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북경조선족대학생, 박건일교수의 한락연 관련 특강 청취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23일 10시19분    조회:186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19일, 북경조선족대학생 력사문화살롱에서는 중앙민족대학에서 44번째로 되는 행사를 가지고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세계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중심 주임이며 수석연구원이며 박사생 지도교수인 박건일교수를 청해 혁명가이며 화가인 한락연동지의 혁명생애와 이야기를 청취하고 박건일교수의 한락연 관련 연구성과에 대해 알아보았다. 행사에는 20여명 학생들과 연구원, 출판계와 매체 관련 인사들이 참석했다.

 

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

박건일교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정부와 화룡시당위의 위탁을 받고 한락연에 대한 연구, 협조 사업을 담당해왔다. 박교수는 한락연은 위대한 예술가와 혁명가로서 그의 력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있다. 우리 세대는 한락연에 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갈 책임이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건일교수는 한락연의 생애를 소개했다.

한락연에 대한 연구성과를 강의하고있는 박건일교수

한락연은 조선족으로서 본명은 한광우, 1898년에 룡정시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렸을 때 조선인 반일지사가 룡정촌에서 창설한 “서전서숙”에서 공부했다. 그후 “룡정관립학교”(일본인 설립)에서 계속 공부를 했다. 한락연이 출생한 시대는 조선이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합병되는 시대였다. 한락연이 다닌 “서전서숙”은 반일사상을 기초로 하는 학교로서 이는 모두 나중에 한락연의 사상과 행동 변화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2살때 한락연은 가정경제형편때문에 공부를 계속 하지 못하고 룡정전화국의 교환원으로 있다가 세관사무원으로 있었다. 세관의 일을 통해 한락연은 국외의 선진사상을 접촉하게 되였고 1919년 연변에서 폭발한 “3.13” 반일운동에 참가했다. 운동이 진압되자 한락연은 구쏘련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리동휘의 한인사회당에 참가했다. 그후 이 당은 함인사회당(喊人社会党)으로 개편되였다. 한락연은 이 당에도 가입, 공산주의사상을 접촉하게 되였다.

1920년 그는 리동휘를 따라 상해에 가 대한민국림시정부에서 경위사업을 하는 한편 이름난 국화대가인 류해속이 꾸리는 미술전문학교에 다녔다. 거기에서 공산당원인 채화삼을 알게 되였다. 한인사회당의 내부모순이 심해지자 한락연은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그는 중공 최초 당원중의 일원으로 되였으며 중국조선족의 첫 중공당원으로 되였다.

1924년 1월, 한락연은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후 동북당조직을 건립하라는 당의 파견을 받고 지금의 심양 봉천으로 갔다. 사업을 더 잘 하기 위해 당조직은 “상해기독교청년회”를 통해 한락연을 “봉천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도록 소개했다. 거기에서 청년회 학생부 총간사로 있는 염보하의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

1925년 하반기로부터 1929년까지 한락연은 중학 미술교원 등 신분으로 심양, 할빈, 치치할에서 비밀혁명사업에 종사하고 미술창작을 했는데 동북지역 근대미술의 발전을 추진하고 동북지역에서의 당조직 건설을 위해 걸출한 공헌을 했다. 1929년말 당조직에서는 한락연을 상해에 전근시켜 사업하게 했는데 사업중 신분이 폭로되여 1930년 당조직의 동의를 거쳐 근공검학으로 프랑스에 갔다.

1931년 한락연은 빠리 루브르미술학원에서 공부했다. 그후 화란, 벨지끄, 영국, 이딸리아 등 나라에 가 사생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사이에 한락연은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회화기초가 더욱 단단하게 다져지게 되였다. 그는 많은 유화와 수채화를 그렸으며 여러차례 화전을 가졌는데 당지 명인들의 관심을 모았으며 유명 신문에도 련속 보도돼 중국화가 한락연과 그의 미술작품이 널리 알려졌다. 1937년 10월, 한락연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류학할 때의 학우들과 함께 양호성장군을 수행, 보호하면서 배를 타고 귀국했다. 귀국한후 주은래동지가 직접 한락연을 무한의 “동북항일구국총회”에 배치해 선전과 련락 사업을 맡게 했다. 1938년 4월 한락연은 “동북항일구국총회”와 함께 중경에로 철소했다.

