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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후속보도(1) 권명률편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19일 00시00분    조회: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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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후속보도 오늘부터 시작 
 
편집자의 말:
 
2015년에 연변축구구락부 설립 60주년, 연변축구 전국 우승 50주년을 맞으며 길림신문사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대형기획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는 그해에 《길림신문》에 륙속 발표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1965년 전국 우승의 주인공들인 부분적 대표원로들을 찾아 당년의 감격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량한 축구전통의 뿌리를 캐고 앞으로 연변축구의 진흥에 좋은 경험교훈을 다시 되새기려는 취지에서 우리는 이 보도를 시작했다. 
 
시간이 급하고 일손이 딸리는 상황에서 당시 우리는 제한된 축구인물들에 대한 취재와 집필에만 매달리다나니 어제와 오늘을 아우르는 더 넓은 범위에서의 연변축구의 영광의 주인공들을 다 조명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영도 강렬했고 부탁도 간절했다. 그래서 우리는 후속보도를 이어가기로 했다. 
 
후속보도에 등장하는 영광의 주인공들 역시 연변축구의 휘황을 안아오기 위해 당당히 한획을 그은 축구건아들이며 연변축구사업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온 무명영웅들이다. 취재과정에 우리는 이처럼 많은 우리민족 축구건아들이 오늘날 전국적으로도 유일한 소수민족 축구팀인 연변축구의 유구한 력사와 무궁무진한 발전을 위해 든든한 초석을 다져주었다는데 대해 공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전차지감(前车之鉴)이라고 새로운 영광의 주인공들을 조명해보는 이 자리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비로소 보람찼던 과거를 거울로 삼아 더욱 휘황찬란한 앞날을 계획하고 전진할수 있을 것이다.
 
길림신문사
 
 
 
70년대 길림성팀 공격수, 주장, 감독...권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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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조선방문경기중 평양 천리마기념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명률.
 
권명률은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장장 16년 동안 길림성청소년팀, 길림성축구대표팀의 중앙공격수, 주장, 감독으로 있으며 길림성축구발전의 한획을 긋는 데 공헌을 세운 분이시다. 
 
올해 72세인 그는 장춘에서 퇴직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를 만난 것은 지난 9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였다. 
 
70세를 넘긴 로인이였으나 정기 도는 눈빛과 흐트러짐 하나 없는 꿋꿋한 체격, 빠른 걸음걸이에서 푸른 잔디밭을 주름 잡던 30~40년 전 그 때, 그 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권명률선생의 집 부근의 한 켄터키점 조용한 한구석에서 커피 두잔을 시켜놓고 취재는 시작되였다. 지금까지 꾸준하게 일기를 써왔다는 권명률선생은 뭔가를 가득 적은 편지종이를 들고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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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 청도전국중학교축구경기중 동료선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권명률(오른쪽 두번째).

 
 
소년팀 주력선수시절로부터 입당하기까지
 
1945년, 연길에서 출생한 권명률선생은 연길시 동광소학교를 다닐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고 뽈을 잘 찼다. 1960년 15세 때 연길시2중학교에 입학한 권명률은 리정협선생님의 지도 아래 연길시2중대표팀에 입단하여 1964년 8월 청도에서 펼쳐진 전국중학교축구경기에서 2위라는 좋은 성적을 따냈다. 경기후 1, 2위를 한 두팀은 북경체육장에 가서 시범경기를 펼쳤는데 마지막에는 하룡 원수와 함께 사진을 남기는 영광도 지녔다.  
 
경기에서 중앙공격수를 맡은 권명률은 출중한 표현으로 리광수, 허명룡 코치의 눈에 들었고 1964년 12월에 정식으로 길림성소년축구팀에 가입하게 되였다. 
 
이듬해인 1965년, 청년팀으로 올라간 그는 주장으로 팀을 이끌고 훅호트에서 펼쳐진 전국청년축구경기에 참가하여 4위의 영예를 따냈다. 
 
