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가을 같은, 저녁 같은… 이재무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9월20일 06시10분    조회:9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를 출간한 이재무 시인./사진=헬스조선DB
서해의 온 바다가 한꺼번에 저물면서 빛날 때 저녁은 대낮보다 아름답다. 술 없이도 불콰한 그런 저녁에 무슨 심통 나는 일을 겪으셨나. 시집들 사이로 귀하게 내는 산문집에 ‘괜히 열심히 살았다’란 제목을 붙였다. 이재무 시인의 가을 같은, 저녁 같은 산문이다.

알록달록 홀가분한 책을 받고서 심통의 연원이 궁금해 표제 산문부터 찾아 펼쳤다. 네 쪽에 걸친 산행기다. 정상에 집착하신 적이 있던가. 정상에의 강박 때문에 한때 고행과 다름없는 산행을 했다,는 고백이 앞선다. 그 세월이 얼마였는지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언젠가부터 시야에서 정상을 지웠고 걸음은 가벼워졌다. 이후 ‘선율처럼 굽이치는 등고선을 밟아’ 가는 산행이 시작되는데, 시인의 눈에 펼쳐진 풍광과 절경이 두어 쪽에 걸쳐 눈부시다.

계절로 치면 봄에서 여름까지, 젊은 시절의 한가(閑暇)와 완상(玩賞)을 놓친 게 아쉬웠을 수 있겠단 생각은 해본다.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한 마디에 담긴 회한의 깊이를 타인이 잴 수 없으니 잠시 요량만 할 뿐이지만…. 그리 짐작할 일이 아니라, 흐릿한 주점에서 얼마간이라도 집요하게 청문할 일일라나.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를 숙이고
표제를 잊고 목차를 훑다가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 숙인다’는 제목이 숭고해 다시 책을 펼쳤다. ‘밥이 하늘’이라는 동학 교주 최시형(또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의 파격 선언을 공유하며 시작하는 글을 찬찬히 읽고 있자니 시인의 말마따나 밥 앞에 송구하다. 나의 밥과 남의 밥이 모두 하늘인데, 어느 쪽에도 신심을 보이지 못했다. 내 밥엔 탐욕했고, 남의 밥엔 질투했다. 안팎으로 불경했다. 시인의 관찰대로 누구나 밥 먹을 땐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늘 고개든 채로 좌고우면하며 흘기고 탓했다.

밥은 하늘이기 전에 생명이다. 생명이었다가 하늘이니 더하고 뺄 것 없이 그 자체로 우리 삶이다. 그러나 그런 암시를 파악하고 안심하는 순간, 시인은 밥상을 엎는다. 숟가락을 엎고, 밥그릇을 엎어 놓고는 둘 다 무덤 형상이라 귀띔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불이(不二)의 경구가, 깜깜한 새벽 절간의 차디찬 쇠문고리 촉감으로 마음에 예리한 충격을 안긴다.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시인의 촌철이 매서워 흠칫한다. 그 앞에서 숭고와 송구가, 삶과 죽음이, 밥과 무덤이, 번뇌와 열반이 한 끗 차이를 버리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시인의 문장 깊숙한 곳마다 연한 먹물처럼 그리움이 고였다. 정상이 사라진 산에서 낮은 풍경에 반한 뒤 밥상으로 내려와 무덤을 읽는 시인에겐 뜨거웠던 대낮의 지난 세월이 아득하다. ‘나는 저녁이 좋다’ 제하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지난 삶을 간결한 서정으로 추상하며, 따스했던 시골 부엌 같은 저녁의 품에 안기려 한다.

슬픔과 허기의 가을, 그리고 저녁이지만…
수천의 시(詩)를 풀어내고도 서글픈 게 인생일까. 밤샘의 방생처럼 40년에 걸쳐 시를 펼쳤으니 허기질 수 있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가을 저녁의 허기 끝, ‘괜히 열심히 살았다’는 시인의 푸념이 독자들에겐 신새벽의 한줄기 바람처럼 성찰의 잠언들이다. 적요한 에세이의 숲에서 너와 나의 지난 일들이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산문 속으로 녹아든 시의 언어들은 홀연한 사유로 거듭나, 저녁노을의 진경(眞境)을 보여준다.

