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가 남자를 상징하는 악기라면 가야금은 녀자를 상징하는 악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녀자”에게 한생을 바칠겁니다.” 연길시성음민족악기공장 조춘호(46살)공장장의 롱담섞인 진언이다.
연길시 소영진 소영촌 제7촌민소조에 자리 잡은 조씨의 작업장은 나무를 켜는 여느 목재가공소와 별반 다름이 없다. 말이 악기공장이지 농가를 개조한 창고형 작업장이다.
마당 한켠에는 재료로 쓸 40, 50년 된 재래종 오동나무 원목들이 쌓여있고 그 옆에는 가야금을 만들수 있도록 절단한 널장(울림판)이 바람을 맞으며 악기로 다듬어질 날을 기다리고있다.
작업장 바닥에는 대패밥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주변에는 톱과 대패, 줄자 등 작업도구들이 손 닿기 쉽게 여기 저기 놓여있다.
지난 수년간 조씨는 이곳에서 가야금을 비롯하여 해금, 장구, 북 등 여러가지 민족악기를 만들어왔다.
1999년, 가야금소리에 매료된 조씨는 악기를 만드는 장인의 길에 들어섰고 2005년에는 자체로 민족악기제조공장을 세웠다. 그 이후로 조씨는 곁눈 한번 팔지 않았다. 사용하는 도구가 날카로와 자칫하면 크게 다칠수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린시절부터 손재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가야금을 만드는 일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즐겁기만 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낸다는 그 하나에서 보람도 느끼고요.”
“가야금도 사람과 같습니다. 사랑과 정성을 쏟지 않으면 금방 음색이 변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좋은 재료를 구입하고 좋은 솜씨를 유지하려고 모지름을 쓴다. 얼핏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가야금 한나를 만드는데 최소 한달이 걸린다고 한다.
조씨는 좋은 원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재래종 오동나무가 자랄만한 국내 여러 깊은 산속의 마을과 사찰을 자주 찾는다. 장기간의 실천과 검증을 거쳐 지금은 하남성에서 들어오는 오동나무를 쓴다.
평소 말수가 적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가야금에 대해 말할라 치면 청산류수이다. 오동나무라 하여도 춥고 척박한 땅에서 자란것이라야 재료로 쓰기 좋단다. 재질이 단단하고 좀이 먹지 않으며 음색이 곱기때문이다. 그는 립동(立冬)전에 벤 오동나무를 3년정도 진빼기를 시킨다. 이어 잘 건조된 나무를 요구되는 길이로 자른후 1년 이상 눈, 비를 맞히며 또 묵인다. 비탈림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나무를 오래 묵일수록 좋단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진짜 가야금재료로 된다.
가야금은 울림통과 밑판, 현, 안족(雁足)등으로 구성되는데 소리를 내는 울림통은 길게 절단된 오동나무널장의 밑부분을 일정한 두께로 파낸다음 밤나무로 만든 밑판을 대면 된다.
조씨는 가야금 하나를 만드는데 수백가지 공서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현을 퉁기거나 뜯었을 때 그 떨림을 울림통으로 전하는 매개체가 안족인데 12개의 안족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수공으로 똑같게 만드렁낸다. 이렇게 제작된 가야금은 음이 흩어지지 않는다. 요즘은 음색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최고로 현이 25개가 되는 가야금도 만든다. 인제 조씨는 울림판의 소리만 듣고도 판의 두께를 알 정도로 달인이 되였다.
조씨는 자기가 만든 가야금은 음색이 맑고 시간이 지나도 음질이 변하지 않는게 특징이라고 자부한다. 그의 공장은 연변대학 예술학원 민족악기제작업소로 지정됐고 제품은 국내외로 나가고있다.조선의 평양음악무용대학과 평양시소년궁에서는 련속 5년간 그의 가야금을 주문, 구입해가고있다.
“가야금을 사간 고객이 또다시 찾아와 악기를 사갈 때 가장 보람스럽습니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해주는거니깐요.” 조씨는 밝게 웃었다.
순간, 이상하게도 그 밝은 웃음소리가 가야금소리처럼 들리면서 가슴이 전률했다.
“둥기당당” 오랜 세월 끊기지 않고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을 담아온 가야금이 바로 조춘호씨와 같은 우리 민족 장인들의 지긋한 사랑과 정성에 받들려 그 맥락이 이어지고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이였다.
연변일보 정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