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서 끌려온 위안부들은 점령 첫날부터 온종일 사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당시 위안부를 기다리는 사병들의 늘어선 줄 길이가 3km를 넘었는데 이는 3천명 이상의 사병들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대략적으로 계산해도 위안부 1명당 평균 370~380명의 사병을 상대해야 했다"
후베이(湖北)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일본 작가 센다 가고(千里夏光)의 책 '종군위안부(随军慰安妇)'에 서술된 위안부 관련 내용 중 일부이다. 인민일보 인터넷판 인민넷(人民网)은 '종군위안부'의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하고 당시 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전했다.
'종군위안부' 작가는 몇년에 걸친 노력 끝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푸아뉴기니령 뉴브리튼섬의 주도인 라바울시를 공략했던 일본군 니시야마 고키치 씨를 인터뷰했다. 니시야마 씨는 당시 일본군의 저지른 행위를 폭로했다.
니시야마 씨의 증언에 따르면 1942년 1월 22일, 자신이 속한 남해지대(南海支队)는 새벽에 라바울 시를 공략해 그날 저녁에 시 전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점령 후, 대대장은 라바울 시장의 딸을 강간했고 뒤이어 일부 군관들도 대대장처럼 그녀를 강간했다. 수치심을 느낀 시장의 딸은 결국 들보에 목을 매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니시야마 씨는 "이같은 일은 당연히 군사법정에 회부돼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부대에서는 이를 군기위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며 "중일전쟁 발생 후 사병들이 점령지의 부녀자를 강간하는 사건은 밥먹듯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다. 남해지대는 점령 전부터 대륙에서 위안부 10여명을 데리고 왔고 점령이 끝나자 그 날부터 위안부들로 하여금 온종일 사병 4천여명을 상대하게 했다.
작가는 "대략적으로 계산해도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370~380명의 사병을 상대해야 했다"며 "만약 이게 참혹한 비극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꼬집었다.
한편 '종군위안부'에 따르면 일본군은 당시 중국에서 위안부 20만명을 동원했으며 상하이에 세계 최초의 위안소를 세우고 오랜시간 운영했다. 작가는 "중국 부녀자가 일본 위안부 제도의 가장 심각한 피해자"라고 전했다.
온바오/ 조글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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