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명장, 그리고 눈 속에 내리던 이야기(상)
1957년 통화조선족중학교 자매선수, 왼쪽으로부터 배인순, 김춘매, 허선옥.
세상은 금방 하얀 눈으로 뒤덮였고 동네의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빙판이 생겨났다. 그러면 어른들은 발구를 이용하여 짐을 날랐으며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얼음지치기를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그때 그 시절 뉘라 없이 즐기는 겨울놀이 기구가 있었다. 항간에 ‘앉은뱅이 발구’로 불린 썰매이다. 썰매는 네모난 판자 밑에 각목을 달고, 각목 앞부분을 쳐올려 땅에 머리를 박지 않게 한다. 눈썰매와 얼음썰매는 아이들에게 겨울의 짜릿한 재미를 선물한다. 제일 고급스런 놀이기구는 그래도 스케이트였다. 이 기구는 신발 바닥에 쇠의 날을 붙여서 만든다. 얼음 위를 지치도록 만들어진 스케이트는 옛날의 시골에서는 흔치 않은 운동 기구였다.
배인순은 어릴 때 스케이트를 손으로 만져 보지도 못했다.
“우린 ‘스케트’라고 불렀는데요. 그때는‘스케트’를 타는 애들이 아주 적었거든요.”
스키 역시 빙설 운동도구이지만 더구나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방인’이였다. 좁고 긴 판상에 신발을 붙이고 눈 위를 달리는 도구라고 하니 고작 동네의 눈썰매를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배인순은 ‘이방인’의 등에 닁큼 올라타고 신나게 설원을 달리게 된다. 궁극적으로 중국의 제1대 스키선수의 일원으로 되며 나아가 스키명장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스키는 실제로 명칭 자체부터 ‘이방인’이다. 유럽의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얇은 판자’를 스키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였다. 들판을 달리는 스키를 노르딕 스키(Nordic skiing, 越野滑雪)라고 하며 눈 덮인 경사지를 내려오는 스키를 알파인 스키(alpine skiing, 高山滑雪)라고 부른다. 이 모두 구릉지가 많은 북유럽에서 생겨난 스키라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가장 오래된 스키는 지금부터 약 4,5천 년 전 북유럽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상 스키는 옛날 동토지대의 만족, 어원커족 등 대륙의 북방민족들도 널리 애용하던 겨울용 도구였다. 당나라 때의 「북사(北史)」에 ‘기목(騎木)’이라고 나오며 「통전(通典)」에는 한발 더 다가서서 “6촌 너비의 나무로 길이가 7자인데 이걸 발에 신어 얼음을 밟고 달려서 짐승을 쫓는다”고 세세히 기록되고 있다.
오랜 력사에도 불구하고 스키 기술은 근대에야 비로소 급격한 발전을 이뤘다. 그 전에는 스키신발과 스키를 몸에 단단히 고정할 수 없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서 더 고급적인 기술을 연출할 수 없었다. 18세기와 19세기를 선후하여 스키신발을 발뒤꿈치에 잘 고정할 수 있는 가죽 끈이 고안되었고 또 바인딩(binding, 스키신발의 바닥에 스키를 고정시키는 도구)이 고안되면서 스키는 드디어 근대 스포츠 운동의 일종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와중에 노르딕 스키는 동계올림픽에서 1924년의 제1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알파인 스키는 1936년의 제4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였다.
일찍 1938년 길림성 통화에 강남스키장 등 전문적인 스키장이 다섯 개나 있었다는 문자 기록이 있다. 그때 현지에는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근대 스키는 1911년 아시아에 처음 출현한다. 그즈음 일본을 방문했던 오스트리아 군인이 최초의 스키 전도사였다고 한다. 알파인 스키는 그로 인해 일본에서 먼저 군대가 전수했지만 잇따라 민간에 전파되였다. 얼마 후인 1923년, 북해도에서 제1회 전일본선수권경기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통화는 눈의 품질이 좋았고 눈이 내리는 기간이 길었으며 풍속이 작은데다가 기후가 온화하여 스키운동에 아주 적합하다.
괴뢰 만주국(僞滿洲國)시기 스키장을 하필이면 통화에 선정하고 또 여러 개나 선정할 수 있은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1959년 중국과 쏘련 전문가들이 고찰을 거쳐 스키장을 선택하는데, 국제수준의 중국 첫 스키장은 종국적으로 통화의 옛 스키장 지역에서 출현한다.
일찍 1950년대 초, 동북 3성의 눈이 내리는 산 지역에서 ‘빙설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였다. 통화시 스키 합동훈련대는 이 무렵에 등장했다. 중국은 1956년 통화시에 길림성 스키경기대회를 열고 뒤미처 1957년 통화시에서 제1회 전국 스키경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북방의 작은 도시 통화는 갑자기 동화속의 스키세계로 떠올랐다.
1957년 제1회 전국스키경기대회 때 준비작업을 하고있는 배인순(우1)과 동아려(좌1), 손숙금(좌2), 김승매(좌3).
통화시는 스키 합동훈련대의 범위를 더 늘리기로 했다.
“품행이 좋고 공부 성적이 높고 체육 소질이 뛰어난 학생을 선정해서 스키를 집중훈련을 한다, 이거였습니다.”
학교의 체육교원 허성일이 배인순을 찾아왔다. 그는 또 통화시 스키 합동훈련대의 스키 지도원이였다. 오래전부터 배인순을 점찍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스키대원의 선발 통지문은 일부러 짜고 맞춘 것 같았다. 허성일의 말을 따른다면 배인순은 스키 합동훈련대의 선발조건에 앞뒤로 딱 들어맞고 있었다.
배인순은 감독이라면 뉘라 없이 욕심을 내는 선수였다.
하긴 배인순의 특기는 하나 뿐이 아니였다. 그는 학교의 기계체조(器械體操) 선수였고 배구선수였다. 기계체조는 기계를 사용해서 하는 체조를 통 털어 이르는 말이다. 올림픽에서 녀자 종목으로 마루, 평균대, 이단평행봉, 도마 등 4종목이 있다. 통화시에서 중학교운동대회가 열릴 때면 통화조선족중학교의 기계체조는 단연 압권이였다. 통화시 학교 기계체조 경기가 있으면 통화조선족중학교 기계체조팀이 번마다 1등을 했다. 와중에 물을 찬 제비처럼 이단평행봉을 오르내리는 배인순은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정작 배인순이 소문을 놓은 것은 기계체조가 아니라 배구경기였다. 1955년 여름 성급 조선족 배구경기가 있었는데, 배인순이 소속된 통화조선족중학교 녀자배구팀은 3등상을 받았다. 이때 배구장에서 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배인순이였다. 주심이 호각을 불면 곧바로 경기와 함께 시작되는 게 서브이다. 서브는 상대의 수비와 공격을 흐트러뜨리는 수단이다. 배인순의 멋진 서브는 늘 상대의 진영을 단번에 붕괴시켰다. 나중에 관객들은 그가 서브를 넣을 때면 함께 “엇샤!”하고 응원을 했다. “기똥차게(전라도 방언, 뛰어나다는 뜻) 서브를 잘 치는 녀자애’는 그렇게 소문이 난 것이다. *
(다음에 계속)
/글, 사진 북경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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