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신문》은 ‘사랑+릴레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부동한 주제로 계렬 공익행사 진행, 행사에 참여한 분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전하며 사랑 릴레이를 이어가려 합니다.
지난달 ‘사랑+릴레이’-‘고마움 전하기’ 주제로 진행된 행사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가운데 기타 따뜻한 사연도 전해달라는 네티즌들의 요청이 비발쳐왔습니다.
오늘은 ‘고마움 전하기’에 전해온 형수님에게 보내는 감동사연을 영상편지로 전합니다.
형수님께:
형수님이 우리 집 문턱을 넘어선지도 어언 40년 세월이 흘렀군요. 그때, 우리 집은 초라한 40여평이 되는 초가집이였고 아버지는 ‘동란시기’ 특무로 몰려 물매에 륵골 네대가 끊어지면서 페인이나 다름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한쪽 눈과 한쪽 귀가 좀 멀었던 큰형은 공사장에 일하러 갔다가 숙사에 일어난 화재로 신경쇠약에 걸려 몇해 후에 돌아갔고 둘째형마저 그때 현청년간부양성반이요, 농촌사회주의공작대요, 5.7간부학교요 하면서 다니다 보니 집에 별로 머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둘째형에게 시집 온 형수는 이렇게 맏며느가 되여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떠안게 되였고 그 밑으로 공부하는 셋째 시동생도 섬기였습니다. 가정의 주요 로력으로 일년 내내 열심히 일하셨어도 매년 생산대 년말분배회의에 갔다가도 빈손으로 돌아오기가 일쑤였는데 그래도 형수는 가타부타 말없이 다시 이듬해 농사일을 수걱수걱 해나갔습니다.
70년대는 다 그래듯이 우리 집도 남자가 많아 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형수님이 고개를 세개 넘어 친정집에 쌀을 이고 와 그 험한 보리고개도 넘으면서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과 큰형도 형수님 손에서 여한이 없이 저 세상으로 갔고 우리 형제들도 모두 장가 들어 지금은 천진에서 한국에서 연길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60살 먹고도 형수니깐. 우리 형수를 “강철같은 녀 전사”로 여기면서 살아온 내가 저주롭습니다. 미안합니다. 늦게 철든 이 시동생 용서해주세요.
/성송권 올림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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