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소수레 덜컹거리던 산간벽지에 장백산고속철이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2월10일 14시52분    조회:61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장백산 아래 어느 로부부가 들려준 ‘길’에 담긴 이야기

 

 

장백산 아래에 사는 김은호, 남영자 로부부가 고향에 들어선 고속철역 앞에서.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길부터 먼저 닦으라”는 말이 있다. 지난해 12월 24일 장백산고속철이 개통식을 가진던 날, 안도현 현성과 200여리 떨어진 장백산 아래 영경향 조양촌에 사는 82세의 김은호로인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모처럼 영경역을 찾아 그 뜻깊은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나무가 울창했던 수림 속에 꿈에도 생각못했던 기차역이 건설되여 돈화방향에서 달려오는 고속렬차가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들어서는 모습을 바라보는 김로인은 산간벽지 고향산천의 변화가 그저 꿈만 같아 감개가 무량하기만 했다.

현성으로 한번 떠나려면 일주일씩 트럭을 기다려야

금년에 82세에 나는 김은호로인과 79세에 나는 남영자할머니, 두 로부부는 장백산 아래에 자리잡은 안도현 영경향 조양촌이라는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길에 대한 말이 나오자 로부부는 “말도 마오. 옛날에는 현성인 명월진에 한번 가려면 차를 꼬박 일주일씩이나 기다려야 했다오.”라고 교통이 비할데 없이 불편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 교통도구는 뻐스가 아닌 트럭이였으며 그것도 처음엔 목탄을 태우는 자동차였는데 화부가 쉴새없이 불구멍을 쑤시지 않으면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다가도 차가 힘이 없어 턱하고 멈춰서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부를 ‘쑤시개’라는 별명을 달아주기도 했다.

 

 

고향의 ‘길’에 얽힌 옛말을 들려주는 로부부.

“후에 ‘해방패’ 트럭으로 바뀌였소. 이도백하 쪽에서부터 사람들을 태우면서 오는데 도중에 다 찬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5리를 달려가서 영경에서 그 차를 타려고 해도 헛물만 켜고 돌아와야 했지. 이틀날에 나가도 사람들이 꽉 차서 또 못 타는거지. 이렇게 계속 한 일주일씩 뛰여다녀야 요행 얻어 걸리군 했다오.”

현성에서 일을 보고 돌아올 때에도 고생은 마찬가지, 새벽 세시부터 나가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옛날에 여기 사람들은 운전수를 그렇게도 부러워했지뭐요. 현장보다 더 대단하게 봤다니까. 오죽하면 아들 둘을 낳으면 하나는 꼭 운전수로 만들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겠소.” 김은호로인은 웃으면서 허구했던 그 옛날을 회억한다.

240리를 걸어서 마을 첫 대학생이 된 오빠

남영자할머니의 오빠는 금년에 83세에 나는데 조양촌이 서서 마을에서 처음으로 나온 대학생이다. 영경향에 중학교가 없던 시절 1950년대에 현성 명월진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으며 고중공부는 연변1중에서 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로부부가 사는 집 바로 앞으로 아스팔트길이 시원하게 지나가고 있다.

 

 

옛날 마을 모습과 마을 중간을 지나간 흙길, 이때의 길은 닦아서 그나마 괜찮을 때라고 한다.

“오빠는 명월진에서 기숙사에 있으면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집으로 돌아올 때 걸어서 오군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240리를 걸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공부를 유별나게 잘해서 연변1중에 입학하고 나중에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까지 갔지요.” 남영자할머니가 오빠가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말한다.

연길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남영자할머니의 오빠는 전화통화에서 그때를 회억하며 “1954년에 현성 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했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면 새벽 세시에 길을 떠났습니다. 하루에 다 못가기 때문에 백칠팔십리를 걸어서 만보라는 곳에 도착해 친구집에서 하루밤을 묵고 이틀날에 또 50여리를 부지런히 걸어서 집에 도착하군 했지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배가 고팠지요. 집이 그리웠습니다.”라고 하며 그 당시의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200여리를 걸어 돈화에 가서 참군한 김은호로인의 형님 김주호, 길림 화피창 전오가자전투에 참가해 대공을 세우고 부대를 따라 남창까지 진군했다.