어쩜 우리 모두는 괜히 열심히 살았으나 그 무의미한 최선과 탈진의 끝에서 가려운 듯, 뒤척이듯 조심스럽게만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빛바랬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붉은, 타오르는 중인 서해 바다의 낙조(落照)처럼. 천년의시작 펴냄, 260쪽.


산문집 ‘괜히 열심히 살았다’/사진=헬스조선DB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2
  • 인간 2명 중 1명은 ‘불륜 유전자’를 보유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본 뇌과학자 나카노 노부코는 신간 ‘바람난 유전자’에서 끊임없이 불륜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뇌 과학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저자는 "인류의 뇌 구조는 일부일처제와는 맞지 않아 앞으로 인류 사회에 불륜이 사라지는 세상은 오...
  • 2019-06-28
  • [서울경제] ‘너무 잘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놀지 마, 희경씨.’ ‘책 많이 읽어, 희경씨.’ ‘버스나 전철 타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 희경씨.’ ‘재래시장에 많이 가, 희경씨. 그곳에서 야채 파는 아줌마들을, 할머니들 손을, 주름을 봐봐, 희경씨. 그게 예쁜 거야, ...
  • 2019-05-15
  • '프랑스인 중국 고전문학 존경…한국은 번역조차 안 돼 박지원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대산문학상 번역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스페판 브와 홍익대 교수. "조선이 지금과는 다른 굉장히 먼 세계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나는 오히려 오늘의 한국사회와 근접한 것으로 생각했다. 계층·계급이 오늘날도 여...
  • 2018-11-05
  • "나는 흔들리며 흔들리며 다시 너에게로 간다" 곽효환 시인[본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로 독자를 늘린 중견 시인 곽효환(51)이 신작 시집을 냈다. 시집 제목은 명료한 두 글자 '너는'(문학과지성사 펴냄). 지난 4년여...
  • 2018-10-28
  • 이호철 유작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 1950, 60년대 문단 풍경 정겹게 되살려 대표작 ‘판문점’ 취재 뒷이야기도 소설가 이호철(1932~2016)이 등단작 ‘탈향’을 처음 쓴 것은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였다. 최초의 제목은 ‘어둠 속에서’였고 200자 원고지 45장 분량이었다. 그...
  • 2018-10-05
  • “진정한 권력은 공포다(Real power is fear).” 한비자(韓非子)나 마키아벨리가 했을 법한 이 말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기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과의 인터뷰에서 했다. 정확히는 “진정한 권력은, 나는 이 단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공포다”이다...
  • 2018-09-07
  •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재일동포다. 재일동포라는 사실이 그를 규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장 과정에서 두 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둘째 형 서승과 셋째 형 서준식은 한국에 유학 중이던 1971년 ‘재일동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돼 각각 19년, 17년을 옥중에서 보냈다. 서경식은 청년 시절...
  • 2018-07-18
  • [여름 휴가지에 가져갈 한 권의 책] [1] 논픽션   여름의 한복판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날 때 책을 꼭 챙겨 넣는다는 '북 마니아'에게 물었다. 이번 휴가 때 가지고 갈 책 한 권은 무엇입니까?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영국인 칼럼니스트 팀 알퍼, 소설가 편혜영, 경제학자 우석훈이 추천했다.   선글라스는...
  • 2018-07-15
  • 추천인: 김해영(연변대학 교육학과 부교수) 추천도서: 매튜스의 《아동철학 3부곡》 추천대상: 부모, 교원 및 교육에 관심 있는 자 매튜스(马修斯)의 《아동철학 3부곡》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어른들의 고민, 아이들을 ‘경청, 사유, 표현’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주고 싶어하는 교원과 부모님들의 ...
  • 2018-07-03
  • [서평] 20년 경력 의사가 말하는 [오마이뉴스 임윤수 기자] 의사는 냉정하고 감정이 무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필자만의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겪은 최소한의 경험만으로 볼 때, 의사는 분명 여느 사람들보다는 차갑고 감정이 무딘 부류의 사람들이라 생각됩니다.   엄마가 돌아가시...
  • 2018-06-2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