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해방 전후 산재지역 조선족교육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8월26일 07시58분    조회:139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40년 교육자의 길" 리기만 눌하현 승리대대 조선족소학교 전 교장으로부터 듣는다

얼마전“조선족100년실록” 편집팀으로부터 흑룡강성 눌하지역에서 한평생을 조선족교육에 헌신한 리기만 눌하현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 전 교장을 인터뷰를 부탁한다는 요청을 받았다. 리 전교장이 심양시 아들집에서 로후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리기만선생의 아들인 리홍광씨가 심양지역에서 유명한 조선족기업가인지라 그를 통해 쉽게 찾을수 있었다. 리홍광씨 사무실에서 차 한잔과 함께 마주한 1921년생 백발의 리기만선생은 점잖고 사유가 조리있는 교육자기질이 다분한 로지식인이였다.아래 그의 이야기와 함께 조선족산재지역인 눌하현 조선족교육을 들여다보자.

 
항일전쟁이 처절하던 1943년 만주땅,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가족을 찾아 온 21살 청년이 있었다.생계를 찾아 지금의 흑룡강성 눌하현에 안착한 가족들과 상봉한 젊은 리기만은 이 땅이 자신이 평생 교육자의 삶을 살아올 땅일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다.
 
1943년 5월, 지식인이 귀하던 시절이다. 갓 만주땅에 정착한 리기만은 현지 조선족협화회 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얼떨결에 눌하지역 조선족중심학교였던 계림국민우급학교에 취직해 교편을 잡게 된다. “그때는 일제정부밑에서 일한셈이지요. 일본어로 수업을 해야만 했어요. 별로 애착은 없었고 언젠가는 접고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였어요.” 교사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리기만을 바꾸어놓은것은 일제투항과 함께 맞은 광복이였다.
 
1945년 오매불망 기다리던 광복이 찾아왔고  만주지역 정권이 중국공산당으로 바뀌였다. 진보적인 지식분자였던 리기만은 오래전부터 중국공산당을 동경해왔다고 한다. 때마침 정부는 현지 100여호 조선족들을 집중시켜 신한농장이라는 생산대대를 만들고 리기만에게 조선족학교를 만들것을 요청했다. “공산당정부의 요청도 있었고 현지 조선인들이 자식들의 교육을 간절하게 원했지요. 공산당의 령도하에 공작한다고 생각하니 열정도 생겼구요.” 리기만은 농장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손수 교재를 편찬해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업은 전부 우리말과 우리 글, 불타는 열정으로 2년간 신한농장에서 글을 가르치던 리기만은 학교가 없던 린근의 하동농장으로 전근해 새로 조선인학교를 만들었다. 이곳이 그가 반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한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 전신인 하동농장조선학교이다. (1968년 하동농장이 이가전(二柯?)공사로 이전해 승리대대로 이름을 바꾸었고 학교도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로 바뀌였다.)

“우리 민족은 본래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이지 않습니까. 주민들이 힘을 합쳐 학교부지를 건설했고 정부에서 교사들의 월급을 책임졌습니다.” 리기만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조선족가정이 45호좌우에 가구당 학생이 1명정도로 50명 안팎을 유지했다고 한다. 교사는 교장이였던 리기만을 포함해 3명, 1,2학년 3,4 학년 5,6학년 매 2개 학년을 한명 교사가 맡아 수업을 가르쳤고 리기만은 5,6학년 수업을 맡았다. 교재는 전부 리기만이 손수 편찬했다. “지식분자가 귀한 그때는 지금처럼 과목별로 교사를 찾을수 없었지요. 더우기 산재지역 자그마한 소학교에는 상상도 못합니다. 심지어 2개 학년이 동시에 수업해야 했는데 교수안준비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였습니다. 웬만한 책임감 없이는 어려운 일이였지요.” 리기만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일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문화교육은 물론 음악, 체육 ,미술 교육도 견지해온 일이다. 교원들은 공부를 가르치는 한편 악기도 다루고 그림도 그리고 공도 차고 달리기도 해야 했다며 우스개소리로 만능인재라고 소개했다. 박봉인 교원노릇이지만 이들한테는 열정과 책임감이 있었기때문에 견지할수 있었다.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엿볼수 있는 다른 사건이 있다. 눌하지역 문맹퇴치가 가장 빠른 농장이 이들 하동농장이였다. 1947년 학교를 갓 세운뒤 리기만은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조직해 대대의 청장년들을 불러모아 조선어와 한어를 가르치며 문맹퇴치에 나섰다고 한다. 하여 새중국이 성립되고 정부에서 문맹퇴치를 중시할즈음 이들 농장은 이미 문맹퇴치가 기본상 끝나있었다.

