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가 무더운 날 땀흘리며 고생하는 선수들에게 수박이나 사먹이라고 1000원을 기부한 할머니의 축구사랑이 곧 파다히 퍼져 나가면서 할머니는 수박할머니로 불리우게 되였다. 할머니의 정체가 하도 궁금하여 나는 이튿날 어떻게든 할머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게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연변은 축구로 대동단결되여 있었고 수백명 축구팬들이 모인 연변축구팬 단톡방에서 할머니 이웃에 산다는 한 축구팬의 제보로 나는 연길 북대에 위치한 연북아빠트단지에 할머니가 살고계신다는 정보를 얻고 무작정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집도, 할머니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완강히도 취재를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거짓말처럼 신문을 반갑게 받아 펼치시더니 큰 소리로 연변축구기사를 읽으시며 즐거워 하셨다. 알고보니 할머니는 유일하게 신문으로 연변축구소식을 접하고 있었고 신문을 ‘코밑치성' 한 보람으로 어렵사리 인터뷰를 시작할수 있게 된것이였다. 할머니의 본명은 리애신이였고 78세 고령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연변축구의 과거와 현재상황, 지어 매 선수들의 신상정보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계셨다. 그러다 알게 된 가족사와 현재 지내는 상황이였는데 할머니는 북대신촌이 파가이주하면서 잠시 세집생활하고 있었다.축구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날 리애신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덤으로 듣게 되였다.
당시 입고 계시던 옷이 20년째라는 단벌 신상 이야기며, 지붕에 물이 새서 대야 수십개를 받쳐 놓고 살던 이야기, 이곳저곳 수십번 이사를 하면서 살아왔다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도 텔레비죤과 집전화가 없다는 소박하고 썰렁한 살림이야기 … 길바닥에 멈춰 선채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세시간을 훌쩍 넘겼다. 확실했던건 연변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80고령임에도 홀로 살고 있고 하얗게 센 백발이 무척 외롭고 애처로와 보였던 기억이다.
할머니에게 드린 길림신문에 나의 전화번호를 함께 적어 드렸다. 나중에 신문이 나오게 되면 핸드폰이 없는 할머니셨기에 이 곳으로 전화를 걸면 꼭 신문을 갖다드리겠다는 약속을 남겨 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야간근무를 해가면서 할머니 기사를 작성했고 지금 모두가 익숙히 알고 있는 그 이름‘수박할머니’는 그 기사에서 가장 처음으로 붙여졌다.그리고 후에 있은 이야기지만 수박할머니 취재기사는 길림신문상 1등상까지 수여 받았다.
《길림신문》에 실린 연변축구 소식을 읽으면서 즐거워 하시는 수박할머니
그 후로 모르는 번호로 번갈아가며 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수박할머니였다. 길가던 행인의 휴대폰을 빌리기도 했고 슈퍼에 들어가서 공용전화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연변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오전부터 경기시작전까지 나에게 몇번이고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이지 당시에는 할머니가 귀찮게만 느껴졌다. 전화를 받아보면 별다른 용무도 없었다. 자꾸만 언제 경기장에 나오냐고 물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그때는 그게 나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솔직히 알면서도 나는 귀찮다는 리유로 모르는척 외면하고 싶었다.
“연화야, 연화야…” 내 이름은 영화라고 시정해주는데도 자꾸만 연화라고 불렀고 할머니는 영화라는 이름보다는 연화라고 부르는게 더 편했나 보다. 지금도 “연화야, 연화야…” 하는 할머니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짠해난다.
수박할머니의 연변축구를 위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이 길림신문을 시작으로 중앙매체들에서까지 널이 보도되면서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이슈 인물’로 되였다. 할머니의 축구사랑에 감동된 연변축구구락부에서도 할머니를 찾고 싶어했다. 할머니와 련락할 방도가 없어 길림신문사 기자에게 련락을 취해달라는 청탁이 왔다.