1966년, 국가 1팀, 2팀 그리고 전국 일곱개 중점팀에서 함께 광주에서 겨울철집중훈련을 진행했다. 
 
“그번 집중훈련에서는 일본의 훈련방식을 도입하였고 국가체육위원회에서 과학연구도 함께 진행하였는데 매 과목마다 운동량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 때 동경춘선수는 한 수업시간에 만메터를 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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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길림성축구팀과 기념사진을 남긴 권명률(아래로부터 두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
 
그번 훈련에서 이악스럽게 훈련한 권명률은 그 출중한 표현을 인정받아 1966년 5월 8일에 리광수, 지운봉 코치의 소개로 21세의 나이에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주장에 변선공격수 그리고 감독
 
1970년 5월 길림성군구에서 길림성팀을 접수, 관리하면서 길림성팀에서는 연길로부터 장춘으로 옮기게 되였고 권명률은 장춘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장춘에 온 길림성팀은 장춘에 있던 길림성청년팀과 합병하여 길림성팀을 새롭게 구성했지만 조선족선수가 80%를 점했다. 그 때 우리 팀에는 유동수, 정종섭, 량춘석, 류명복, 리두금, 박성규, 김해수, 정지승, 김경식 등 쟁쟁한 조선족선수들이 있었다.” 
 
그는 그 때로부터 장장 1980년까지 길림성축구팀에 몸을 담그고 주장, 주력선수(중앙공격수, 변선공격수), 감독으로 활약했다. 
 
“그 때는 내가 속도도 빠르고 기술도 좋았다. 그래서 변선공격수로 많이 활약했다. 그 뒤로 1975년에 감독을 맡았는데 그 때로부터 속도가 빠른 선수들이 많지 않아서 1980년까지 중앙공격수로도 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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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조선방문경기중 길림성축구팀 동료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권명률(가운데).
 
1975년, 제3회 전국운동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길림성축구1팀에서는 조절이 있었는데 그 해 10월에 권명률선생은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길림성축구팀의감독 겸 선수(주장)로 임명을 받았다. 
 
그 뒤로 5, 6년간 축구교육에 종사하면서 1980년대 연변축구의 기둥으로 활약하였던 김동호, 황승활, 오상덕, 최용철, 렴승필, 김광수, 전석기, 리승범, 김민선, 김일성, 박원산, 최춘호 등 우수한 제자들을 발굴하고 양성하여 나라와 길림성 및 연변의 축구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외국팀들과의 친선경기와 펠레의 싸인
 
취재를 받던 권명률선생은 먼저 내놓았던 편지지를 들고 길림성축구팀으로 있던 시절에 치렀던 경기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1972년 5월, 길림성팀에서는 꽁고국가팀과 심양체육장에서 경기를 치렀다. 그 때 진석련(陈锡联: 당시 료녕성성위 서기) 장군이 경기를 관람했는데 먼저 치른 료녕팀과 꽁고팀의 경기에서 료녕팀이 0:1로 졌으므로 경기후 진석련 장군은 길림성팀에서는 반드시 이겨 국위를 빛내야 한다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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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싸인.
 
“이 지시를 받은 길림성팀의 선수들은 필사적으로 경기를 펼쳤다. 뛰고 뛰고 또 뛰고 이악스레 방어를 하여 우리는 끝내는 2:1로 꽁고팀을 이겼다. 그 때 동경춘선수는 수비를 맡았는데 경기도중에 부상으로 이발이 다 부러졌다.”고 권명률선생은 회억했다. 
 
1972년 5월부터 한달 동안 조선에 가서 체류하면서 경기를 치렀다. 자강도팀과는 두껨의 경기를 이겼고 황해남도에 가서 경기를 치렀는데 황해남도 안전부대팀한테는 3:1로 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안전부대팀은 조선의 전국축구경기에서 2위를 한 팀이였다. 
 