“그 당시야 뭐 글을 가르친다고 하니 젊은이들의 학구열도 높았지요. 아니면 저 혼자 힘으로 됩니까.” 리기만은 그 공로를 겸손하게 사양하며 말길을 다시 학교교육으로 돌렸다.

“저희 학교가 작고 여건이 어려웠지만 교수질은 꽤나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건 제가 떳떳이 항상 자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여건상 2개 학년 동시수업인 복학년수업을 하는 작은 조선족학교였지만 이들의 진학률은 항상 눌하지역을 포함한 당시 서만지역이라고 칭한 치치할지역 1위였다. 당시 이 지역 조선족소학교 졸업생들은 치치할조선족중학교로 진학하는데 9년의무교육인 지금과는 달리 입시를 거쳐 중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자그마한 하동농장에서 서만지역 입시 1등도 나왔고 진학률도 단연 1위였다. 1978년 리기만이 우수한 교학능력을 인정받아 흑하에 있는 흑룡강사범전문학교로 전근갈때까지 쭉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고 한다.
 
우수한 학업성적이 그의 첫번째 자랑거리라면 두번째는 항상 사상교육을 놓지 않은것이다. “학생들이 학업이 우수한것보다 제가 더 보람을 느끼는것은 우리 학생들의 사상교육을 잘 틀어쥔것입니다.” 리기만의 기억속에 그의 학교에는 진보적인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항미원조가 갓 시작되면서 지원군을 모집할때였지요. 저희 학교 6학년 학생 3명이 자진해 입대신청을 했습니다. 입대신청이 접수되여 심양군구에까지 갔었는데 당시 군구책임자께서 돌아가 공부해 더 큰 인재가 되라고 돌려보냈습니다. 학생들의 각오가 높으니 교장인 저까지도 체면이 서더라구요.”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에서 30여년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단 한명도 삐뚤어진 길로 나간 학생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문화교육에서 사상교육까지, 어느 방면 하나 빠질데 없이 학생들을 가르친 리기만교장의 평생 교육자의 길은 그의 자식들의 현재에서 성과를 엿볼수 있다. 심양현지에서 유명한 기업가로 알려진 리홍광 레드기업(瑞德企?) 사장이 7남매중 다섯째, 큰아들인 넷째는 현재 중앙민족대학 부서기로 재직중이며 기타 다섯남매 모두 이들 못지 않은 성공인사들이다. 7남매 모두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 졸업생들이다.

“자그마한 농촌에서 글을 가르친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어쩌면 고달픈 일이였지요. 하지만 저의 학생들이 저를 통해 지식을 배우고 세상을 알아간다는것, 그리고 자그마한 모퉁이에 자리한 조선족지역이 저희 학교로 인해 민족교육을 이어갔다는게 지금에 와서는 더없이 뿌듯한 일입니다.”인터뷰하는 동안 옛 추억에 잠겨 잔잔한 웃음속에 이야기를 해나가는 리기만선생의 주름진 미소안에는 고달펐지만 열정과 동경으로 가득했던 산재지역 민족교육의 옛모습이 보이는듯 싶었다.   