1940년 한락연은 진남전지 시찰후 돌아오는 길에 섬서 보계 국민당특무기관에 의해 비밀리에 체포되였다. 체포원인은 지금까지 알수 없다. 그는3년 동안 선후로 국민당 섬서성 당부와 서안 “특종구류소”에 갇혀있었다. 출옥후 한락연은 서안에서 개인화전을 열었으며 이 기간에 혁명청년 황주를 알게 되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나중에 황주는 우리 나라 유명예술가가 되였다. 황주의 동반하에 한락연은 보계에서 화산으로 팔백리 진천에서 사생생활을 했다. 한편 한락연은 황주에게 회화지식을 가르쳐주었는데 황주의 미술사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946년 4월, 한락연은 신강에 가 고찰, 툴판에서 다구고창국 유적에, 키즐천불동에 가 고찰하기도 했다. 키즐천불동은 중국 고대예술의 보물고중의 하나로서 한락연은 돈황보다 예술가치가 더 있는 곳이라고 여겼다. 중국의 예술가가운데 한락연은 첫번째로 키즐천불동에 대해 계통적으로 번호를 달고 정리하고 기록한 사람으로서 중국의 예술사업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47년 봄, 한락연은 다시 키즐천불동에 가 고찰한후 우룸치에서 화전을 열었다.

1947년 7월, 한락연이 민족예술을 구제하고 고양하려는 마음을 안고 더 큰 정력으로 고고(考古)와 예술 사업에 종사하려 할 때 그가 탄 국민당 군용비행기가 우룸치에서 란주로 가는 도중 사고가 생겨  젊은 목숨을 잃게 되였다.

한락연의 죽음은 많은 의문점이 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물증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행기 파편이나 유체도 발견하지 못했는바 연구해야 할 일이다. 새 중국이 설립된후 한락연을 혁명렬사로 추인하고 모주석께서 직접 혁명렬사영광기념증을 수여했다. 이는 지하사업에 종사하는 인원들 가운데서 58번째인바 중국공산당내부에서의 그의 숭고한 지위를 증명할수 있다.

한락연의 일생은 전기적인 색채로 충만되여있으며 그의 신분 또한 극히 복잡하고 그의 사업도 도전으로 충만됐다. 그는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족으로서 그의 인생은 조선, 중국의 력사와 밀접하게 교차되여있다. 그는 예술가이고 혁명가이며 또한 소장이기도 하다. 그의 사적은 많은 연구가치가 있다.

한락연에 대한 연구는 그의 개인생애일뿐만아니라 그 시대를 연구하며 한 조선족이 민족독립과 국가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고 희생한 시대를 연구하는것이다. 그에 대한 연구는 예술면으로뿐만아니라 혁명사, 당사, 사상사 등 여러 면으로부터 폭넓게 연구할수 있다. 한락연이 거둔 성과를 연구하고 공산주의사업에 대한 그의 충성과 중국공산당에서의 그의 력사적지위를 연구하는것을 통해 중국조선족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안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뛰여들도록 해야 한다.

박건일교수는 더 많은 조선족들이 한락연연구에 참가할것을 기대하면서 “합심해서 한락연연구를 계속 이어가며 차세대에 진실하고 풍부한 한락연연구성과를 남기기를 바란다”고 덧붙여 말했다.