그 때는 외국팀과 경기를 치를 기회가 아주 적을 때였다. 하지만 길림성축구팀에서는 1973년 5월에 까메룬의 국가대표팀과 장춘에서 경기를 치렀고 그 해 10월에는 조선의 함경북도팀과 경기를 치렀으며 1974년 7월에는 모리따니아의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치렀고 그 해 8월에는 세네갈의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치렀다. 그 때 길림성축구팀에서는 날렵하고도 강인한 경기풍격으로 축구계인사들과 관중들의 찬사를 많이 받았다. 
 
1977년, 미국 뉴욕우주팀에서 중국을 친선방문했다. 그 때 뉴욕우주팀은 세계의 축구왕 뻴레와 축구황제 베컨바워가 몸을 담고 있는 세계적인 슈퍼강팀이였다. 마침 그번 경기를 관람하고 당시 미국 뉴욕우주팀 감독과 뻴레의 강의도 들었던 권명률선생은 그 때를 이렇게 추억한다. 
 
1974년, 세네갈국가팀과의 경기에서 권명률이 길림성축구팀을 대표해 세네갈국가팀의 주장과 팀기발을 교환하고 있다. 
 
“그 때 전국적으로 우수한 팀의 감독들을 조직하여 왕부정호텔에서 강의가 있었는데 팔달령관광을 하느라고 뻴레는 좀 늦게 왔었다. 뉴욕우주팀 감독이 강의를 하고 뻴레가 그다음으로 강의했는데 뻴레에 대한 인상이라면 머리가 좋았다는 것이다. 짧은 경기시간이였지만 뻴레는 중국팀의 모든 선수들을 기억했고 그들의 특점을 모두 관찰해냈다.” 
 
강의가 끝난 뒤 권명률선생은 뻴레에게 다가가 싸인을 요구했는데 뻴레는 흔쾌히 승낙하며 그가 내민 노트장에 싸인을 해주었다. 
 
이 싸인은 아마 뻴레가 중국본토에 와서 한 제일 첫 싸인일 것이다. 권명률선생은 그 때 그 뻴레의 싸인이 있는 노트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감개무량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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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까메룬축구팀과의 경기에서 남긴 기념사진. 
 

 
퇴역 그리고 축구인생
 
1980년에 길림성팀이 장춘에서 연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는데 권명률선생도 35세에 길림성팀에서 퇴역했다. 
 
그 뒤 그는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에 남아 여러 일터를 옮겼지만 축구에 대한 애착은 버리지 못했다. 그는 1998년에 52세의 나이에 조기퇴직을 하고 길림성체육학원 축구학교에 몸을 담고 축구후비력량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그는 길림성체육학원에서 부교수급 축구교사로 있었고 그 뒤에 정식으로 일터에서 떠나 지금은 부인과 함께 손녀를 키우며 만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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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권명률(오른쪽 첫번째)은 부인 김명숙(왼쪽 두번째) 그리고 친척과  함께 미국관광도중 려객기조종사(오른쪽 두번째)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권명률선생은 길림성축구팀에 있을 때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때는 우리 선수들은 모두가 축구가 전부인 줄로 알았다. 정신으로 축구를 했는데 물질적인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도 그 때 축구만 알았다. 훈련하고 경기를 펼치고 거기에만 모든 정신을 팔았고 축구를 위해 모든 정열을 바쳤다. 국내에서 원정경기를 할 때 나는 위가 나빠서 경기를 마치고는 숙소에 박혀 앓다가도 감독이 넘겨주는 약을 먹고 나으면 이튿날 또 목숨을 내걸고 경기를 치르군 했다.” 
 
“지금은 로임도 높고 축구환경도 훌륭한데 축구가 안된다. 축구선수는 어릴 때부터 양성해야 한다. 지금 중국에서는 습근평주석이 축구를 아주 중요시하는데 기층에 내려와서는 안된다. 사상교육, 도덕교육과 문화와 축구기술을 결합해서 어릴 때부터 양성해야 우리 축구가 앞으로 더욱 번영해질 것이다.” 
 
/길림신문 김룡 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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