“저의 형님 김주호도 마을에서 200여리를 걸어 돈화에 가서 참군했지요. 길림 화피창 전오가자전투에서 대공을 세우고 부대와 함께 남하하여 강서성 남창까지 진군했다가 후에 조선전쟁에서 희생되였습니다.” 김은호로인은 70여년 전에 형님이 남창에서 부쳐온 몇통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꺼내보이면서 그해 청명쯤에 살을 에는 강물을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건너서 참군길에 오르던 형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김은호로인 마을 앞산에 올라가 장백산고속철 건설 모습 지켜보며 감격

마을 뒤로 지나간 장백산고속철.

 

 

영경역으로 고속철이 서서히 들어서고 있다.

김은호, 남영자 로부부가 사는 집 바로 앞으로 아스팔트길이 시원하게 빠져서 지나고 있다. “이 길이 옛날에는 흙길이였는데 비가 한번 내리기만 하면 진흙탕으로 변하고 너무 험해서 차를 모는 운전수들은 물론 소수레를 모는 우리 농민들도 싫어할 정도였지. 지금은 소수레가 덜컹거리며 다니던 흙길이 신작로가 돼서 차들이 씽씽 통하고 마을에서 뻐스가 서서 현성은 물론 돈화와 이도백하도 마음대로 갈수 있어 얼마나 편리하다구. 시내로 나갈 일이 있으면 전화 한통이면 택시가 집 앞까지 와서 싫어가지. 근데 또 이 두메산골에 장백산고속철까지 통하다니 정말 감탄할수 밖에 없수다.”

몇년전에 장백산고속철이 영경향을 지나 이도백하까지 통하며 새로 기차역이 들어선다는 희소식에 김은호로인은 기쁨과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그래서 80세의 고령도 잊고 어린이들처럼 마을 앞산으로 혼자 올라가 시공일군들이 측량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길을 빼고 다리를 놓고 레루를 까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산에서 돌아와서는 할머니에게 오늘은 건설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신나게 ‘회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백산으로 통하는 고속철은 건설자들의 주야로 되는 로동으로 김은호로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진척이 빨랐다.

지난해 12월 24일 장백산고속렬차가 드디여 개통식을 가지게 되였다. 그날 김은호로인은 아들, 며느리를 앞세우고 카메라를 챙겨가지고 모처럼 영경역을 찾아나섰다. 아들이 운전하는 자가용에 앉아 새롭게 건설한 시원한 포장도로를 따라 기차역으로 가는 김로인은 하염없이 창밖을 내바봤다. 그리고 기차역에 이른 로인은 말없이 오래도록 나무색을 칠한 작지만 아담한 산간벽지 고향의 고속철역을 정겹게 바라봤다.

“이제 날이 따뜻해지면 우리 로부부는 장백산고속철을 타고 돈화에 가서 륙정산풍경구에 구경을 한번 다녀오려고 하오. 200리가 되는데 30분이면 금방 간다고 하니 참 대단하잖소. 세상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수다. 점점 살기 좋은 세상이요.”

장백산 아래 산간벽지의 작은 마을에서 석양을 불태우며 행복한 만년을 보내는 김은호, 남영자 로부부, 이제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어느 봄날에 두분이 손을 꼬옥 잡고 고향의 장백산고속철에 앉아 즐겁게 나들이를 한번 떠나 좋은 추억을 만들기를 기원한다.

 

 

 

 

움김치를 꺼내서 손님을 대접하는 김은호, 남영자 로부부.

 

 

60년전, 결혼 초에 살았던 집 앞에서.

 

 

김은호로인이 장백산 박달나무로 깎아 만든 다듬이방치와 절구,할머니는 지금도 애지중지하며 쓰고 있다.

 

 

김은호로인은 옛날에 통신원으로 있으면서 고향의 소식을 전했다.