2015년 7월 18일, 연변팀 경기가 끝난 뒤 박태하 감독이 수박할머니에게 감사의 꽃다발 증정의식을 진행할 예정이니 할머니를 꼭 경기장에 모셔달라는 청탁이였다. 전화도 없는 수박할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나는 할머니집을 열번도 넘게 찾아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갈때마다 문이 잠궈져 있어 궁여지책으로 집문고리에 쪽지를 끼워놓고 경기당일 지정한 위치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경기 당일 할머니는 쪽지의 약속대로 그 장소에 나오셨고 나는 매체 지정석인 옆구역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후반전이 시작해 경기에 정신팔려있는 사이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구락부측에서꼭 할머니를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진땀이 바질바질 났다. 반시간 넘게 경기장을 헤매면서 겨우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수박할머니는 글쎄 화장실에 들렀다가 관람구역 반대쪽에 찾아가 앉으셨던 것이다.
경기가 끝나갈 무렵 할머니를 모시고 대기실로 가야 하는데 안간다고 견결히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의식따윈 필요 없다는 것이였다. 꽃다발을 받으려고 쌈지돈을 내놓은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도 구락부측과의 약속이니 어떻게든 설득해서 모시고 대기실로 내려갔는데 그 와중에 꼴이 터져 할머니는 대기실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덩실덩실 춤추던 그 모습이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경기가 끝나고 약속대로 할머니를 경기장 잔디 한가운데에 모시기로 했는데 엄마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마냥 내품에서 우시는 것이였다. 이런 대단한 대접을 받으려고 돈을 의연했던게 아니라면서 혼자서는 도저히 못나가겠으니 꼭 나와 함께 나가자고 내 손을 잡아 끄시는 것이였다.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엉겹결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 영광스러운 잔디를 밟으며 나 역시 대본에도 없던 ‘배우노릇'을 해야 했다.
수박할머니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박태하감독, 오른쪽이 이날 동행한 김영화 기자
“할머니, 할머니 덕분에 선수들이 힘을 냈습니다.”
박태하 감독은 수박할머니 목에 정중하게 꽃다발을 걸어 드리며 오래도록 꼭 안아 주셨다. 할머니는 박감독의 품에서 또 다시 주체할수 없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꽃다발을 얼른 자신의 목에서 벗겨내여 다시 박감독에게 걸어 주었다. 관중석에서는 축구팬들이 그대로 남아 다 함께 수박할머니(西瓜奶奶)를 목터져라 외쳐주던 그 함성은 감동의 쓰나미로 밀려와 나를 비롯한 많은 축구팬들의 마음에 평생 잊지못할 연변축구의 감동을 남겨 주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렇게나마 수박할머니의 곁을 지켜줬던 나에게 할머니 비보 소식은 참으로 많은 과거를 떠올리고 또 생각해 보게 했다... 한때 축구팬들에게 누구보다 수박할머니 소식을 가장 발빠르게 전해주려고 애쓰던 나였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구보다 뒤늦게 수박할머니의 작고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미안한 마음에 괴로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구보다 가슴 뜨겁게 연변축구를 열애하던 그 백발이 성성했던 모습, 전국 축구팬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을 담아 연변축구를 알리는 빛나는 명함장같은 분이셨던 ‘수박할머니’, 그이의 모습은 나의 기억속에도, 우리의 기억속에도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연변축구가 프로리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수박할머니는 알고 가셨을가?’
어느 네티즌이 할머니를 추모하며 남긴 댓글이 가장 눈에 띄였다. 연변축구가 바로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던 수박할머니가 그동안 부진했던 연변축구의 힘든 나날을 어떻게 보냈을지 정말 궁금하다. 돋아나는 희망처럼 연변축구의 프로리그 귀환을 수박할머니는 살아생전 분명히 학수고대하셨을것이다. 수박할머니는 이미 떠나 가셨지만 할머니가 남겨준 연변축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열정의 메세지는 영원히 연변축구팬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박할머니, 고 리애신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길림신문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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