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기] 손자에게서 배우는 재미 - 리삼민
‘강산이 일곱번 바뀌’는 사이, 뜻밖의 사연으로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많았지만 외손자가 나에게 준 교훈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외손자의 이름은 김유진, 어느 때, 어디서나를 막론하고 진리를 수호하라는 뜻에서 사위가 지어준 이름이다. 딸과 사위는 회사에 출근하고 마누라는 몸이 불편하여 유진이는 서너살 때부터 늘 나와 함께 광장에 나와서 제기도 차고 팽이치기도 하고 쇼핑도 했다. 외손자는 언제나 나의 말을 잘 들었다. 남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노는 것이 부러워 달려갈 때면 내가 “이리오너라. 개한테 물리면 어떡해” 하고 소리치면 유진이는 “네, 알았어요”라고 말하면서 나한테로 달려왔고, '저질' 식품을 사겠다고 골라쥘 때에도 “그건 가짜 식품이야, 사지 말라”고 명령하면 유진이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손에 쥐였던 식품을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내가 먹은 소금을 무져놓아도 너의 키보다 더 높을 것이다. 너는 나의 손자니 무조건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손자에게 세워준 생활준칙이였다.
3년 전, 그러니까 유진이가 대련시조선족학교에서 소학 3학년을 다닐 때였다. 그 때도 아침이면 내가 유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 방과후엔 집으로 데려왔다. 딸네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뻐스를 세번 갈아타야 했고 거리가 멀어 한시간 남짓이 걸렸다. 하기에 나는 손자가 지각할가봐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종전처럼 엄하게 손자를 단속했다. 어느 하루, 달게 자는 손자를 깨워 세수시키고 밥을 먹인 후 부랴부랴 손자의 손목을 잡고 뻐스역으로 향했다. (지금 어떤 세월이야. 내 안속부터 차려야지) 이렇게 생각을 굴린 나는 유진이더러 뻐스에 오르면 인차 빈 좌석을 찾아 앉으라고 명령했다. 얼마후 뻐스가 정류소에 도착하자 10여명 잘되는 사람들이 먼저 뻐스에 올라 자리를 차지하겠노라 서로 밀고 닥치였다. 다행히도 유진이가 두번째로 뻐스에 오르다보니 빈 좌석에 앉았다. 나는 빈 좌석이 없어서 서서 갔는데 뻐스가 두개 역을 지날 때 한 70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겨우 뻐스에 올랐다.
할머니가 앉을 자리가 없어 휘청거리는데도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이였다. 바로 이 때 유진이가 벌꺽 일어나더니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그 할머니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기분이 잡치였다. (바보 같은 놈, 모르는 척 앉아갈거지 왜서 로친에게 자리를 양보했어?) 걸죽한 욕사발이 막 입에서 터져나오는 것을 참고 차가운 눈길로 손자를 쏘아보았더니 기미를 챈 유진이는 시물시물 웃기만 했다. 뻐스에서 내려 학교로 향하면서 “그냥 모르는 척 할게지 왜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어?”라고 물었더니 손자가 하는 말이 어른스러웠다. “선생님께서 뻐스에서 로인들을 만나면 꼭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어요.” 이 말을 듣고 나의 얼굴이 대뜸 뜨거워났다.
아이들은 순진하고 정직하기 마련이다. 손자한테서 가책을 받은 것은 이번 뿐이 아니였다. 손자가 소학교 6학년을 다닐 때였다. 하교해 돌아온 유진이가 <잊을수 없는 하루> 글짓기 숙제를 하다가 써내려갈 수가 없어 아래글을 어떻게 쓰면 좋겠는가고 물었다. 그 때 나는 병원에 가야 했고 오는 길에 시장에 들려서 채소를 사와야 했기에 “유진아, 나 오늘 시간이 없다. 이걸 보고 베껴서 래일 선생님께 바쳐라”고 말하면서 내가 이전 소학교에 다닐 때 썼던 작문을 손자에게 넘겨주었다. 이 때 손자는 정색해서 말했다. “선생님이 자기절로 써야지 절대로 남의 글 옮기면 안된다고 말씀했어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살아온 내 인생, 아무리 많은 경험과 지혜가 있더라도 나어린 손자들에게서도 더러는 배워야 되지 않을가. 어제 손자에게서 례절 갖추는 걸 배웠고 오늘 모든 일 자기절로 하는 것을 배웠다면 래일은 또 무엇을 배워야 할가?
손자에게서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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