1961년 봄에 태여났다.   1959~1961년을  중국의 3년 자연재해시기 또는 3년 고난의 시기라고 한다. 이 3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식량과 부식품이 극도로 결핍하여 인민들의 건강과 생명에 엄중한 해를 끼쳤다.백성들은 먹을...
  • 2019-11-14
  • 연길 세집 2017년 8월 24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겁이 꽤 많았다. 특히 밤이 되면 변소에 가기를 그렇게 무서워했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아니면 아버지가 ‘보초’를 서주어야 했다. 캄캄한 시골의 재래식변소에 앉아있으면 자꾸 누군가가 뒤에 서있는 것 같고 당장이라도 밑으로부터 뭔가가 올라올 것 같은 공포...
  • 2019-11-12
  • 계림문화상 대상 수상작품 "일본에서 살기" 리홍매(일본) 머리말 1983년, 당시의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우고 세계를 향하여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을 열었다. 80년대말에 이르러 활성화된 중국정부의 류학생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어가 널리 보급된 동북3성지역의...
  • 2019-11-12
  • 병원치료 포기 2017년 7월 21일 내 고향친구들한테는 엄마는 ‘어죽’으로 통한다.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나, 어죽을 잘 끓이는 엄마 그래서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기를 좋아했다. 놀러오면 엄마는 거의 혼자서 준비를 다해서 우리가 서쪽 강변에 나가 마음껏 천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군 했다. 처음 몇번은...
  • 2019-11-11
  • “온 힘을 다해 이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던 그 눈빛”, “어느 구석을 봐도 엄마가 보이는데 어디에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생소해 미칠 것 같았다”,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본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엄마만 떠올리면 억...
  • 2019-11-11
  •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70년 당령(党龄)의 한춘옥 ‘마지막 공헌'으로 유체 기증을 선언   ‘한춘옥 ’이름자와 전국 통일 번호(2785)를 밝혀 발급된 건국 70돐 기념장 소장함. 기자한테 자신이 받은 건국 70돐 기념장을 ...
  • 2019-11-08
  • 편집자의 말 우리 나라에는 아직 유체 기증 사업 관련 법은 없다. 하지만 유체 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소행이 싹트고 있다. ‘유체 기증'은 기증인이 생전에 유체 기증 념원을 표명하고 사망 후 위탁인 혹은 집행인이 유체를 전부 혹은 부분적(장기 기증 경우)으로 의학 교수 및 연구사업에 기증하는 문명행위...
  • 2019-11-08
  • 영화 삼촌은 지난세기 50년대에 룡정 덕신중학교 학생회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어린나이에 자기보다 몇살 위인 선배들앞에서 연설을 하군했는데 똑똑하다고 정평이 났으며 이름난 웅변가였다고 한다.   사진뒤면에  ...
  • 2019-11-07
  • 지난 10월 31일, 간단한 기부식이 무순1중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료녕무공공구주식유한회사 리사장 장명상이10만원의 기부금을 빈곤대학생 손영택에게 전달했다. 장명상이 손영택에게 하는 두번째 기부다.   19세의 손영택과 그의 가정은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의 누나는 13세 때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선천성 ...
  • 2019-11-07
  • 어린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박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박사재학중에 있고 간혹가다 비루한 솜씨로 쓴 글들을 투고하여 가뭄에 콩 나듯 지면에 내 이름을 올리면서 살고 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의 현재 삶을 브리핑한 목적은 어렵사리 어릴적 꿈을 지키고 이루어낸 ‘성공신화의 주인공...
  • 2019-11-01
  • [청춘노트]  리은실(李银实) 필명 몽실(梦实). 1984년출생 2009년 연변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 취득. 현재 북경민족출판사 근무 최근에 글을 왜 쓰냐는 질문을 몇번 받았다. 글쎄다. 나는 글을 왜 쓸가? 언제나 먹기보단 잠자기를 우선시하는, 잠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라 생각하는 ‘잠보’가 잠을 포기하...
  • 2019-10-26
  • 지난 8월 29일, 나는 흑룡강성 계서시 계동현 계림조선족향에서 펼쳐진 약선(药膳)강습행사를 마치고 50년 만에 다시 그리운 북대황 기러기섬(雁窝岛)으로 향했다. 기러기섬은 바로 50년전인 1969년 3월에 가서 1973년 3월까지 내가 청춘열정을 쏟아부어 벼농사를 개척한 정든 고장이다.   1962년 6월 22일, 국무원...
  • 2019-10-22
  • 지난 10월 19일, 연길시도시건설투자그룹유한회사(대서양공관대상)에서 주최하고 공청단연변주위, 연변사회조직관리국, 연변9.3애심공익협회에서 주관한 “대서양공관대상 애심입쌀 3만근 전달”식이 연변체육관에서 펼쳐졌다.   10월 17일은 여섯번째로 되는“전국 빈곤층 부축의 날”이다.&nbs...
  • 2019-10-21
  • 백세 시대인 요즘엔 칠십나이는 삶의 지혜를 빛내는 황금 시절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두번째 봄이다. 공화국 창립과 동갑인 나의 칠십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어린시절과 그림같은 고향의 풍경이 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에서 ...
  • 2019-10-18
  • #예로부터 결혼은 인륜지대사로 꼽혔다. 그러나 점점 결혼을 늦게 하는 만혼인구 증가률이 상승하고 지어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비혼족이 생겨나는 등 시대가 변하면서 요즘 세대들의 결혼관 또한 빠른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변화와 더불어 관점의 충돌로 인한 갈등 또한 항상 존재해 왔다. 다름 아닌 “...
  • 2019-10-12
  • "더 기다려주다가는 혼자 사는 게 더 편하다고 할가봐 걱정돼서 달려왔죠."  "급해하는 엄마 마음 리해가 돼서 함께 왔어요."... 결혼에 대한 인식이 다양해지다 보니 만혼 인구도 점차 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 적령기 자녀와 부모의 ‘결혼에 관한 론쟁’도 항상 이슈로 떠오른다. “자식의 결...
  • 2019-10-08
  • - 글 / 국하 -       (흑룡강신문=도쿄) 알람 소리에 따르릉, 이불을 개는 소리 착착, 창문을 여는 소리 찰칵,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살살, 웃집에서 걸음을 걷는 소리 쿵쾅쿵쾅, 수도물이 내려오는 소리 쏴쏴... 내 마음이 오늘도 힘내라고 하는 소리 뿅뿅.   찌르륵 찌르륵 계란후라이 지지는 소리와 같이...
  • 2019-09-24
‹처음  이전 3 4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