 

 

 

 

 

 

 

 

 

 

 

 

 

 

마을의 오래된 사진과 형님이 군대에 있을 때 남창에서 보내온 서한을 오늘까지 아껴 보관, 우리민족의 력사를 알아가는 소중한 자료다.

 

 

 

 

장백산 아래에 사는 로부부의 집으로 한국 연예인 최불암선생도 다녀갔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지난 8월 23일 오전, 북경에 자리 잡고 있는 랑시주식유한회사(동사장 신동일)가 오상 조선족 수재민들에게 100만원 물자를 기증했다. 이날 수재물자 기증식은 오상시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렸는데 랑시주식유한회사 신동억 가족대표와 신동철 동사장조리 등 4명이 신동일 동사장의 위탁을 받고 오상시에 와서 수재물자를 기증...
  • 2023-08-24
  • 5월 13일 아침 일찍 짐을 챙겼다. 두 밤을 지내며 홀랑 마음을 앗아간 보금자리를 떠나기 아쉬웠다. 하지만 더 좋은 호텔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볍게 문지방을 넘을 수 있었으니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우리가 투숙한 두번째 호텔의 이름은 림바란포레스트리조트(金巴兰森林度假酒店)이다. 발리는 이름이 길수록 호텔...
  • 2023-06-01
  • 아버지의 배웅 허향순   12년전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낼 때 아버지는 너무나 억이 막혀 아무런 말씀도 못하고 그저 내내 손만 저으셨다. 나는 그 외롭고 허무한 손짓에서 슬픔과 아픔을 읽었다. 그 해 아버지는 81세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고독을 견디...
  • 2023-03-20
  •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2022 총화대회 및 3.8절 행사 성황    이른 봄 피여나는 진래의 성미는 부지런한 연변녀성 우리들을 닮았다네 만산위의 허물 덮고 아름답게 피는 꽃 똘똘뭉쳐 피여난 진달래의 그 모습 나라 발전 민족 부흥 나눔 실천 앞장서는  거기가 어디냐 연변녀성발전촉진회&he...
  • 2023-03-06
  • 곰과 인연을 맺은 네 아이 엄마 최미화 '녀자'와 '곰', 두 단어는 원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한데 네 아이를 둔 가냘픈 엄마가 육중한 곰 45마리를 거느린다고 하면 더욱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그저 나온 말이 아니였음을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저 한다. &...
  • 2023-01-08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기념 기획보도   2008년 북경올림픽 대학생 지원자로 근무하면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함께 대학생 지원자로 근무하는 조선족 총각을 만나서 사랑을 속삭일 때까지만 해도 저는 조선족 그리고 연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013년 봄에 그 총각을 따라 예비 시부모님을 뵈러...
  • 2022-08-29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기념 특별기획 박철원 선생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60돐을 경축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세월이 빨리도 흘러 어느덧 자치주성립70돐을 곧 맞이하게 되였다. 어언 10년세월이 흘렀어도 자치주성립60돐 경축행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로인 선전 봉사자'로 뛰여다니던 자랑과 긍지는 줄곧 내 ...
  • 2022-08-16
  • 다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해온 황재형, 한수남 로부부가 청화대학생 둘을 양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상해의 조선족 응시생 김군림 학생이 상해시 3위의 우수한 성적으로 청화대학에 입학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김군림  학생은 어려서부터 자률적인 학습습관을 양성해왔고 품행도 단정하며 피아노 ...
  • 2022-08-11
  • 편집자의 말: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돐을 맞으면서 본사 편집부에서는‘나와 연변’타이틀의 기획보도를 륙속 펴내게 된다. 외부 시각에서 바라본 백성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연변의 이모저모를 조명해보고 아름다운 연변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한다. /길림신문사 편집부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
  • 2022-07-25