료녕신문 김탁기자

Total : 1576
  • 23일, 림경애교수작품전이 연변대학 미술학원 미술관에서 개막되였다. 작품전에는 림경애교수가 그간 창작한 “산골의 산천어”, “해란강의 봄”, “녀인과 길” 등 80쪽 작품이 전시되였다. 작품은 조선족녀성들의 일상적인 생활모습과 민족풍속을 명랑하고 우아한 색채로 표현한것이 특징...
  • 2013-10-24
  •  ―“동포세계신문” 김용필 편집국장 인터뷰   서울 구로동의 7호선을 타고 남구로역에 내려 4번 출입구로 나오면 한자로 된 간판들이 두 집 건너 하나일 정도로 즐비하게 걸려 있다. 그중 ‘동포세계신문’ 한글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약 40평의 K&C회관에 간...
  • 2013-10-24
  • -연변TV드라마가 받은 첫 국가급상으로 우리나라 TV드라마사상 조선족의 전통미덕과 정신풍모,민속풍정 및 문화예술특정을 반영한 첫 TV작품이며 연변에서 만든 TV드라마작품인 《장백산아래 나의 집》이 국가신문출판라지오TV본국 중국TV예술위원회서 평선한 제29기 중국드라마 비천상(飞天奖)부분 3등상에 입선되였다. 《...
  • 2013-10-22
  •   조선출판물교류협회 기증으로 연변도서관에 조선도서 125가지, 1000책이 늘었다. 지난 주말 연변도서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도편전시회 및 도서기증식이 있었다. 연변도서관이 새롭게 건설된 지난해 조선출판물교류협회와 연변도서관에서는 공동히 "중국연변-조선평양 우호도서관"을 설립해 연변 나아가 중...
  • 2013-10-21
  • —대중문화 활성화를 위한 문화의 요람—밀산시조선족문화관 2013년 대형집체무 공연의 한 장면/황목단       (흑룡강신문=하얼빈) 피금련,최성림기자= 밀산시조선족문화의 계승, 발전과 문화에 대한 조선족대중들의 접근성강화에 취지를 둔 밀산시조선족문화관은 밀산시에서 유일한 조...
  • 2013-10-21
  • 풍요로운 고향의 한장면   (흑룡강신문=옌타이) 박영철기자= 창단 67년을 자랑하는 연변가무단이 10월 11일~13일까지 3일간 옌타이시 래산구 우차이(五彩)문화광장에서 대형중국조선족원작가무 '노래하노라 장백산' 공연을 세차례 진행하였다.   11일 저녁 공연은 월드옥타 옌타이지회에서 주최하고 흑룡강신문...
  • 2013-10-18
  • 10월 16일, 영구시문광전국, 영구시민족사무위원회, 한국 강원도예술총련합회서 공동주최하고 영구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 한국강원도연예협회, 영구시음악가협회에서 주관한 “제13기료녕영구아리랑중한가무제”가 료하강반 영구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영구시조선족별빛소년예술단의 농...
  • 2013-10-18
  • 17일, 중국 연변-조선 평양 우호도서관 개관 1돐 기념활동이 연변도서관에서 펼쳐졌다. 조선출판물교류협회의 김정수국장을 비롯한 책임자들과 연변도서관 및 연변 8개 현(시) 도서관 관장 등 100여명이 참가했다. 지난해 연변도서관 신관의 개관과 더불어 건립된 “중국 연변- 조선 평양 우호도서관”은 상호방...
  • 2013-10-18
  • 청년작가 김춘택씨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 창도해간다 오래전부터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의 번지를 거의 찾을수 없었다. 또 중국조선족장례문화의 번지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토장(土葬)문화가 상실되고 화장(火葬)문화가 성행되면서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도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이슥하다. 이제 60 고개를 퍽 넘...
  • 2013-10-18
  • 녕안시 조선족 룡다리 줄다리기 시합 장면. /최영란 (흑룡강신문=하얼빈) 일전 녕안시 조선족문화관에서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문화를 고양하는 취지에서 한국 경남 창녕군 운산줄다리기보존회 신수식회장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녕안시 조선족 룡다리 줄다리기 활동을 뜻깊게 조직하였다.   이번 녕안시 조선족 룡다리...
  • 2013-10-1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