북경조선족대학생들과 함께 있는 박건일교수

/길림신문

Total : 1576
  •   올해 4월 1일은 《길림신문》창간 30돐이 되는 날입니다.저는 이 기회를 빌어 30년간 《길림신문》을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으신 전체 선배님들과 재직종업원들 그리고 《길림신문》을 여러 모로 떠밀어준 사회 여러 분야의 지성인, 광범한 애독자들에게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길림신문》(1985년 4월 1...
  • 2015-04-02
  • 《길림신문》 창간 30주년 기념기고 ■박명화 《길림신문》은 다년간 조선족군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권익을 수호해 사회안정을 수호하는데 특수한 기여를 해왔다. 사회적문제가 발생하면 대담히 개입하고 주동적으로 여론인도를 하여 문제해결에 적극 나섰다. 그중 많은 기획보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수많은 조선족 피...
  • 2015-04-02
  • 《길림신문》 창간 30주년 기념기고 ■정경락 《신문이 재미없다》는것은 신문이 독자와 점점 멀어진다는것이다. 따져보면 신문의 주독자가 백성인데 백성의 관심사, 백성의 리익과 관계되는 보도가 활발하지 못하거나 적다보니 독자들이 구독구미를 잃는다는것인데 이는 또한 당보를 비롯한 국내 여러 매체들의 통병이기도...
  • 2015-04-02
  • “전통상례의 가치와 현대적계승” 주제로 청명절을 앞두고 30일 연변대학과 주문화국에서 공동으로 주최하고 연변무형문화재보호중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연변대학 민족연구원에서 공동으로 주관한 “제2차 조선족상례풍속 공동학술심포지엄”이 연변대학에서 개최되였다. 심포지엄은 “조선...
  • 2015-03-31
  • 뭉개진 정체성의 붓끝 -재중작가 최헌기 회고전…경계에서 느낀 감정, 국제정세 비판적 시각 담아 -'디아스포라'의 삶과 예술 살피는 영화, 미술관서 상영도   최헌기 작가   최헌기, '자화상', 150×145cm, 1994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들. 디아스포라(D...
  • 2015-03-26
  •   ▲ 2014년 11월19일 오후, 재외동포재단 회의실에서 개최된 ‘2014 재외동포재단 UCC공모전 및 학위논문상’ 시상식에서 인사말 하는 조규형 이사장.     [서울=동북아신문]재외동포재단(이사장 조규형)이 동포사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재외동포에 대한 내국민의 이해를 돕고 재외동포사회 발전...
  • 2015-03-26
  •      다종 민족을 아우러야 하는 아룽기문화관으로 다양한 민족을 상대로 각양각색의 대준문화활동을 활발히 펼쳐가면서도 문화관에서는 산재지역 어느곳보다 짝지지 않게 조선족문화예술에 대해 중시하고있었다. 내몽골자치구 훌룬부이르시 아룽기문화관 관장 전양흥(50세)은 한족이다. 아룽기에는 한족, ...
  • 2015-03-23
  • 최헌기 작가. 위대한 광초 偉大的狂草 재중교포 작가 '최헌기 崔憲基' 전이 오는 20일부터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 1962년 길림성에서 태어난 최헌기는 중국 국적이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이산의 작가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회회와 설치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 2015-03-18
  • 의 중국 송장예술사생협회 정호표부회장의 푸짐한 고향 정   이는 지난 3월 12일 연변대학예술학원전시청에서 막을 올린 - 에서 정호표(鄭虎彪,48)화백이 관객들에게 올리는 감사의 말이다. 이번 은 그가 3개월간 고향의 설경현장에서 담아낸 50폭의 유화-이 전시되였다. 정호표는 이름에 한점 부끄럼없이 명실공히 북...
  • 2015-03-17
  • 《2011 중국조선족문학우수작품집》과 《2012 중국조선족문학우수작품집》이 최근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됐다. 두권의 우수작품집은 2011년과 2012년 사이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료녕신문》, 《길림신문》, 《장백산》, 《도라지》, 《연변문학》, 《송화강》 등 잡지와 신문에 발표한 문학작품중 수...
  • 2015-03-1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