  • 나에게는 누나가 없다. 그래서 청년시절까지는 누나가 있는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누나가 있으면 상냥하면서 부드러운 누나 사랑을 한껏 느끼면서 관심도 듬뿍 받고 응석을 부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팔자에도 없는 ‘누나타령’을 하면서 아무나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
  • 2022-07-24
  • 며칠전 동생이 이쁜 장갑을 끼고 엄마집에 왔다. 엄마는 그 장갑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 오른손에 껴보시는 것이였다.    “엄마, 욕심나시면 끼세요. 수박색이여서 환하지도 않아 엄마 얼마든지 낄 수 있어요”   동생의 말에 엄마가 급히 거절하셨다. “내가 이런 장갑 어떻게 낀다고 그...
  • 2022-07-20
  • 고희를 넘긴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 서면서 나는 자꾸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 보게 된다. 이중에서도 소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나의 꿈을 펼쳐주고 지식의 낟가리를 쌓아 주었으며 더우기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1954년 7월 나는 길림성 왕청현 동광진 동림소학교에 입...
  • 2022-07-14
  • 베네치아 려행을 끝내자마자 뻐스에 올랐는데 밤이 썩 깊어서야 로마에 도착했다. 이튿날,날씨부터 체크했다. 온도도 적당하고 해빛도 좋고 바람도 맞춤하고 게다가 도보려행이라니 얼씨구 신났다. 로마 일각 그런데 희한하게도 로마려행은 다른 나라 바티칸시국(梵蒂冈)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로마시내에 박힌 자그마한...
  • 2022-06-18
  • 5월 20일 이른 아침 독일 퓌센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꽤 먼길을 달려 이딸리아 베네치아(威尼斯)에 도착했다. 수상도시 베네치아 (水城 威尼斯) 국내 일반인들이 알고있는 베네치아는 그저 물우에 떠있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도시지만 연극인들에게는 좀 더 특별하고 신성한 도시로 다가온다. 그것은 베네치아가 세계적 ...
  • 2022-06-07
  •   작자 최청숙 우리 동네 삼꽃거리는 나에게 깊은 추억이 있는 거리입니다. 주덕해, 전인영, 요흔 등 분들이 살던 동네이고요 . 어린 시절 청년늪을 만드느라 땅을 파고 부르하통하의 물을 끌어올리는 것도 봤고요. 홍수에 제방뚝이 무너져 삼꽃거리가 강이 되여 파도 치던 일, 그래서 울 동네에서는 보따리...
  • 2022-06-05
  • 6년 전 이맘 때인 2016년 5월 19일 아침이였다. 독일 려행 준비를 마치고 스위스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역시 인간은 군거(群居)동물임이 틀림없다. 련 며칠 동행하면서 친절해진 동행들, 따뜻한 인사를 나누는 아침 얼굴이 화사하다. 버스 안, 처음과는 조금 달라져 간다. 여기저기 새 친구들 끼리끼리의 다...
  • 2022-06-05
  • 세계에서 제일 좋은 시계를 만드는 나라로만 알고 있던 스위스, 려행을 앞두고 지리 위치와 투어코스를 찾아봤다. 부유하고 평화롭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인심까지 넉넉하다는 스위스, 우리의 려행지는 루체른이란 작은 도시지만 본국 인들도 밀월을 즐길 때 자주 찾는 곳으로서 밀월마을 (蜜月小镇)이라는 별칭...
  • 2022-06-02
  • 나의 아버지는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2살, 삼촌은 7살, 고모가 3살로 한창 어머니품에서 응석 부릴 때였다. 개구쟁이로 뒹굴며 놀음에 빠질 나이였지만 아버지는 여념없이 밭일을 해야 했고 가무일까지 도와야 했다. 아버지는 손재간도 많았고 일솜씨도 좋았다. ...
  • 2022-06-02
  • 한국생활 체험기   동북지역의 편벽한 조선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해온지 28년이 된다. 90년대초부터 한국열이 불면서 나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전문 한국드라마, 뉴스를 시청하였다. 한국인 못지않게 드라마내용도 줄줄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취업비자 h-2를 따낸지 3년이 되였지...
  • 2022-05-26
  • 80고개에 들어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화려하고 가슴이 부풀며 랑만적으로 보낸 시절이 아마도 지난 세기 60년대 농촌에서 농업 생산로동에 참가하면서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소학교 3학년 때부터 맏형님이 사다주는 《조선아동》문학잡지를 열독하면서 글쓰기를 좋아했...
  • 2022-05-25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